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 박사 김상옥, ‘박정희와 5.16-숨겨진 인물’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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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와 박근혜 후보
5·16 군사 혁명과 부정선거 원흉 제거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부패 부정에서 3선 개선의 재집권 시도로 한국 정치권은 건국 이래 최대 위기, 야당에선 “못 살겠다 갈아보자” 표어를 내 걸어 급기야 4.19 청년 학생이 자유당 몰락을 가져와 이승만은 하와이 망명, 신민당 윤보선 장면이 새 정부를 구성하고 새 정책을 시도 하였으나 자유당 부정선거 주범들은 하나도 처리 안하고 눈치 보기 정책으로 다시 “무능부패” 민주 공화국의 판국 이었다. 당시 2군사 5군단 단장 박정희 소장이 혁명을 주도하여 군사혁명을 성사 시켰다.

혁명 공약 제7항에 “우리는 혁명이 완수되고 새 정부가 성립되면 모두 군으로 원대 복귀한다”고 서약하였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면에서 단 시일에 모두 혁신 될 수는 없었다. 국가 재건 최고 위원회”를 구성해 부정 선거 원흉들인 곽영주, 이정대, 이화룡, 최인규를 사형에 처하고 시급한 경제, 산업 창출 계획으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고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새마을 운동으로 농어촌 신개발 운동을 펼쳐 나갔다.
혁명 주최와 정치원 사회에서 박정희 소장의 대통령 출마를 강력히 제의 하였으나 혁명공약의 “원대복귀” 약속으로 출마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신민당과 야권에서는 박정희가 후보로 출마 하여도 그에 대동할만한 후보가 전혀 없었다.


신민당 유진산이 대통령 출마 적극 권유


신민당 당 대표가 박정희 소장을 찾아 출마를 강력히 제의 하였으나, 박정희는 “민주 국가에서는 반드시 후보들이 나와 선거를 치루어 정부를 세우는 것이지 단독으로 출마 하는 것은 다시 불법 정권 장악이니 안된다” 하였으나 당대표 ‘유진산’이 ‘신민당에서 후보를 선정하겠으니 당·낙 여하간에 출마해 달라는 권유를 받고 박정희는 진·퇴 양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선 선거 투표일 1주일 앞둔 현 시점에서 박근혜 후보를 옹호, 편수 할 의도는 없으나 야권 후보, 야당에서는 박 후보 부친을 공격하여, 불법 군사혁명, 유신헌법, 인권 등을 처들어 박 후보를 헐뜯고 있으나 박정희의 공과의 박 후보와는 무관한 일이다. 혁명 당시 박 후보는 여중생, 모친 육 여사 총격 사망 시엔 프랑스 파리에 유학중 박정희의 정치와는 무관한 당시 상황이었다.
지난 50년의 정치 흐름에서 박근혜의 공과를 쳐들어 비판하는 것은 야권 후보들의 비열한 공격이다.


청와대 경호반장 하경대와 차지철 이연택


나와는 어릴적부터 인연이 많았던 하경대(별명: 중동 따르마)형은 중동고 졸업하고 육군종합학교, 해병군관학교, 헌병과 교육 마치고 서울 해병 헌병 파견대장으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 뒤 건물에서 근무하였다.
형과는 부산 피난 때부터 부산시 토성동에 창립된 “대한 아마추어 레스링 연맹” 창설 회원으로 함께, 매일 함께 운동을 하면서 깊이 알게 되었다. 창설 주동 선수 오기록(국제심판) 이중호(국가선수)선배들 주축으로 대동 원자탄, 배재 드럼통 용산 벽돌, 휘문곰, 명동사자, 중동 EK르마, 서울 환도후 레스링 연맹 회원들이 서울시 “깡”세계  주름 잡았었다.

그 후 나는 헌병 사령부 헌무과에 배치되어 3년반 근무하면서 따르마 형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고, 사건에 체포된 그분들 특별 배려 청탁도 많이 도와주었고 그 당시 명동의 집합소(다방)에 토요일이면 7,8명 모여 주말을 함께 보냈다. 그 중에는 소위 “가다”패중 “차지철”중위가 있었다. 후일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차지철 형은 교회 권사이신 모친을 모시고(부친사망)어렵게 지나다 대학 진학 할 학비 조달이 어려워 대학포기, 육군 종합학교로 특수훈련 마치고 경기도 소사(부평시)의 “777특공대”로 배치, 토요일은 서울에 와 명동에서 우리 그룹과 지내다 일요일 오후 부대로 귀대하였으며, 술·담배도 안하고 사람이 정중하고 특공대 주대장 답게 무게 있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혁명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 이분들 혁명에 가담해 불운한 일생 마쳤다.


육여사 피살에 통감 할복자살기도


육영수여사가 장충제육관 문세광(제일 교포 청년) 총격으로 쓰러지자 하경대형은 경호반장으로 책임감에 장례식 후 칼로 배를 가르는 할복 자살을 기도 했다가 응급 구조로 실려가 사망은 안했으나, 청와대 떠나고 황달병으로 환자가 되어 10여년 고통 받다 사망했다.
하경대 형이 청와대를 떠나고 박종규(혁명당시 대위)가 경호반장 떠나고 차지철이 경호실장 근무하다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쓰러졌다.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과 김재규는 의견 충돌로 오랫동안 격돌하다 김재규의 반동으로 비극이 생긴 것.

김재규와 박정희는 아무런 감정 대결도 없었다. 만약 하경대 형이 있었다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63년 내가 미국으로 떠날 때 반도호텔(지금 롯데) 앞까지 나와서 환송해주며, “돈도 없이 미국엔 가서 뭐하냐? 나하고 경호실이나 비서실에서 함께 일하지… 빨리 학위따고 돌아와라‘며 봉투에 여비 보탬으로 달러를 몇 장 넣어준 고마운 형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또한 57년의 친우 이연택 박사(전 대한체육회장)은 이직도 전화로 환담을 나눈다. 50년 지난 해외생활-이젠 모두 노쇠해 옛 친구 모두가 소재불명이지만 이 친구와는 가장 오랜 친구 중 하나로 50년 공직 생활하면서 청렴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내가 김포공항에서 떠날 때 공항까지 나와 환송. 그 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핵심 참모로 일했다. 88올림픽 한국개최준비위원장, 사무총장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행정수석비서관으로 근무시에, 노태우에게 건의하라고 전화도 내역을 전해주었더니, 이를 건의해 노태우가 실천에 달성했다.
경북궁 뒤에 언덕 위, 일본인들이 건설했던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를 지은 후, 광복이후 이승만 초대부터 전두환까지 협소하고 상징성 없는 건물을 경무대로 명명해 쓰고 있어 나는 “북한산 중턱에 한국 전통 건축 식으로 새로 지어 옮기면 어떠냐’라는 나의 제의를 이연택에게 했으며 노태우가 용단을 내려 성취된 것이다.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꾼 것은 윤보선이었으나 아무도 새 청와대는 새로 옮기지 않았다. <이하 생략>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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