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1주년 기념 특별인터뷰> 새크라멘토 유니온지의 영원한 탐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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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3년은 미국 사법사상  아시아 소수민족 인권운동의 대표적 상징인 ‘이철수 사건’에서 주인공 이철수씨가 사형수에서 자유의 몸이 된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UCLA대학에서 이를 기념해  ‘이경원센터’(K.W.Lee Leadership Center이사장 김도형) 와의 공동후원으로 오는 12월 7일에 ‘이철수 사건’을 조명하는 특별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는 주인공 이철수씨를 포함해, 신문기사로 사형수를 무죄로 만든 이경원 원로기자 등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이철수 사건’은 1973년 샌프란시스코 에서 이철수라는 젊은이 (당시 20세)가  자신이 관련하지 않았던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에서 용의자로 잡혀 잘못된 재판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다시 옥중에서 백인갱 두목과의  정당방위 살인 사건으로 연루되어 끝내 사형수가 된 기막힌 사건이다. 어쩌면 역사 속에서 사형수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이철수씨는 당시 미국신문에서 탐사 기자로 활동하는 이경원 기자를 만나면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인생을 맞게되었다. 이경원 기자 는 ‘이철수 사건’과 관련해 최초로 ‘이씨는 잘못된 재판을 받고 사형수가 됐다’라는 기사를 필두로 무려 120개의 기사를 써서 이철수씨가 사형수에서 무죄로 만드는데 횃불을 당긴 장본인이다. 본보는 현재 캘리포니아 수도 새크라멘토 자택에서 거주하며 집필 활동에 여념이 없는 이경원 원로기자를 방문해 특별인터뷰를 가졌다.    성 진 (취재부 기자)

문) 처음 ‘이철수 사건’을 어떻게 취재하게 되었는가. 
이경원: 1977년 말 새크라멘토토 데이비스에 거주하는 정신심리학 박사인 루크 김 박사 자택에서 한인들이 가끔 모이곤 하는데 그자리에서 SF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한국인 3세인 톰 김씨를 만났다. 그 사람이 다가와 “이철수씨 사건만 생각하면 죄책감이 든다”면서 “억울하게 감옥에 갔다” 면서 이씨를 위해 구명운동을 하지 못했던 점을 못내 안타까워했다. 톰 김씨는 나에게 “이 사건을 파헤처 보라”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나는 도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저 사람들이 저렇게 안타까워 하나를 생각하게 됐다.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알아 보기 시작했다. 그 중 일본인 사회봉사가인 제프 모리씨와 연결이 됐는데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철수 사건에 후회를 한다”고 말해주었다. 한국인 사건에 일본계들도 후회를 하고 있다는 말에 진짜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철수라는 사람이 한국인이고 얼토당토않은 살인범 누명을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는 이런 황당한 현실을 나부터도 몰랐다는데 문제였다.



당시 한인들도 얼마나 무관심 했는지… 한인들은 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고 대부분 나 몰라라 했다. ‘이철수 사건’을 알고 나서 나도 물론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가 명색이 기자아닌가. 한인들은 감방에 들어간 범죄자들에게 냉담하기 그지없어요. 한인들은 보수적 인 유교적 사고방식에 쩔어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감방에 가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논리에 젖어 있어요. 하지만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논리였다. 미국에 와서 남부에서 기자생활을 하면서 흑인 들의 삶에 대해 많은 글을 쓴 저에게는 그런 말의 함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나서지 않고 모른척 한다면 누가 우리를 도와 줄 것인가.우리가 서로 뭉쳐서 서로를 도와야 하는거요. 나마저 이철수씨를 외면한다면 누구하나 봐주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난, 정말 거짓말 안하고 거울 앞에 선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며 울었다. “이제 내 때가 왔구나. 평생동안 우려곡절을 겪으면서 남부 흑인들의 삶에 대해 써왔던 내가 이제는 내 자식같은 이철수에 대해 글을 쓰게 되는구나”라고 다짐했다.













 ▲ 이경원 원로기자가 「이철수사건」 기사철을 보고있다.
문) 사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했는데 이 기자는 새크라멘토에 있는 기자 아닌가. 애로사항이 있었을터인데…
이경원: 왜 아닌가.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주류언론이 두개나 있었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멀리 떨어진 새크라멘토에 있는 신문기자였다. 그 때가 ‘이철수사건’이 발생하고 재판이 끝난지 4년이 지난 사건이고 그것도 샌프란시스코 에서 일어난 일이라 내가 근무하고 있는 새크라멘토 유니언 지에서는 처음에 아예 취재를 하지 못하게 했다. 판사나 배심원들이 이미 유죄선고를 내린 사건 이라 다시 취재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케이스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신문사 사회부장은 ‘이사건에 대한 취재는 금물’  ‘일손도 모자라는데 자네는 우리 신문사의 유일한 탐사보도기자’ 라며 딴 생각 말라고 했다. 그당시 나는 이미 많은 보도기자상을 받아 어느정도 명성을 얻고 있을때였다. 나는 조건을 내 걸었다.  정규 근무시간에는 이철수 사건을 취재하지 않겠지만 내 근무시간 이외는 간섭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히 예비조사와 함께 정보와 자료들을 수집하는데 힘을 썼다. ‘이철수 사건’의 처음 사건인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에 초점을 두고 조사를 하고 있는데, 두번째 ‘옥중살인사건’이 터저 나오는 바람에 놀랐다.


문) 당시 이 기자가 속한 새크라멘토 유니언 신문사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계 신문인데 어떻게 해서 소수민족 사건 기사가 톱으로 그것도 시리즈로 보도할 수가 있었나.
이경원: 새크라멘토에는 진보적인 새크라멘토 비(Sacramento Bee)와 보수계인 새크라멘토 유니언 (Sacramento Union) 이있었다. 60-70년대 무렵 민권운동이 시작되면서 사회정세가 변하고 시민들 도 민주당쪽으로 기울고 우리 신문사도 이런 흐름을 타고 나를 특별히 탐사보도 전문기자로 영입 하여 경쟁 신문사와 경쟁을 시도했다. 나는 연방 및 주정부와 사회 각분야의 부조리를 취재 하여 폭로 하게 되었다. 사회부장도 나의 폭로기사에 대해 신임을 하며 신뢰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연방정부 나 주정부 관리들의 비행을 폭로할터이니,  그대신 소수민족 인권문제도 폭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새크라멘토 유니언 신문 창간 이래 처음으로 소수민족에 관한 기사도 등장하게 됐다.



그 와중에 ‘이철수 사건’이 터진 것이다. 1977년 북가주 트레이시(Tracy)에 있는 DVI교도소에 있는 이철수씨를 처음으로 두번 옥중 인터뷰를 했다. 처음에는 외부 사람을 꺼리던 이철수씨도 차츰 마음을 열어 나갔다. 내가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에 대해 말해주게’라고 했더니, 이철수씨는 “ 선생님, 억울합니다. 저는 재판을 잘못 받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래서 첫번 수사 기록부터 다시 살펴야 했다. 기사를 쓰려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써야 하는데 그 놈의 선입견 때문에 글 쓰기가 힘든 적인 한 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이철수 사건’을 쓸때는 내가 같은 인종이라 ‘보아라, 여기 증거가 있다’ 라고 할 정도로 철저하게 취재하고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써내려 갔다.
문) 이철수 사건은 취재하면서 느낀 점은.
이경원: 한인들의 문제를 논하자면  70년대 당시 내가 평생 미국에 살면서 깨달은 건 백년이나 되는 한인 이민사에서 한국인이라는 실체는 미국에 없다는 거였다. 도대체 이 미국 땅에서 누가 한인에게 관심을 주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한마디로 ‘이철수 사건’ 때문에 벌떡 잠에서 깨어난거요. 내가 이철수씨에게 누누히 한국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잃지 말라고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이 사건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한인동포 전체에게 일침을 가한 사건이다. 이철수씨 한사람을 위해 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또 이 미국 땅에서 우리 한국인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만약 한인들이 한인이 당한 일에 내 몰라라 하고, 특히 이철수씨와 같이 힘없는 사람이 아프다소리 한마디 못하고 계속 당하는 일이 쌓이면 도대체 한인 동포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힘없는 인간, 빽없는 인간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런 민족이 아닌가.’이철수 사건’이 남긴 것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이기심없는 도와주려는 것 그것도 여러 사람들이 사심없이 한 마음이 되어 뭉처서 도와 주었다는 것이다. 아무 욕심이 없이 도와주는 것이었다. 중국인이든,일본인이든, 백인이건, 인디언이건 이철수라는 이름 아래 정말로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결집했어요. 가장 겸손하고, 가장 고상하고 가장 숭고한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날 감동 시켰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기사로 적은 것이다.


문) 기자로서의 사명감이나 언론관은 무엇인가.
이경원: 신문 기사를 쓸 때 자신의 주관이나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자는 기사에서 문장의 기술보다는 독자들에게 사건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써야 한다고 본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 기술도 좋아야 하고 문장력도 필요하다. 본질적으로 신문기자는 저널리스트에서 스페셜리스트로 진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요즈음은 TV등 디지털화 시대이기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문의 사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미국주류사회에서는 이경원 원로기자를  ‘K.W. Lee’로 불린다. 미국인들이 “경원” (Kyungwon Lee) 라는 이름을 발음하는데 힘들어 자신의 이니셜로 만들었다. 그는 오직 신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에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다. 당시 고려대 전문학부 영문과 3학년을 수료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웨스트버지니아 대학에서 저널리즘으로 학부를,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에서 저널리즘 석사학위를 마쳤다. 대학원 시절에 교내에서 ‘Korean Messenger’라는 영자신문을 제작해 미주한인사회에 배포해 유학생 사회는 물론 주류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6.25 전쟁시절에는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에서 홍보 담당 인턴으로 미국 언론에서 쏟아내는 한국 전쟁 관련 기사들을 정리하기도 해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로부터도 관심도 받았다. 그러나 후에 “이승만 정권은 독재정권”이라는 기사를 미주류 언론에 보도해 괘씸죄로 여권을 박탈 당했으나, 전화위복으로 미국 신문사에 입사해 영주권을 받게 됐다.
그는 1956년 미 주류 신문인 테네시주 킹스포트 타임스에 일선 기자가 되었다. 아시안으로서는 최초의 미국 일간지 신문기자가 된 것이다. 2년 후에는 찰스턴 가젯지로 스카우트된 후에 빈민 들의 빈곤문제와 흑인 민권운동 분야를 중점적으로 취재해 이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다.
특히 1967년 당시 웨스트버지니아 선거 매표 등 부정사건을 집중 취재 보도해 FBI까지 개입해 결국 미국 각주의 선거법을 개정하도록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 기간 중 목숨을 위협 받은 회수도 많았다. 또한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탄광 실태를 보도하면서 광산주와 노조간의 불법야합으로 광부들이 착취 당하는 실태를 고발했으며, 이 지역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영세민들의 버려진 삶을 보도해 “인권기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1970년대 초 캘리포니아 주수도인 새크라멘토 유니언 지에서 탐사보도기자로 영입되면서 그의 명성은 주류언론에 크게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1974년 ‘골든 돔’(캘리포니아 주의사당 건물을 상징)이란 시리즈 기사를 통해 주상하원 의원들의 연금 비리와 부조리를 파헤처 결국 연금법을 개정하도록 만들었다. 그후에는 캘리포니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인 ‘렌초 세코’가 위험을 내포한 발전소라는 사실을 폭로해 결국 발전소가 폐기되고 자연농원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새크라멘토 유니언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1973년 당시 살인용의자로 체포돼 사형을 기다리던 한인 이철수 씨와 그의 사건을 심층 취재하면서 그의 무죄석방을 이끌어내는데 계기를 만든 것이다. 그의 기사는  전국적으로 이철수 구명 운동을 일으켰다. 이 기사는 결국 7년 동안의 법정투쟁 끝에 이철수가 무죄로 석방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 미국 최초의 전국의 한인대상 영문판 주간지 코리아타운(Korea Town Weekly)을 발간 (1979~84년)했고 1990년에 미주한국일보의 코리아 타임스 LA 영문판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1992년 4월 LA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UCLA병원에서 간이식 수술을 받으려고 생명이 오락가락할때도 텔레비젼을 통해 방송되는 한인들의 수난을 보며 영문판 신문 기자들에게 취재 지시를 내리는 등 언론인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는 폭동 당시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해 폭동의 배경을 한흑 갈등으로 몰아가려는 미 주류 언론들의 왜곡된 보도에 맞서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섰다. 특히 한인사회가 엄청난 피해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쓴 ‘울어라 코리아타운이여’(Cry! KoreaTown)란 사설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미국언론에서 50년간 현역기자로 활동하면서 퓨릿처 상 후보 등을 포함해 언론관계 수상 만도 40여개에 이른다. 만약 그가 백인이었다면 당연히 퓨리처 상을 수상했을 것이다. 그는 지난해 처음 저널리즘을 전공했던 모교 웨스트 버지니아대 (WVU)로부터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정됐다.
그는 미국에서 “기자 중의 기자” “언론계의 형사 콜롬보” “아시안 언론대학의 총장”이란 별칭을 지녀왔다. 또한 동료기자들로부터는 “기인”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이경원 원로기자는 1974년부터 UCLA를 포함해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언론학 특강을 해오고 있으며 후배 양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한미 기자협회’(KAJA)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아시안 언론인들의 연합체 ‘아시안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도 설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처럼 정의와 진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의 노력은 주류 언론에서도 인정을 받아 워싱턴DC  언론 기념관 ‘Newseum’에 세상을 변화시킨  20세기 가장 탁월한 언론인 500인에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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