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증언> 영화 ‘마유미’ 미국 개봉 작업 동참 씨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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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북한 탈출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78년 6개월 간격으로 납북되었던 신상옥-최은희 부부. 그리고 6년만에 극적으로 북한을 탈출해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의 운명적 스토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자진 월북인가, 강제 피납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신상옥 감독은 생전에 LA동포 김상옥씨에게 ‘분명히 자신은 납북되었다’고 밝힌 증언 내용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1990년 KAL기 폭파사건을 주제로 제작한 영화 마유미의 미국 상영을 앞두고 영어대사 더빙작업에 참여했던 김 씨는 제작기간 동안 돈독한 관계를 가지며 납북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다음은 김상옥씨(37년생, 헌병전우회 부회장)가 만난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납북당시의 비화와 파란만장한 역경으로 점철된 두 사람의 인생여정을 정리해 보았다.
대담: 김상옥 / 취재: 심 온(취재부기자)












KAL기 폭파 사건이후 안기부에서는 이 사건을 영화 제작을 결정하고 신상옥 감독에게 맡겼다. 신 감독은 김현희를 서울 외곽지 모처에서 은밀히 수차례 만난 후 ‘마유미’ 영화제작을 끝마쳤다. 그 후 신 감독은 이 영화를 미국에서의 상영과 영어판 비디오 제작을 위해 톰 파커 감독과 함께 영어 대사 성우 더빙 재녹음을 끝내고 개봉하게 된다. 신감독과 파커 감독은 광고를 내고 성우를 모집했는데 김상옥씨는 50여명의 지원자 중에 경험과 목소리가 합당해 선발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안기부 직원은 물론 신 감독, 최은희씨 등이 항상 스튜디오에서 함께 더빙 녹음 작업을 지켜보고 격려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신 감독 부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처음 해보는 쉽지 않은 작업으로 모니터에 나타나는 배우의 입 모양을 살펴가며 처음과 끝 순간을 따라 하는 게 생각보다 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미국인 영어가 아닌 한국식 T 악센트가 가미된 영어를 사용해야 하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월북 아닌 납북’ 분명히 말해


김상옥씨는 공교롭게도 ‘상옥’ 이름이 같아 친밀감을 갖게 되었고 특히 납북 당시 예지몽을 꾼 이야기를 들려주자 신 감독 부부는 놀라면서도 기이한 인연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당시 신 감독은 LA의 HOLLYWOOD BL 6400에 영화 제작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자주 찾아가 많은 시간을 함께 했었다. 두 부부는 김씨의 예지몽과 같은 이름에 친밀감을 보이며 한 달여 작업 기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당시 신 감독은 김씨에게 “내 마지막 꿈은 미국에서 징기스칸을 만드는 것” 이라며 “이미 3-4편의 징기스칸이 제작되었지만 난 쿼바디스, 엘시드, 벤허 같은 명작을 만드는 것”이라며 “꼭 몽고 현지제작으로 대륙의 벌판을 말을 타고 달리는 징기스칸을 만들고 싶다”고 자주 말했었다. “세간에 자신이 자진해 북으로 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분명코 북에 의해 납북된 것이 진실이다”고 수차례 강조한 것을 분명 기억한다”고 김상옥씨는 말했다.



세간이 소문에 대해서는 정밀 심문을 CIA나 안기부에서 마쳤으며 만약 불투명한 부분이 있었다면 자신을 방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 감독은 “당시 약 80만 불 정도를 영화제작비로 수중에 있었는데 언론에 3백만 불을 훔쳐 탈북했다는 소문도 틀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외국에 나올 때면 곳곳의 은행지점에서 제작비를 인출해 사용하도록 해 거금은 소지할 수 없도록 했었다는 것이다.
또 미국에 와서도 6개월짜리 임시 여권과 비자를 주었으며, 임시영주권과 3년후 시민권까지 제공하고 정착생활에 큰 도움을 준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억울함은 확인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엘에이에 거주하면서 두 부부는 평생연금을 타고 시민권도 미 입국 3년 만에 받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부부는 카톨릭에 귀의해 혼례미사로 식을 가졌고 미국식 이름도 만들었다. LA에서는 초기에 웨스턴 인근 모텔에서 지내면서 ‘고향산천’ 옆에 사무실에서 작업을 했으며 나중에야 벨리에 정식 숙소를 마련하고 헐리우드 블러바드에 사무실도 준비했다. 당시에는 위협을 느껴서인지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은거 생활을 할 정도였으며 배우 남석훈씨마저도 만나길 꺼렸다고 전했다.
또 김씨는 계동 초등학교 동기인 이순재, 김동훈과 한때는 연극도 했다는 사실을 안 신 감독이 “내 최후 작품이 될 징기스칸 작업 때에도 꼭 동참해 달라는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태일 분신’ 영화추진 박정희 탄압


신상옥 감독은 1926년 10월 19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경성중학교와 일본의 도쿄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최인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후 1952년에 <악야 惡夜>로 감독 데뷔하였다. 1953년 인기 여배우 최은희와 결혼한 후, 함께 영화 활동을 하면서 한국 영화사의 신화가 되었다.
1961년 한국의 고전을 각색한 <성춘향>이 기록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었고, 심훈 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어 성공하기도 했는데, 후에 박정희에 의해 새마을운동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주요섭의 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는 일본과 베니스 영화제, 아카데미 영화제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1963년 안양 촬영소를 인수하여 1966년 한국 최대의 영화사였던 신필름을 세워 1970년까지 운영하였다. 70년대,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전태일의 일대기를 영화화하려다 박정희에 만류에도 응하지 않자 끝내 박정권은 영화제작 감찰권을 박탈시켜 버린다. 국내에서 영화 활동이 금지된 채 할 일없이 빚에 허덕이던 두 사람은 슬럼프에 빠지고 신 감독은 오수미라는 젊은 여배우와 관계를 지속하다가 76년 이혼까지 하게 된다.












1978년 1월 11일 합작영화 제작과 관련해 최은희는 홍콩에 거점을 둔 북한 대남 공작원 김규화, 이상희 등의 초청을 받고 홍콩에 도착하였다. 김규화는 당시 한국 모 영화사의 홍콩지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최은희는 이들의 초청이 단순히 합작영화 제작 때문으로 알고 있었다.
홍콩에 도착해 퓨라마 호텔에 투숙하고 있던 최은희는 한 밤중에 제작사 회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차를 타고 가다가 북한 공작원인 이상희의 의해 강제 납치된 뒤 북한 공작선 밑바닥 선실에 실려 납치 3일 후인 1월 13일 황해도 남포항에 도착한다. 항구에는 김정일과 대외연락부 부부장 임호군 등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은 계속되었다. 최은희의 전 남편 신상옥 감독이 1978년 1월 27일, 이상희(당시 52세, 최은희와 동갑)의 하수인으로부터 최은희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출국해 미국, 일본, 동남아시아 등을 오가며 행방을 수소문하던 끝에, 같은 해 7월 14일 홍콩에 입국했다가 5일 만인 19일 북한 공작원에 의해 강제 납북되어 남포항에 도착한 것이다. 나중에 이 사건의 주범 가운데 한 명인 김규화는 여권법 위반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반공법 위반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두 번 탈북시도 수용소 수감까지


신 감독은 집요한 세뇌공작과 환대에도 응하지 않고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평양 승호리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는데 이때 건강을 크게 해쳐 C형 간염에 감염된 후, 끝내 간염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설득에 실패한 북측은 어쩔 수 없이 최은희와 상봉시킨 후 함께 지내도록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영화제작에 나서게 만들었다.
이후 두 사람은 김정일의 융숭한 지원 아래 여러 편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들 영화는 북한의 대외 선전용이자 김일성 부자의 영도력을 미화, 찬양하고, 남한의 지도층을 중상 모략하는 내용들이었다. 신 감독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 총장을 맡으면서 <불가사리> <돌아오지 않는 밀사-이준열사 영화,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감독상> <소금,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연기상> 등 17편을 만들었다.



지난 8월 최은희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나와 6개월 차이로 신 감독도 납북됐으며 이혼 후 7년 만에 북한에서 다시 만났는데 눈물도 안 나고 당황스럽고 이상하기만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김정일이 파티 후 나와 신 감독을 자기 별장으로 보냈다. 그때 신 감독이 내 실종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고생하다가 납북된 사연을 듣고서야 그를 원망했던 마음이 봄 눈 녹듯 사라졌으며 다시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초 국민배우로 불리는 최은희는 1926년 생으로 신감독과는 동갑네기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42년, 14살 때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했고,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한 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로맨스 빠빠’ 등 2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1960년대~1970년대 최고 여배우다. 최은희는 이미 18세의 나이에 촬영감독과 한 차례 결혼했으며 반면 신 감독은 총각이었다. 이에 주변에서는 신인 감독이 선배 감독의 여자를 빼앗았다는 안 좋은 시선이 있었으며 급기야 최은희의 전 남편은 이들을 간통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혼 후 7년 만에 북에서 극적인 해후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세간의 구설에 올랐다. 당시 최은희는 사실혼 관계에 있던 전 남편과 헤어진 상태였다. 전 남편이 최은희와 고 신상옥 감독의 만남을 ‘불륜’으로 몰아간 것이다.
최은희는 “전 남편이 우리를 간통죄로 고소했다. 그 사람과 혼인신고를 한 것도 아닌데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고소한 것”이라며 “법정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결이 났다”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후 두 사람은 끊임없는 영화 제작과 활동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1954년 3월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로 연을 맺었다. 최은희는 “신 감독은 생활비도 잘 주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했지만 출연료를 못 받았다. 신 감독도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오직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간 사람이라 나도 거기에 감동해서 같이 움직인 것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중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의 인터콘티넨탈호텔에 묵고 있던 두 사람은 북한 공작원의 감시를 피해 미국 대사관에 은신을 요청함으로써 납북된 지 8년 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들이 미국 대사관으로 향하는 동안 일본 교토통신의 섭외부장이 동행하였으며, 북한 공작원들도 탈출을 막기 위해 추격전을 펼쳤다.

이들은 탈출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정치·사회·문화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납북사건에 이어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또 그 이전에도 3회에 걸쳐 탈출을 기획하였으나 실패했다고 밝히는 등 이들의 피랍과 탈출에 얽힌 극적인 과정이 한동안 화젯거리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탈출 후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국과 한국에서 영화제작에 몰두했다. 할리우드에서〈쓰리 닌자〉시리즈물로 다시 흥행에 성공하고 <마유미, 1990>, <증발, 1994> 등의 영화를 제작하였다. 북한 영화를 세계무대에 올리는데 기여했고, 최초의 미국 헐리우드에 한류 바람을 일으킨 감독이기도 하다. 남과 북, 그리고 할리우드에서까지 흥행신화를 이뤄낸 신상옥, 그는 영화인이기에 앞서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통찰력과 작가적 상상력, 시대적 소명의식을 지는 전인적 예술가였다. 영화감독, 제작자, 문화예술산업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보여준 도전과 열정의 삶이 영화사에 길이 남아있다.


마지만 꿈은 징기스칸 영화 제작














▲ 당시 LA Cienega와 12가 영화 전문 Sound Studio에서 녹음하던 모습. 조정실에 영화감독 톰, 신감독, 최은희 씨가 녹음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필자가 직접 그린 당시 녹음 스튜디오 광경)

그 동안 신상옥 감독은 단독으로 혹은 최은희와 함께 몇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으나, 그 대부분이 납북과정이나 북한에서의 생활, 북한체제 고발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출판물들이었고, 작고 후에야 비로소 그의 영화인생이 자서전 (2007)를 통해 발표되었다.
하지만 그는 1978년 납북 이전까지 간간히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자신의 영화관이나 회고담, 영화기법과 영화배우에 관한 글, 정부의 문화 및 영화 정책에 관한 칼럼, 수필 등을 발표했었다.
그의 영화작업과 관련한 유품으로는 시나리오 13편, 영화포스터 41점, 홍보인쇄물 3점, 실현되지 못한 영화 〈징기스칸〉의 시놉시스 및 스케치 이미지 5점, 그 밖에 신필림의 광고 이미지 4점과 안양영화촬영소의 사진 1점, 그가 남긴 유화 1점, 편지 2점, 영화제 참가 및 수상기록 이미지 5점, 조형물 2점, 기념사업 관련 포스터 2점 등 다양한 자료 이미지 90컷을 통해 신상옥의 생전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최은희, 신상옥은 미국에 체류하다 2000년 한국에 돌아왔다. 1994년에는 칸영화제 심사위원, 2003년에는 안양 신필름예술센터 이사장을 지내다가, 2006년 4월 1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총 250여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금관문화훈장과 한국영화인복지재단 선정 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 된바 있다.
신상옥 감독은 생전에 미국에서 징기스칸 영화를 제작하려는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불운의  영화인으로의 생을 마감했다.
김상옥씨는 신상옥 감독과의 인연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설왕설래하고 있으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은 자진월북이 아니라 분명히 북한 공작원에 의한 납북이다’라고 말하며 ‘신감독은 한국. 북한, 미국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인 영화인’이라며 지금도 못내 고인과의 애틋한 1개월여 동안 함께 했던 작업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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