LA북한인권 국제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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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는 UCLA 한국학연구소(소장 존 던컨)와 공동으로 지난달  14일 UCLA 캠퍼스 내 ‘찰스 영 도서관’에서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을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15일에는 LA한국교육원에서 한인단체 인사들을 초청해 인권관계 동포간담회를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학계와 대북 지원단체 관계자 등 북한 전문가들이 참석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북한 주민 인권침해 상황을 설명하고 인권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을 모색했다. 동포간담회에서는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을 알리고 동포사회가 요청하는 인권문제 등을 다루었다.
<편집자주>

















▲ 현병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인사하고 있다.

이날 심포지엄에는 라종일 전 영국 주재 대사가 북한의 인권 상황을 국가 권력에 의한 지속적인 인권 침해로 규정하는 기조연설을 했고 김성영 인권위원, 데이비드 호크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위원,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샌드라 파히 박사, 이기욱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LA 지회 고문, 해나 송 LINK 대표가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실상과 전망을 발표했다.
또 USC 한국학센터 데이비드 강 소장, 스탠퍼드대학 신기욱 교수, 국제구호단체 머시코(Mercy Corp) 활동가 데이비드 오스틴 등은 국제기구, 국제적 비정부기구를 통한 북한 인권 개선 방안 등을 토론했다.
또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탈북 후 현재 미국에 거주 중인 탈북자 2명이 직접 참석해 자신들이 경험 한 북한 실상을 증언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측은 “북한과 교류가 많은 LA 지역에서 한인 및 주류 사회에 북한 인권상황을 알리고 국제사회 공조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번 심포지엄을 개최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4년부터 유럽과 미국 등에서 매년 북한 인권개선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다.


삶의 질을 높혀야


국가인권위원회의 현병철 위원장은 이번 LA방문을 통해 인권위원회의 역할이나 사명에 대해 설명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권위원회 활동에 대해 오해도 하고 있고, 다르게도 이해를 하는 면이 있다고 밝혔다. 그래서 해외에 나가 인권문제 심포지엄도 하고, 현지 동포사회와도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 탈북자 조성혜씨(중앙)과 다니엘 이씨(오른편)

보통 인권위원회에 대해 혼돈을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국내에서도 인권위와 법원의 기능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도 받고 있다.  최근들어 인권에 관한 주문이 많아지고 있다. 인권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 확보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국가권력에 의해 인간 기본권이 침해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일부 요청사항에는 왜 인권위가 국가권력에 대한 감시 감독을 안하는가 라는 질책도 많다. 이런 주제에는 양심수, 언론자유 문제가 따라오고 있다.

지금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데는 세계 어느나라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삶의 질을 높히는 것, 생활밀착형 인권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특히 장애인, 노인, 어린이, 군인, 경찰, 학생 등의 인권이 관심 대상이다. 이들 계층에 대한 자유 기본권에 대한 문제 제기가 당면 과제였다. 특히 노인층은 530만 명 중 자활능력자는 150만명 정도다.
정신질환자들이 타의에 의한 입원동기도 문제다. 본인 의사에 따라 입원한 예는 불과 10%정도였다. 최근 인권위원회가 정신질환자에 대한 불법적인 처리를 한 병원에 대해 심한 경우 100억원을 벌금을 물린 예도 있다.

특히 한국에는 240만 장애인들의 조직이 강하다. 그래서 인권위원회에 장애과가 2개 부서나 된다. 그러나 노인층은 많아도  아직도 노인층이 집단화 조직이 약하다. 그래서 목소리가 약하다. 하지만 인권위는 노인들을 위한 “노인지킴이’도 만들었다.
인권위에는 매년 국민들로부터 약 5만 건의 각종 인권사례에 대한 신고를 접수하고 있다. 보통 지식층이나 부유층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만 저소득층 빈곤층들이 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사회에 알려진 해병대 총기사건, 국무총리 민간이 사찰사건, 양철 경찰서 사건 등등이 모두 인권위에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한편 최근 크게 부각된 인권 사항으로는 북한인권 사항이다. 인권사항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현대판 홀로코스크”이다. 
첫째로 북한 주민에게 인간의 삶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 과제이다.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이다. 북한에서 굶주림으로 사람들의 유전자가 변하고 있을 정도이다.

두번째로 ‘듣고 싶은 것 보고 듣고 말하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헌법이라도 북한 주민에게 읽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소련 독재 시절에는 유엔 결의로 풍선 등으로 소련으로 띄어 보낸 적이 있다. 최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이런 제의를 했는데 하지만 ‘유엔 사무총장은 결의안을 낼 수 없도록 되어 있다’라는 회신을 받았다.
특히 북한에 대한 지원 문제에 있어 확인절차가 필요하다. 투명성있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북한에 식량이나 물자 등을 보낼 때는 우리 국민들이 납득할 수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권위는 최근들어 탈북자 인권 문제와 관련 특히 국군포로 문제 뿐 만아니라 국군포로들의 자녀들이 탈북하는 것에도 주목하고 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자녀들은 다른 자녀들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 찾은 저같은 사람 천 명, 만 명 만들어달라”


“어릴 때 10차례 이상 공개 총살 장면을 봤습니다”


(UCLA대학교내 찰스영 도서관 콘퍼런스룸에서 지난 14일 열린 국가인권위원회-UCLA 공동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탈북자 조성혜씨와 데니 이 씨는 북한에서의 비참한 생활과 탈북하여 중국 에서 당한 고통을 증언해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미국 동부 지역에 사는 조성혜(25) 씨는 “식량이 부족한 북한 주민의 굶주림은 쥐와 뱀까지 먹을 정도”라며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중국으로 월경한 여성들은 공안에 체포되면 성적 희롱과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겪는다”고 고발했다.
조씨는 “북한 정부의 간부였던 아버지는 식량난 이후 가족을 챙기다 감옥에서 숨졌다”면서 “이후 8가족 중 어머니와 여동생, 나만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탈북을 하려다 체포되어 기차로 후송 중 고문으로 숨졌다. 이 사실은 당시 함께 있던 다른 죄수가 나중에 연락을 해주었다.
그러나 보안 당국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보하면서 ‘다른 감옥으로 후송 중 탈옥하는 바람에 처형됐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한송화씨는 첫번 탈북했을 때 조씨의 남자 동생이 남겨졌으나 굶어 죽었다. 당시 동생의 죽음에 대해 ‘심장을 바늘로 찌르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다. 조씨는 ‘북한에서 태어 난 것을 한탄했다’면서 중국에서 탈북자로 지내면서 중국인으로 가장하기 위해 중국어도 배우고 신앙도 가졌다. 

그녀는 중국에서 공안원에게 체포되어 중국 감옥에서 1년동안 학대를 당한 사실도 증언했다.
도문 근처 감옥에  수감 당시 중국 남자 군인들이 ‘옷을 벗으라’고 말했을 때 여자로서 부끄러워 주저하고 있을 때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렸다는 것이다.  특히 샤워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방송실의 군인들이 구경을 하곤 했다. 당시 추운 겨울인데 냉돌방에 내의 한벌과 담요 한장이 고작이었다.

어떤 날 몸수색을 기화로 군인들이 들어왔는데 생리하던 여성이 생리대가 없어 담요를 찢어 사용한 것을 보고, 그 여성에게 더러운 담요를 먹으라고 했다. 그녀는 “지금도 장춘 감옥에는 탈북여성들이 있다”면서 “한국정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1994년 첫 탈북 후 4차례나 강제 북송을 당했다는 조씨는 지난 3월 미국 의회에서 어머니 한송화 씨와 함께 북한의 실상과 중국 내 탈북자들이 겪는 고초를 생생히 증언했던 인물이다. 조씨는 “자유를 찾은 나를 보면서 여러분이 저 같은 조진혜를 천 명, 만 명 만들어 달라”고 호소해 눈길을 끌었다.

조씨는  지난 3월 5일 오후 미국 의회 산하 중국위원회가탈북자 북송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긴급 청문회를 열었을때 어머니 한송화씨와 함께 증언하기도 했다.이자리에서 조씨의 어머니 한송화씨는 수용소에서 보안원들이 “너희들은 이제부터 개다. 그러니 머리 숙이고 땅만 보고 걸어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라고 증언했으며, 조씨는  “임산부에게 차마 듣기 힘든 욕을 한 뒤, 각목으로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바닥이 피로 흥건하게 물든 장면을 봤습니다.”라고 학대 사실을 증언했다.


탈북녀들의 수난


탈북자 데니 이씨는자신이 17살 때 탈출한 북한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다.
중국을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본부를 둔 북한인권 단체 LINK의 도움으로 지금은 미국 서부 지역에 정착한 이씨는 2005년 겨울 북한을 탈출했다. 외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는 1년 전 중국으로 떠난 어머니가 연락이 끊기자 어머니를 찾기위해 중국으로 탈북했다.

북한에서 고등학교를 중도에 그만뒀다는 이씨는 “북한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일을 시키고 선생은 학생을 많이 때린다”며 “이런 환경에서 꿈과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겠느냐” 고 반문했다. 그는 김일성 시대에는 무료교육이었으나, 김정일 시대에 들어와서는 무료교육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집집마다 토끼 가죽을 공출해야하는 신세였다.  가죽을 가져가지 않으면 학교에서 벌칙으로 매를 맞기도 해서 학교 가는 것이 싫었다.

그는 “북한에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일을 하는 시간이 많다”면서 “그같은 현실에서 학생들이 무슨 꿈을 지닐 수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갈 때도 주민들은 무관심했다. ‘사람들을 중국에 판다’는 소문도 나돌고, 공장에 기계들을 뜯어 파는 행태가 많았다.
이씨는 상상조차 못할 일을 북한에서 자주 봤다면서 10여차례 이상 공개 총살 현장을 목격했다고 털어놓았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죄인이라며 총살하는데 공개 총살 땐 모든 가게 문을 닫게 한다고 이씨는 설명했다. 배가 고파 소를 잡아먹은 사람도 공개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이씨는 “북한 사람도 태어날 때 세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람의 권리를 갖고 태어나지만 굶어 죽고 맞아 죽는다”며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해 짐승보다 심한 취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온 탈북자들의 신세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노동의 대가도 받지 못하고 차별당하고 일하는 짐승 취급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중국에서 유랑하면서 운좋게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2006년에 할머니의 사망소식을 듣고 북한으로 가려던 것을 중단하고 중국에서 숨어 살기로 했다. 그러다가 Link의 도움으로 비밀보호소에서 생활하다가 심양 미총영사관에 들어갔다.  당시 어머니와 헤어졌으며, 어머니는 나중 중국 공안원에 체포됐으나  Link의 도움으로 미국에 올 수 있어 모자가 함께 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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