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선데이저널 30년 역사를 재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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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데이저널>의 전신인 <주간만화> 창간호 표지. 1982년 9월 23일자로 발간된 <주간만화>의 출범은 향후 미주 이민사와 함께 한 <선데이저널> 30년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 시사주간지이자 국내외적으로 손꼽히는 탐사보도 전문지로 자리잡은 <선데이저널>. 오는 9월 마침내 창간 30주년이라는 역사적 기념비를 세우게 된다.

지난 1982년은 서슬이 시퍼렀던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시절로 한국의 모든 언론방송사들이 강제 통폐합을 당해 그 순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던 암전의 시대였다.

이렇듯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을 뚫고 오롯이 일어선 <선데이저널>은 그 태동기부터 군부독재 정권을 상대로 해외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언론사 기능을 수행했고, 이후에도 그 초기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정치권의 지속적 감시자 역할을 펼치는 ‘정론지(政論紙)’로 거듭났다.

아울러 미주 한인 교민사회에 알게 모르게 만연돼 있었던 각종 부조리와 부정부패의 고리를 찾아내 차단했고, 소위 ‘언론의 사각지대’라고 불리우는 재벌, 대기업, 종교단체 등과 맞서 언론 고유의 정신인‘정론직필(正論直筆)’의 사명을 다했다는 평가다.

<선데이저널>은 어느덧 4반세기를 넘어서 창간 30주년이라는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으며, 비단 종이신문 뿐아니라 온라인 웹사이트(www.sundayjournalusa.com) 뉴스를 통해 전세계 매니아 독자층을 광범위하게 확보한 상태다. 이에 지난 30년사를 뒤돌아보고 향후 발전적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게 될 특별기획 시리즈 ‘선데이저널 30년 역사를 재조명하다’의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주>

지난 80년대 초중반 <선데이저널>의 명성은 LA 뿐아니라 오히려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에 투쟁하는 한국의 데모 현장이나 당시 민주화 활동을 펼쳤던 야당 정치인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왜냐하면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사실상 거론조차 금기시됐던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등을 여과없이 다뤘고, 실세 중의 실세인 동생 전경환과 측근들의 부패와 비리를 연달아 폭로하는 등 ‘언론통폐합’에 굴하지 않는 저항의 붓대를 뽑아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통폐합’ 과정의 일환으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은 해외 이민자들인 미주 한인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기 위해 ‘구 KTE(KBS의 실질적 자회사이자 미주독립법인)’의 설립을 시도했고, 그 뒷배경에 동생 전경환 씨가 깊숙이 개입했음을 최초로 고발했다. 뒤이어 <선데이저널>은 박정희 군부 독재정권의 2인자였던 이후락 일가의 미주지역 재산도피 은닉과정을 파헤쳐 시리즈 기사화함으로써 이들의 LA 상륙 자체를 무마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반군부독재 언론활동은 수많은 민주화 운동 시위장소와 데모 현장에서 조국의 민주화 세력들이 <선데이저널>을 한국으로 공수해 ‘호외’로 재배포하는 등 살아 숨쉬는 역사로 기록됐다.















▲ 연 훈 발행인(사진 오른쪽)은 정론직필의 정신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맞선 결과 30대 시절부터 수많은 명예훼손-가처분신청 등의 민사소송에 휩싸여 왔으나, 늘 그 진행과정에서 법원으로부터 오히려 진실이 밝혀지는 결과를 낳았다. 사진은 지난 87년 당시 모 언론사와의 소송과정에서 만족스런 결과를 받아든 뒤 웃음 짓는 연 훈 발행인의 모습(사진 왼쪽은 나신명 변호사).

이처럼 ‘언론통폐합’으로 위축된 사기가 꺾인 위기 속에서 꿋꿋이 항거정신을 고수했던 <선데이저널>의 시대정신. 오늘날까지도 “언론의 취재 사각지대를 부정하고 그 어떤 외부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굳은 사명감을 이어가는 밑거름이 됐다.


선데이저널의 태동기


사실 <선데이저널>의 태동기는 전신 <주간만화>가 창간된 배경과 그 발전과정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지난 1982년 9월 23일 각고의 노력을 거쳐 발행된 <주간만화> 창간호. 제1호의 커버스토리 ‘나는 살고 싶다’의 소재는 ‘살인누명을 뒤집어 쓴 한인 동포 이철수 씨의 무죄석방’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룬 것으로 그 시작부터 논조와 접근 시각이 예의 심상치가 않았다.

이는 머지않아 매체가 향후 ‘시사주간지’로의 대변신을 예고하는 신호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듯 <주간만화>로 출발한 초기 시절만 해도 매체의 색깔은 “힘들고 어려운 이민사회에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취지가 강하게 풍겨났다. 이는 언론인이기에 앞서 ‘만화가(필명 유명환)’였던 연 훈 발행인의 오랜 숙원이자 꿈이었다.

‘소년한국일보’ 신인작가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만화가들인 허영만-이현세 등과 동문수학했던 숨겨진 이력의 연 훈 발행인. 시사주간지 <선데이저널>의 출발점이 된 <주간만화>의 시작은 그렇게 1977년 도미한 이래 본인 스스로 이역만리 힘겨운 이민생활을 체험하고 난 뒤 “미주 한인사회에 진정한 웃음을 전달하겠다”는 소박한 바램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이처럼 <선데이저널>의 30년 역사 속에는 발행인 뿐 아니라 기자, 편집인, 대표 등 1인 4역을 소화했던 연 훈 발행인의 역할론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대표 기자였던 발행인의 글은 남 다르게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품고 있었다. 이같은 특성은 아마도 만화가 출신인 발행인의 이력을 반영하듯 마치 시리즈 연재만화를 매주 기다리는 심정과도 같은 <선데이저널>만의 독특한 매력을 키워나가는 배경이 됐다.

결국 <주간만화> 창간 이후 LA 한인 이민사회에서 보다 심층 있는 시사주간지의 필요성을 느낀 연 발행인은 “교민사회의 진정한 소리를 듣고, 들은 것을 정확히 독자에게 전달하겠다”는 취지를 담아 발빠른 변신작업에 착수한다.

이와 관련 연 훈 발행인은 “무엇보다 먼 이국 땅인 미주 땅에서까지 군부독재의 강압적 통제로 검열된 거짓 정보만을 취할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이 안스러웠다”며 “어느 한 언론매체라도 객관적 시각에서 조국의 현실을 올바르게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강력한 시대요청을 느꼈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시대적 흐름에 부응해 <선데이저널>로 제호를 변경한 뒤 매체의 논조에는 뚜렷하게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반군부독재’ 성격이 강하게 묻어나는 등 ‘정론지(政論紙)’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해외 지역인 미주땅, 그것도 이민사회의 중심부인 LA에서 미력하나마 조국의 민주화 발전을 위한 투쟁의 노력은 그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시사정론지로의 변신, 그리고 DJ와의 인연


특히 새로운 제호로 탈바꿈되면서 <선데이저널>은 민주화 운동투사들인 DJ-YS 등 거물급 정치인, 그리고 야권 인사들과 ‘군부독재 타도’라는 같은 방향의 한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선데이저널> 제37호는 커버 표지인물로 당시 LA 강연회에 나선 민주화 운동투사 DJ의 모습을 담는 등 반군부독재 신문으로서의 과거 언론 사명을 엿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언론통폐합>으로 본국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용의 반군부독재 성향의 기사를 과감히 다뤘던 <선데이저널>은 한마디로 ‘눈의 가싯거리’였다.

반면 민주화 투쟁 인사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필독서가 됐을 정도로 국내외적 유명세가 차츰 피어나기 시작했던 시기가 이때다.

특히 이러한 정치적 배경의 맥락에서 흐름이 느껴지듯 故 김대중 前 대통령(DJ)과 <선데이저널>은 남다른 인연(?)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뒤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미국 강제 망명길에 오른 DJ. 지난 1983년 여름 이뤄진 DJ의 LA 방문은 1년차에 불과했던 신출내기 시사주간지 <선데이저널>로서는 놓칠 수 없었던 최고의 특종기회였다.

이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DJ의 당시 투숙장소인 쉐라톤 호텔에 메모를 통해 전달한 단독 인터뷰 요청. 다음날 아침 DJ는 당시 일면식조차 없던 30대 초반의 연 훈 발행인에게 손수 전화를 걸어와 숙소로 초대한 뒤 흔쾌히 인터뷰 요청에 응했고, “연 동지! 수고하네”라며 연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술회다.

이후 이듬해인 1984년 이어진 LA 강연회에서 DJ는 ‘민주회복과 조국통일의 길’이라는 주제로 “군인(軍人)이 정치(政治)하면 망국(亡國)이다”고 역설했고, <선데이저널>은 이를 대서특필함으로써 마침내 시사정론지로서의 색깔을 차곡차곡 잡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러한 반군부 언론활동을 놓고 항간에서는 <선데이저널>을 ‘김대중 신문’이라고 불렀을 정도의 갖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본지 발행인은 반정부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사실상 한국 방문길이 막히는 역효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선데이저널>과 DJ의 각별한 관계는 묘하게도 그 연줄이 줄곧 이어졌다. 특히 지난 1986년 6.29 선언 이후 반정부 인사에 대한 탄압이 해제되면서 몇몇 유력 인사들과의 인터뷰를 위해 한국행에 올랐던 본지 발행인. 이 소식을 전해들은 DJ는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해 오찬을 나누며, 손수 “언로개색 흥망소계(言路開塞 興亡所係)” <1986년 김대중>라는 휘호를 남겨주는 등 인연의 고리를 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글귀는 율곡 이이 선생의 상소문에 나오는 문구로 “언로가 열렸느냐 막혔느냐 여하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마디로 DJ는 어려운 시기에 반군부독재 언론활동을 통해 뜻을 같이 한 <선데이저널>의 높은 언론 사명감에 대해 친히 격려했고, 강한 동지애를 은연 중에 내포했던 것이다.

사실 현재 시점에서 지난 30년사를 뒤돌아보면 <선데이저널>의 신문 논조는 정치적으로 분류했을 때 진보-보수를 따지기보다 권력자들의 반대 편에 서는 ‘친야당적 성격’이 짙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각별한 인연관계였던 민주화 투사 DJ가 훗날 대통령 직에 오른 뒤 권력의 정점에서 친인척과 측근들이 각종 부패와 비리에 연루됐을 때 <선데이저널>이 역으로 반 DJ  선봉장 역할을 하는 운명적 갈림길에 섰다는 점에서도 잘 입증되는 부분이다.

<선데이저널> 30주년을 즈음해 지난 날을 떠올린 연 훈 발행인은 “일부에선 지난 80년대 반군부독재 언론활동을 놓고 나를 DJ의 사람이다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실상과 차이가 믾이 난다. 솔직히 내가 인간 김대중 선생을 좋아했다는 점만큼은 인정한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정치인 DJ가 훗날 대통령 직에 올라 권력을 잡고난 뒤 친인척과 최측근들이 부패비리에 총망라됐을 때 기자로서 그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며 <선데이저널>의 운명적이고도 필연적인 ‘영원한 야당’ 역할론을 강조했다.


<제2화 “잿더미 속에서 일어나다” –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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