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장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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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김대중 정부 때 이종찬 부장을 만나러 안기부를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 부장은 안기부를 환골탈태시킬 개혁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었지요. 방만한 조직을 슬림화 하고, 국내 파트 보다 해외 및 남북 파트를 강화하며, 안기부 ‘악명’의 진원(震源)인 국내정치 개입과 권력 남용을 막는 것 등이 개혁의 핵심이었습니다.
내곡동 안기부는 죄 없는 사람까지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참 몹쓸 동네‘입니다. 본관 건물과는 한참 떨어져 있는 안내소인지 초소인지를 들어 설 때부터, 호랑이 훈육선생 방에 불려 들어가는 불량학생 ’일진‘이 된 기분에, 진저리가 쳐집니다.
그때 김대중 정부는 무슨 무슨 게이트니 하는 사건들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새 정부 초기의 정치적 혼란상을 비판하며, ‘감히’ 안기부장 방에서는 내뱉을 수 없는 정부 욕을 겁 없이 해댔습니다. 그러자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던 이 부장이 옆에 있던 참모한테 한마디 했습니다.
“어이, 여기 이 손님, 지하실 구경 좀 시켜 드리지-.”
‘지하실 구경’의 의미를 알아챈 내가 짐짓 겁먹은 얼굴로 응수했습니다.
“왜요, 칠성판에 한번 누워 보라구요? 그러죠, 뭐.”


칠성판의 추억


안기부 지하실-. ‘중정 남산분실’로 더 잘 알려진 그곳은, 군사독재의 음습한 흔적인 고문실이 있는 곳입니다. 칠성판은 고문경관으로 유명한 이근안 경감이 발명(?)했다는 ‘한국형’ 고문대지요. 이 부장은 함부로 ‘깐죽대는’ 고약한 해외파 기자인 나를 지하 고문실로 끌고 가 라는 ‘지시 아닌 지시’를 내렸고, 나 역시 칠성판에 기꺼이 올라가 얻어터지겠다고, 고약한 ‘기자 심보’로 응수를 한 겁니다.
 이종찬 부장은 고교 3년 선배인데다, 내가 고국 취재여행 때 자주 만나는 ‘편안한’ 취재원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농담은 스스럼없이 나누는 사이였지만, 사실은 그때 안기부 지하실에는 고문실이 없었고, 당연히 ‘공포의’ 칠성판도 없었습니다. 안기부 뿐 아니라,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과 보안사(기무사) 서빙고 분실등 악명 높던 고문실들도 거의 폐쇄된 상태였지요. 박종철군이 고문당해 죽은 남영동 분실은 지금은 정의와 인권이 ‘강물처럼’ 넘치는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간판을 바꿔 달았으니, 시대의 아이러니입니다.
이종찬의 안기부 개혁은 과감히 진행돼 명칭부터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권력남용과 정치개입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제2차장 소관 국내업무가 대폭 축소되고, 칠성판도 당연히 뜯겨 나갔습니다. 그렇게 거듭 태어 난 국가정보원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요.


불법 국정원과 날라리 국정원


이종찬에 이어 국정원장이 된 신건과 임동원등 2명의 김대중 정부 국정원장은 감옥엘 갔습니다. 구악(舊惡)인 칠성판 대신 ‘불법도청’이라는 신악(新惡)으로 국정원을 이끌려다 낭패를 당한 겁니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원은 ‘날라리’ 그 자체였습니다. 정치개입과 권력남용은 줄었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업무 방기(放棄)가 도를 넘었습니다. 노무현 시대는 날라리 국정원 덕에, 극렬좌파와 간첩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됐습니다.
 당시 국정원장 김만복은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인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현장으로 날아가 석방인질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등 일국의 최고 정보책임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찌질이  짓을 하고 다녀 국민들이 혀를 찼습니다. 노대통령의 평양방문 때는 김정일한테 비굴할 정도로 눈웃음을 치며 90도 배꼽 인사를 해 빈축을 샀지요.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장 원세훈은 칠성판도 도청도 날라리도 할 수 없는 ‘무장해제’ 상황에서, ‘가엾게도’ 인터넷 댓글이라는 신종 정치개입을 시도하다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국정원 내 심리전단 사이버 팀에 종북 좌파세력의 집권을 막기 위해 SNS 댓글 의견을 적극 개진토록 지시한 혐의로 정식 기소됐고, 국회의 혹독한 국정조사 까지 받게 됐습니다.
원세훈은 30대 국정원장입니다. 30대에 걸친 중정부장 안기부장 국정원장 중 퇴임 후에 피살 사형 구속 망명 불구속 기소등 ‘험한 꼴’을 당한 원장(부장)은 전체의 절반이 넘습니다.
3공의 중정부장 김형욱과 김재규는 납치 피살과 사형 선고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5공의 안기부장 장세동은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문민정부의 권영해와 6공의 이현우도 뇌물수수 혐의등으로 감방신세를 졌습니다. 전두환 유학성 안무혁등 3명은 군사반란과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습니다. 이후락은 한때 바하마로 망명했고, 김승규 김만복 역시 구속은 면했지만 입건유예등의 사법처리를 당했습니다.
국가 최고 정보책임자가 이럴게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권력의 부패와 탈권위적 민주화가 동시에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정치문화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퇴임하는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들이, 자기들이 즐겨(?) 사용하던 칠성판에 스스로 올라가 곤욕을 치를 걱정을 해야 하는 현실–. 국정원은 그들에게도 ‘참 몹쓸 동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에 한국은 멘붕


노무현과 원세훈이 그옇고 일을 냈습니다. 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 또 한사람은 17대 이명박 정부의 최장수 국정원장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양식, 그리고 무엇보다 투철한 국가관이 의심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고, 정보기관 수장 감으로는 함량이 한참 떨어지는 사람이 국정원장이 됐습니다. 그 대가를 지금 대한민국은 처절하게  치르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원세훈 파동의 와중에 야당이 서해의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들고 나오자,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 남재준은 NLL이 포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언 전문을 전격 공개했습니다. 정치권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도 엄청난 충격에 빠지면서 온 나라가 ‘멘붕’입니다.
《…서해의 북방한계선(NLL)은 숨통 막히는 괴물이다, 외국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나는 항상 북한의 대변인-변호인 역할을 했다, 북핵문제 해결하라는 주문은 판 깨자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6자회담에서는 항상 북측 입장을 갖고 미국과 싸워왔다, 남쪽 국민이 제일 싫어하는 나라가 미국이고 동북아 평화를 깨는 나라 1위도 미국이다, 세상에서 자주적인 나라는 북한 밖에 없다…》
이상은 노무현이 김정일에게 했다는 발언의 일부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의거월북’한 좌파 시민단체 운동 꾼이 수령 만세를 외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돕니다. 발표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발끈하는 문재인등 야당측 주장이 차라리 옳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노무현의 발언은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와 분단의 현실을 도외시한 억지 궤변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다수 남쪽 국민들의 생각이 자신과 같다면서 김정일을 ‘고무찬양’한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이자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금도를 내팽개친 망발의 극치입니다.


대통령이 반역을 하는 나라


진보 쪽 지식인인 고은 시인은 일찍이 노무현 대통령의 ‘말버릇’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은 웃통 벗고 이야기 하는 식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날 노무현과 김정일은 물론 웃통을 벗지 않았고, 와이셔츠에 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 만났습니다. 혹시 참이슬 보다 알콜 도수가 훨씬 높다는 평양소주를 과음해, 노무현이 잠시 정신 줄을 놓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주적으로 국민을 굶기고, 자주적으로 세계의 깡패국가가 되고, 자주적으로 인권을 탄압하는 나라의 세습 독재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자주적인 나라는 당신의 나라” 라고 입찬소리를 한 사람을, 대한민국은 5년 동안이나 대통령으로 모셨습니다. 나라가 지금까지 온전한 게 신통방통할 따름입니다.
민주당은 엊그제 까지만 해도 노무현의 NLL 관련 발언내용을 모두 공개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헌데 지금은 이를 공개한 남재준 국정원장의 사퇴와, 심지어 국정원의 해체까지 주장하며 앙앙불락 하고 있습니다. .
부작용도 후폭풍도 물론 거셀 겁니다. 허지만 NLL문제는 언젠가는 다시 불거져 진실공방으로 나라를 뜨겁게 달굴 인화성 강한 안보 이슈입니다. 이번에도 찜찜한 상태로 덮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군 출신의 강골 국정원장 남재준의 결기(結氣)로, 국가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정리될 기회가 마련됐습니다.
 어제 TV 조선에 출연한 전 육사교장 민병돈 장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노무현의 대화록에 나오는 그의 ‘반역적’인 언행에 놀랐다-.”
국가보위의 절대적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반역’을 했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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