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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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지난 5월 10여년 만에 한국엘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의 모국 나들이여서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 2군데는 꼭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는 청계천을 아내와 함께 걸어 보는 것, 또 하나는 홍대 앞 카페에서 젊은이들과 어우러져 생맥주 한잔 꺾어보는 것이었지요.
 결론부터 말하면 청계천은 성공, 홍대 앞은 실패였습니다. 친구들한테 홍대 얘기를 꺼내자 “할배 주제에 꿈도 야무지다”며, 맥주는 커녕 나 같은 ‘노땅’은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곳이 그 동네 카페라고 일러 줬습니다. ‘잡상인 출입금지’ 라면 몰라도 ‘노땅 출입금지’ 라니? 이건 age discrimination(연령차별)의 중범죄 소송 감이라고 ‘미국 물 먹은 티’를 좀 냈더니, 친구들은 콧방귀였습니다.
 차별소송 전문 유태인 변호사를 고용해 홍대 앞 카페를 상대로 수 백 만 달러의 연령차별 소송을 걸면 어떻게 될까요. 나이 많은 할배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술집에서 쫓겨 나 그 충격으로 심장병, 임포텐스, 불면증 등 온갖 ‘죽을 병’을 얻었다며 판사 앞에서 ‘죽어가는 시늉’을 하면 승소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소송에서 배상받은 돈으로 홍대 앞에 가장 크고 럭셔리한 카페 하나 차려 주인이 되면, 문 앞에서 쫓겨나는 수모는 다시는 당하지 않겠지요.

‘꽃보다 할배‘ 대박 난 사연


꽃미남-꽃중년에 이어 요즘은 뜻밖에도 ‘꽃할배’가 대세랍니다. 홍대 앞 카페 같은데서 온갖 ‘멸시천대’ 받던 한국의 노인들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반전(反轉) 드라마가 일어났지요. 케이블 텔레비전인 tvN의 예능 프로 <꽃보다 할배>가 일으키고 있는 인기 돌풍이 대단합니다. 케이블 방송은 시청율이 1%를 넘으면 성공이라는데, 이 프로는 지금 6%를 넘어, 지상파로 치면 3~40%의 초대박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자극적인 내용도, 억지로 웃기려는 연출도, 허무맹랑한 스토리 설정도 없습니다. 평균연령 76살의 노인 4명이 세계 배낭여행을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들이 과장이나 꾸밈없이 사실적  수법으로 카메라 앵글에 담겼습니다. 원로 탤런트 이순재 백일섭 신구 박근형 등 개성이 각기 다른 할배 4인방을, 톱 탤런트 이서진이 시중을 들며 함께 배낭여행을 하는 플롯입니다.  요즘 TV 예능에선 연예인 2세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프로나, 아이돌 그룹의 젊은 애들이 떼 지어 나와 이상한 짓거리로 눈요깃감을 제공해 주는 프로가 시청율 경쟁에서 이기고 있습니다. 리얼 버라이어티 쇼라고는 하지만 이들 프로는 리얼하지도 않고, 여기저기서 연출 냄새까지 풍겨 신선하지도 않습니다. 예능의 귀재라는 나영석 PD가 발상의 대전환으로, 아이돌 대신 평균나이 76세의 꽃할배 (젊은노인) 들을 과감히 카메라 앞에 불러내 만든 작품이 <꽃보다 할배>입니다. 이게 먹힌 거지요. 누구나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한국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이 천방지축 4인의 배낭 여행기엔 따뜻하게 담겨있습니다.


노인들의 지옥에 웬 실버 붐?


<꽃보다 할배>의 시청율 대박이 이어지면서 느닷없이 노인들을 위한 실버 세대용 패키지 상품이 유통업계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유명호텔들은 앞 다퉈 각종 할인 프로그램과 함께 노인전용 첵인-아웃 서비스, 온돌방, 스파 룸 등 별도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7순 잔치용 ‘고희연 패키지’, 호텔투숙과 건강검진을 함께 할 수 있는 ‘VVIP 건강검진 패키지’도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일류 호텔 레스토랑은 10%에서 40% 까지 할인을 해주는 ‘실버요금’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꽃할배들의 세상이 온 것 같지만, 한국의 노인복지 시스템은 사실 OECD 국가 중 최악입니다. 미국에서 극빈층 노인들이 받는 소셜 시큐리티 기초노령 연금은 한국의 10배 쯤 되고, 의료비도 완전 공짜입니다. 노인 아파트에 살면서 낡은 차 굴리며 겨우 먹고 살 수는 있는 정도의 돈은 정부가 줍니다. 한국의 1인당 GDP가 미국의 절반 쯤 이라고 칠 때 한국 노인들의 기초노령 연금이 월 4~50만원은 돼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10만원 쯤 된다지요.
노인들은 이렇게 홀대하면서 신생아와 영유아, 초중고생들에 대한 무상보육, 무상급식, 무상의료, 기타 각종 지원금 보조는 해마다 늘리고 있습니다. 초중고생들에 대한 이른바 보편적 복지 혜택이라는 것은 미국엔 없습니다. 부잣집 아이들에게 주는 공짜보육, 공짜급식, 공짜의료 예산은 노인복지, 특히 쪽방촌에 사는 아프리카 수준의 독거노인 같은 극빈층 노인들을 위한 기초연금 확대 등에 전용해 써야지요.
한국엔 선진국엔 없는 ‘지공사’ 제도 라는 게 있습니다. 지공사는 ‘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의 줄임 말로, 노인들에게 지하철 요금을 받지 않는 제도입니다. 여기선 행정편의주의적인 위선의 냄새가 풍깁니다. 노인복지를 근본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정부와 정치권이, 지하철 공짜 표 한 장으로 노인들에게 가당찮은 생색을 내는 것 같아 언짢습니다. 노인들에게 먹고 살 만큼의 기초연금은 주되, 지하철은 제 돈 내고 타게 하는게 옳습니다.


김기춘의 인생-김능환의 인생


박근혜 정부의 새 대통령 비서실장에 74세의 김기춘이 임명됐습니다. 이순재의 배낭여행 팀에서라면 막내가 될 나이니까, ‘꽃할배의 화려한 부활’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평균수명 90세 시대에 능력만 있다면, 그 나이에도 고위공직을 맡아,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나쁠 것 없다는 긍정론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은 “이게 뭐야?”하며, 권력 쥔 사람들의 이 괴이한 감투 놀음을, 두더지 혼인잔치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즘 노인들은 과거 노인들에 비해 육체연령 10세, 정신연령은 20세 정도 젊습니다. 80세 넘어서도 일을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어 하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미국엔 월마트 같은 곳에서 파트 타임 일을 하며 용돈을 벌어 쓰는 7~80대 노인이 적지 않습니다. 힘이 들어서, 수입이 적어서, 혹은 전망 있는 정규직이 아니어서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이런 ‘틈새 잡‘을 노인 노동인력이 채워주는 것은, 노동시장의 건강성 유지를 위해서도 바람직합니다.
허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 평생 화려한 공직을 섭렵하다 은퇴한 74세의 원로가 다시 꿰차고 앉을 자리는 결코 아닙니다. 어느 때든 원로의 존재는 필요하지만, 그들이 직접 고위공직을 맡아 시대의 주역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시대정신은 변화와 개혁, 새로운 세상을 주도할 새 인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직을 제의 했을 때 정중히 사양하고, 원로로서, 마땅한 인물을 그 자리에 천거했어야 옳았습니다. 건강을 위해, 혹은 그럴 리는 없지만 생계를 위해 김기춘이 일자리가 꼭 필요했다면 ‘이 마트’ 같은 곳의 캐시어 직에 이력서를 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권력서열 6위인 중앙선관위원장을 역임한 김능환 전 대법관은 공직생활 33년을 마감하고 지금 상도동에 있는 부인의 채소가게에서 무 배추를 다듬고 있습니다. 연봉 수십억 짜리 로펌 고문변호사 자리도 마다하고, 동네 구멍가게 할배로, 남루하지만 떳떳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남는 것도 없는 장사를 한답시고 생고생 하며 ‘모닝‘인가 뭔가 하는 장난감 같은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그를, 며칠 전 내 교회 장로 한분이 만나고 왔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짠해‘ 긴 얘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졌다고, 김 대법관의 고교 동창인 장로님은 얘기하더군요. ’꽃 보다 할배‘ 대신 ’기춘할배 보다 능환할배‘라는 패러디 화두를 하나 만들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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