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관리에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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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으로 재 입북한 박인숙 탈북자의 기자회견
탈북자 중에서 위장 탈북 간첩이 최근에 다시 체포되고, 탈북자로 왔다가 다시 재입북하는 케이스도 생겨나 한국정부의  탈북자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한때는 남한에 와서 “이처럼 자유로운 세상이 있을 수가 있을가”라며 놀래던 탈북자가 북한 당국의 꼬임과 협박에 다시 이북으로 들어가  남한을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의 일어난 위장탈북 간첩사건과 재입북 사건을 풀이한다 <편집자> 

2006년 탈북 후 남한에서 생활하다 최근 재입북한 탈북자는 박인숙(여,66) 씨로 확인됐다. 박수진 통일부 부대변인은 지난달 29일 브리핑에서 “북측에서 진행된 기자회견 내용의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재입북한 인물은 2006년 입국해 서울 송파구에 거주하던 박인숙씨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2006년 3월 중국으로 탈북한 박씨는 같은 해 6월29일 동반가족 없이 국내로 들어왔으며, 지난달 중순 중국 으로 출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기자회견에서 지난달 25일 북한으로 재입북했다고 밝혔다. 그는 “6ㆍ25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간 아버지를 찾으러 탈북했다”며 “남한 정보원들의 유인전술에 걸려 남한 으로 끌려갔다”고  북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주장했다.



그는 서울 송파구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생활해왔다. 박씨는 자신의 나이를 66세로 밝혔지만 탈북 후 국내 입국 시 정부 당국에는 1941년생(71)이라고 밝혔다. 박씨가 자신의 이름을 박정숙 이라고 밝힌 것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태어날 때는 박정숙이었지만 북에서 공민증을 만들 때부터 박인숙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국내 입국 시에도 박인숙이라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박씨 재입북 경위와 위장 탈북 가능성에 대해 통일부 당국자는 “특이한 정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재입북 뒤 북에서 기자회견까지 한 경우는 지난 2000년 재입북한 유태준씨가 유사한 사례다. 유씨는 이후 2001년 다시 탈북해 현재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탈북자 가운데 북으로 재입북한 사례는 적어도 수 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자유 로운 세상인데…”


최근 동아일보는 재입북한 박씨가 남한에서 살 때 찍힌 동영상을 소개했다.
“여긴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인데 그동안 북한의 독재 속에서 살아왔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남한에 쭉 살면서 야! 참으로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서는 하루하루 한끼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는데 여기오니까 이렇게 쌀을 아예 포대로 갖다 놓고… 저는 그 쌀 포대를 안고 막 엉엉 울었어요”

북한으로 돌아간 박인숙씨가 한국에 거주하던 지난해 했던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재 입북 후 북한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탈북자들은 남조선 사회를 저주하고 자신들을 원망 하며 공화국(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던 주장이 진심이었을까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 한 시민단체가 공개한 영상에는 박 씨가 탈북해 한국에 살며 남한 사회에 대해 느꼈던 심경이 담겨있다. 영상은 지난 2011년 2월에 촬영된 것으로, 영상을 제작한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윤용 대표는 “탈북자들의 경제적 문제를 돕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 인터뷰를 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 씨가 한국 생활에서 가장 감격 했던 것은 ‘자유’였다. “자고 일어나니까 누구도 오라는 사람이 없어요. 북한 같으면 뭐 아침부터 종치고 뭐 청소 나오라 직장 나오라 그러는데 여기서는 쇼핑을 가고 싶으면 가고 제 마음대로 하는데 아무도 뭐라 그러는 사람이 없어요. 북한 같으면 어느 하루 한시도 자기 시간이 아니에요”
“새벽 5시 쯤 인민반에서 종을 치면 도로를 먼지 하나 없이 닦아야 돼요. 매일아침 출근 전 밥 먹기 전에 길을 닦고 또 겨울이 되면 땅에 얼음이 얼잖아요. 매일 새벽 나가서 언 것을 깨고 시멘트 바닥이 드러나게 해놓고 들어와야 돼요. 그리고 들어와서 밥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그냥 다시 일터로 나가는 거예요.

그는 또 인천공항을 통해 처음 들어 왔을 때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풍광을 보며 감격에 북받쳤던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노을이 진 저녁 무렵이었는데 인천에서 서울 로 들어오는 그 길이 있잖아요. 너무 정교하고 정말로 어떻게 말로 표현을 못 하겠어요. 그때는 몸에 막 열이 오르고…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일생동안 보지 못하던 그런 광경에 매혹됐어요. 저녁이 되니까 거리 가득하게 불빛이 지기 시작하고…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어린이가 ‘엄마한테 뭘 사달라고 할까’하는 글이 쓰여 있었어요.



북한에는 ‘21세기 태양 김정일 만세’ ,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이런 전투적인 현수막이 대부분인데, 두 사회상이 확 떠오르는 거예요.
그는 이어 폐쇄된 북한 사회에 대해서도 비난했다. “옛날에 북한에서는 남북간 교류로 예술인이나 정치인 들이 왔다 갔다 할 때 남한에 차가 매우 많은 것을 보고는 ‘아 너희들 우리가 온다고 하니까 차를 여기다 다 모아 놨구나’생각했어요. 우리가 너무 폐쇄되고 조직적인 사회에 살다보니깐 그렇게 생각했는데 와보니까 이것이 현실 이었구나 깨달았어요.”

“길에 꽉 차있는 자동차를 보면서 ‘참으로 별 세상이고… 한시에 갈라진 두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여기는 정말 사람 사는 세상 같은데 왜 되지 않는 사회주의를 해가지고 그렇게 까지 못살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그는 인터뷰 말미에 “식구들을 거기다 두고 와 있으니까 가슴이 아파 하루도 눈물 없이 사는 날이 없어요.” 라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조선데스크]수많은 ‘박인숙씨’의 비극

강철환 조선일보 객원기자•북한전략센터 대표


북한으로 되돌아가 기자회견장에서 남한을 비난하면서 김정은에게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박인숙씨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탈북 단체 모임에서 자주 봤고 개인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 강철활 기자

온화한 모습이지만 얼굴이 항상 어두웠고 근심이 깊어 보였다. 가족에 대해 물어봤을 때 북한에 아들이 있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북한 체제를 동경했거나 좋아했다는 것은 출신 성분이나 살아온 배경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박씨가 북한으로 되돌아갈 마음을 가졌을 때는 목숨을 포기할 각오를 했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해졌다면 목숨을 내놓고라도 자식을 구하고 싶은 것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박인숙씨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고 분단과 북한의 폭압 체제가 만들어낸 또 하나 반인륜 범죄의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박인숙씨 건과 유사한 사건은 이전에도 종종 발생했다. 그 주인공은 모두 잘 알던 사람이어서 당황 스러웠 지만 우리는 북한을 체험한 사람들이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1996년 남한에 들어왔다 다시 입북해서 남한을 헐뜯는 강연을 하다가 재탈북한 남수씨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함경북도 온성에서 우산공장 지배인을 했던 그는 ‘빨간물’이 덜 빠진 상태에서 회사 공금 문제로 탈북했다가 남한까지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사업 실패로 희망을 잃은 그는 북에 남겨둔 자식들이 생각났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는 “참 우스운 이야기지만 다시 북한에 가서야 남한의 자유가 소중한 것을 깨달았고, 겨울에 찬물도 안 나오는 북한의 현실을 다시 느끼고서야 남한의 풍요로움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을 모두 이끌고 재탈북해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비록 재입북한 죄 때문에 감옥 생활도 했지만 자유가 있는 남한이어서 감옥 생활도 좋다고 했다. 남쪽에서 보면 괘씸죄이지만 그의 입장에서 보면 재탈북은 어쩌면 영웅적인 행위다. 김정일이 직접 나서 용서하고 우산공장 지배인으로 다시 임명했는데 그걸 박차고 나왔다. 김정일을 망신 주고 북한 인민들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이다.

북한의 아내와 자식을 구하려고 재입북했다가 체포돼 종신 수용소에 끌려갔던 유태준씨는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풀려나 역시 김정일의 방침을 받고 북한 사회에 재정착했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재탈북했다. 그는 북한의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남한의 어머니에게 “인간쓰레기, ○○년은 인간도 아니다”는 욕설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김씨 부자 사적관의 해설원이던 고청송씨도 남한에서 사업 실패로 방황하다 북한의 가족이 그리워 재입북 했지만 국가보위부는 그를 지하 감방에서 때려 죽였다.
북한은 거대한 감옥이면서 인질 국가다. 탈북자들은 그 누구도 북한에 남겨두고 온 가족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까운 가족을 인질로 잡고 간첩질을 시키고 재입북(再入北)을 강요당할 때 사람들은 괴로워한다. 박인숙씨는 바로 그 악랄한 정권에 자식을 인질로 잡힌 힘없는 한 어머니의 비극적인 모습일 뿐이다.







 





탈북자북한 재입북과 여간첩 사건은 무엇을?

최근 탈북자 중 한 사람은, 인질로 잡혀 있는 아들 생각에 잠 못 이루다 다시 입북했으며, 또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정보를 빼내려는  간첩 임무를 안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두 여인네를 통해 북한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지켜야 할 안보관과 대북관을 다시 한 번쯤은 점검해 보아야 될 시점이라 생각된다.

재입북한 박인숙씨, 그는 한 평범한 생계형 탈북자인가?











 ▲ 여간첩 이경애
그녀는 2006년 탈북자의 물결에 남한으로 들어온 평범한 북한의 아낙네였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 시작되면서 부각된 식량난, 그로 인한 어려움은 많은 북한 주민들의 중국과 남한 행에 대한 소문 이 그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6. 25때 남한으로 내려간 아버지 생각을 떠올리며, 자기도 탈북 하여 남행길을 통한다면 아버지의 소식이라도 알 것 같은 마음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렇게 찾아온 아버지가 있다는 한국 땅이지만 정착이 생각처럼 쉽지 많은 않았다. 반세기 만에 만난 아버지 는 병상에서 박씨를 알아보지도 못하다가 며칠 후 사망했고, 정부의 보조금과 친척 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언젠가부터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북에 두고 온 아들을 통해 박씨의 탈북을 확인한 북한 정권은 아들을 통해 박씨를 협박했다. 굴복한 박씨는 중국을 통해 입북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국에 있는 사촌에게 전화연락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김일성대 대학원 출신 위장탈북 여간첩 이경애는?

이경애(45)는 탈북자로 ‘위장 입국’했다가 붙잡힌 여간첩이다. 그녀는  1993년 김일성 대 경제학부 준박사(석사) 과정을 나온 엘리트 출신으로 드러났다. 한국으로 위장입국하기 전 이경애는 중국 선양(심양)에서 한국 유학생을 상대로 민박집을 운영하며 남한 정보를 수집한 공로와 북한산 슈퍼달러위폐 교환으로 북한 정부에서 훈장까지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북한에 있는 친척을 찾기 위해 노력하던 CIA출신 재미동포에게 가짜 친척으로 위장해 의식적으로 접근했으며, 지난해 간첩활동을 위해 남한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었다.
위의 두 사람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한국사회의 안보관과 대북관에 대한 오늘의 시각차이이다.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거의 지내본 적도 없는 한 평범한 탈북자의 재 입북에는 거의 모든 언론이 동원되고 갑론을박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민주주의를 전복하려는 엘리트급 남파 여간첩 사건은 아예 관심 조차 하지 않는듯하다.

기껏 열손가락으로 꼽을 수밖에 없는 수의 언론방송기관들의 보도가 있는 수준이다. 간첩행위로 정식으로 구속 기소된 6월 2일부터 오늘까지 구태여 언론에서 보도된 그 수를 비교해 본다면 얼추잡아도 10배 이상 관심이 잘 못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고 있는 대북관 혹은 안보관의 정점이 아닐까?

자유민주주의가 진실로 대한민국 우리 제도의 오늘을 있게 한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우리 모두는 이번 일을 통해 북한 현 체제가 추구하고 있는 우리의 자유에 상대적인 증오감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불감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질병으로 키워 골병으로 된다면 과연 자유민주주의 우리 체제는 항상 건강하고 괜찮을까?


(북한전략정보연구센터-최다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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