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 맞을”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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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서울 인사동에 있던 태화기독교회관 터는 을사5적으로 악명 높은 이완용이 살던 순화궁이 있던 자리입니다. 순화궁은 당시 사저로는 서울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럭셔리 하우스로,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인조가 어렸을 때 살던 ‘잠저’이기도 합니다.
한일합방 후 이완용은 중추원 부의장이란 한직에 있으면서 태화정이라 불린 이 호화저택에  살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먹구름과 함께 소나기가 퍼 붙더니 정원에 있던 큰 소나무에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완용의 아들 항구와 외조카 한상룡은 당구를 치다 벼락으로 고목이 두 조각 나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해 안방으로 도망 가 숨었습니다. 나라를 판 ‘벼락 맞을 짓’을 한 이완용이, 막상 벼락을 맞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한상룡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벼락이 떨어진 순간 외숙은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항구에게 충고했다. ‘벼락이 떨어진 후에 도망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라고.”


문재인-원세훈 그 나물에 그 밥


NLL(북방한계선)을 둘러 싼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의 공개로 나라가 시끄럽던 지지난주, 인터넷엔 을사5적의 핵심인물인 이완용과, 그가 벼락 맞을 짓을 한 ‘을사늑약’ 얘기가 떴습니다. 문재인등 친노 그룹과 민주당 일부 인사들은 “노무현 대통령은 NLL을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강변하며, 그 근거로 대화록에 ‘포기’란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네티즌들이 “이완용도 나라를 팔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팔았다”며, 문재인등의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궤변이라고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장 원세훈은 “종북좌파 세력의 정치권 진입을 막아야 한다”며, 지난해 대선기간 중 심리전단 사이버 팀 요원들을 인터넷 댓글 달기에 투입했습니다. 검찰은 대선기간에 불법 선거운동을 한 혐의로 원세훈을 입건했고, 국회는 이번주부터 45일간의 ‘댓글 국정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원세훈도 문재인처럼 오리발입니다. 인터넷 댓글 달기는 대통령의 원만한 국정수행을 위해 국정원이 통상적으로 할수 있는 업무이지, 야당후보의 낙선을 겨냥한 선거개입은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작년 대선정국에서 그가 반드시 낙선시켜야 한다고 확신한 ‘종북좌파의 핵심’은 제1야당 후보인 문재인이었습니다.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국정원의 댓글달기 드라이브는, 변명의 여지없는 정치활동이자 선거개입인데도, 원세훈 역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식의 구차스런 변명으로 법망을 피하려 듭니다. 한 때는 무한권력을 틀어쥐고 세상에 군림한 국정원의 엘리트 정보 요원들을,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는 ‘쪼잔한’ 인터넷 ‘댓글 꾼‘으로 ‘타락’시킨 원세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시대의 죄인이 아닐까요.


여의도서 들리는 벼락 맞을 소리들


한 세기 전 태화정 낙뢰사건은 “매국노에게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나라 잃은 백성들은 환호작약하며 이완용을 저주했습니다. 벼락을 피해 도망 간 아들한테 “피해봐야 소용없다”라고 꾸짖은 이완용 자신도, 벼락은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늘이 벼락으로 자신의 죄업을 징치(懲治)하겠다면 기꺼이 받겠다는 듯, 이완용은 무서워 도망가는 아들을 꾸짖으며 벼락이 떨어져 타고 있는 정원 고목나무 곁에 섰습니다.
 이완용은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에 대해 “나는 나라를 판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라는 식의 자기변명은 결코 하지 않았고, 하늘에서 내리치는 ‘징벌’인 벼락을 피해 달아나지도 않았습니다. 온갖 ‘벼락 맞을 짓’에  온갖 ‘벼락 맞을 소리’로 나라를 어지럽히고 민생을 파탄내고 있는 요즘 정치인들의 ‘소인배’ 짓을 보면, 자기가 저지른 잘못된 행동에 끝까지 책임을 지고 죗값을 치르겠다고 당당히 나선 ‘매국노’ 이완용의 ‘그릇’이 훨씬 더 커 보입니다. 매국노 예찬이 아니라, 요즘 여의도에서 들려오는 벼락 맞을 소리들이 하도 시덥쟎고 뒤숭숭해 그냥 한번 해보는 말입니다.


노무현 ‘포기발언’ 분명히 했다


한국에서 어떤 정치적 사건이 크게 이슈화했을 때 이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각은 본국과 미주 동포사회가 엇비슷합니다. 이민 온 지 2~30년이 넘은 올드 타이머들이 많은 이민사회의 특성상, 본국인들 보다는 이쪽 교포들의 정치-이념적 스탠스가 약간 더 ‘오른 쪽’일 뿐 트렌드는 비슷합니다.
헌데 이번은 여론의 추이가 갈렸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관련 발언과 김정일과의 저자세 정상회담, 국가 안보와 영토수호의 의무를 포기한듯한 노 대통령의 ‘평양 언행’에 대다수 교포들은 망연-실망-개탄-분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사람 원래 그런 사람 아니냐. 새삼스레 비판할 필요를 못느낀다.”라는 식의 반응이 노무현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반응이었지요.
그런데 한국에서 전해진 여론조사 결과는 이곳 교포사회 분위기와는 딴판입니다. 지난 주 갤럽 조사에서는 53%, 중앙일보 조사에서는 63%가 “노무현 발언이 NLL 포기의사를 밝힌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중앙일보 전영기 정치부 기자는 지난 주말 1박2일에 걸쳐 103페이지에 이르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읽었습니다. 그는 이 전문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맥락 속에서 살펴보고, 역사적 배경과 연관 지어 공부하면서,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됐다고 칼럼(7월 1일자)에서 썼습니다.
“…NLL 포기이슈는 독립적으로 제기된 게 아니고 해주 경제특구를 김정일이 허락할 것인가 하는 이슈와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났다. 한마디로 1차 회의 땐 노 대통령은 NLL을 포기하지 않았고, 김정일은 해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기 싸움과 수 싸움 끝에 열린 2차 회의에서 김정일은 해주특구를 허락했고, 이에 맞춰 노 대통령은 NLL 포기 약속을 분명하게 했다. 서로 주고 받은 모양새다.”
북한의 해주를 경제특구로 개방하는 것을 전제로 노무현은 핵으로 무장한 북한이 충청도 까지 해상영토를 넓힐 수 있는 NLL 포기약속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전직 대통령한테 한국인들의 여론이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게 신기합니다.


여의도 상공에 날벼락 주의보


일종의 데자뷰 현상, 혹은 학습효과 같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본국인들은 5년을 노무현과 함께, 노무현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친북적인 언행, 일반의 의표를 찌르는 기행-기벽(奇癖)에 순치되고 익숙해진 한국인들에게 ‘평양 발언’은 ‘무항심(無恒心)의 영역 밖의 일이었을지 모릅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 정세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이곳 교포들의 불안한 심리와는 정서적 괴리가 있습니다. 이곳 여론과 본국 여론이 다를수 있는 첫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까닭-. 갤럽의 여론조사 설문이 요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NLL 지역에서 우리군대를 철수하고 평화지대를 만들어 남북이 공동어로, 공동개발하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영토인 NLL 포기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귀하는 노무현의 발언이 NLL 포기의사를 밝힌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포기의사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물음에 나올 대답은 뻔합니다. ‘천하의’ 갤럽이 왜 이런 식의 여론조사 설문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문을 이렇게 바꿨다면 어땠을까요.
“…NLL은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데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건드리는 물건이 돼있다. NLL은 바뀌어야 한다…. 이렇게 노무현 대통령은 말했는데, 귀하는 이 말이 NLL을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메이저 답변은 예스로 나왔을 겁니다.
엊그제 국회는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대통령 기록실에 보관돼있는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전문을, 녹음기록 까지 모두 열람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여와 야, 친박과 친노의 NLL 대혈투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모두가 상처 받고, 대한민국이 남북관계나 국제관계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곧 열릴 판입니다. 7~8월 장마철에 여의도 상공엔 날벼락을 머금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습니다. “벼락이 떨어진 후엔 도망쳐야 소용없다”라고, 한 세기 전의 실패한 정치 거목 이완용은 중얼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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