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원 원로기자의 수기 2> ‘이철수를 사형수로 만든 사건’편

이 뉴스를 공유하기







1978년 1월 29일과 30일자 새크라멘토 유니온지에는 ‘알리스 인 차이나타운’(Alice in Chinatown)이란 제목의 기사가 특종으로 보도됐다. 당시 유니온지의 한국계 탐사보도기자인 이경원(K.W. Lee, Investigation Reporter)원로기자가 쓴 장문의 기사였다.  한국인 25세의 젊은 종신형 복역수가  또 다른 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을지도 모른다며 애초 종신형 재판에 많은 의문점이 있으며 잘못된 판결이라고 구체적 사항을 지적해 폭로한 것이다. 이 기사는 전국적으로 크나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인 신문들도 이 기사를 번역해 게재했다. 당시 한인사회는 이철수라는 청년이 1973년 6월 3일 발생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미국신문에서 보도하자 ‘창피하다’는 분위기로 애써 이 사건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그런데 미주류신문에서 1급 살인자로 복역중인 한국인 이철수씨가 재판과정에서 충분히 자신의 결백을 드러내 주장할 기회나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그를 살인죄로 평결함에 이유가 불분명할뿐 아니라 물적 증거조차 없다고  보도하자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이경원 기자의 특종기사를 소개한다.
정리: 성진 (취재부 기자)

지금도  캘리포니아주에서 가장 위험한 죄수들만을 가두어 둔 트레이시 소재 ‘듀엘 교도소’(Duel Vocational Institution)에서 종신형 선고로 복역 중인 25세의 한국인 젊은 청년이 또 다른 사건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질지도 모르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복역수인 한국인 청년 이철수씨는 지난해(1977년) 10월 8일 교도소내 백인 수감자를 찔러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데 이는 『특수 환경속에서 범한 1급 살인죄』로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 당시로서는 극형을 면하기가 어렵다.
검찰 측은 1977년 개정된 형법을 적용, 이미 1급 살인죄를 범한 자가 다시 1급 살인죄를 범할 경우 사형에 해당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10월의  ‘옥중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철수씨는  이미 1973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의 길거리에서 중국 갱의 고문격인  입이택 (당시 32세)을 죽인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아  종신형을 복역 중이었다. 이른바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이었다.



이씨의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케이스는 발생1년 후인1974년에 케이스가 새크라멘트 법원으로 이관되었으며 그해 6월3일 새크라멘토 법정의 배심원들은 이철수씨에게 유죄를 평결했다. 선고 는 종신형이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사법제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철수씨는 재판과정에서 관선 변호인으로부터 충분한 변호를 받았으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1급 살인죄의 판결이 내려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이야 말로  앞으로 스탁튼 시에 소재한  샌호킨 카운티 법정에서의  ‘옥중살인사건’ 재판에서도 비슷한 장막을 드리우는 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본 기자는 지난 6개월 동안 이철수 씨의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을 취재한 결과 그의 운명을 결정 지은 재판과정에서 문제투성이가 많았다는  의문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이철수 씨의 지나온 삶의 자취를 찾기 위해 본기자는 그와 관련된 수 십 명의 친구들, 사건 관련자들, 샌프란시스코의 중국ㆍ일본계 사람들과 한국 커뮤니티의  관련 소식통들을  모두 뒤졌다. 또한 그의 과거 소년원 생활 기록, 사회봉사 단체의 기록들을 자세히 검토했으며, 무엇보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재판 기록을 면밀히 조사했다.
한편 트레이시의  듀엘 교도소에 수감중인 이철수씨와 인터뷰도 수차례 했으며, 서신 왕래를 통해 그의 지난 이야기도 들었다. 이철수씨의 어머니와 누이동생도 인터뷰를 했다.













 ▲ 이경원기자(왼편)가 이철수씨를 옥중 인터뷰 하고 있다.
검찰,  이철수 진범만들기 조작


이철수씨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했던 당시의 새크라멘트 법정 배심원단은 이씨를  중국 갱단 두목격인  입이택을 청부살인한 장본인으로 믿었다. 이씨를 이같이 단정한 배경에는 백인3명의  현장 목격자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 목격자들은 일요일 한 때를 차이나타운에 즐기러 나온 백인 관광객들이었으며 그들이 범인을 목격한 것은 그야말로 몇 초 정도로 순간에 불과했다.  그리고 재판기록 검토에서 나타난 중요한 것은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재판 과정에서 이철수씨의 유죄를 결정할 아무런 물적증거(Material Evidence)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재판에서 이철수씨는 줄곧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왔지만, 그의 목메인 호소는 아무 곳에도 메아리 치지 못한 채 무산되어 버리곤 했다.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을 조사한 결과 이철수씨는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풀리지 않은 채 유죄판결을 받았음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피고인로서 이철수씨는 자신의 결백을 변호할  수 있는 적절한 기회를 박탈당했다. 왜냐하면  당시 이철수씨의 관선 변호인은 이씨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증거가 되는 알리 바이를 입증했어야  했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이 사건 발생 후 10개월이 지난 다음 새크라멘토 법정으로 사건이 이송되고, 개인 변호사가 법원의 지정을 받아 이 사건을 담당할 때 까지 그 첫번째 관산변호인은 사건 당시 이씨와 함께 있었다는  한 여성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개월이 지나 이 사건이 새크라멘토 법원에서 재판 을 시작할 때는 그 문제의 여성은 종적을 감추어 버린뒤였다.
재판 과정의 증언 기록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경찰의 범인 확인과정 (Identification Process)에서도 이철수씨에게 불리하게  진행됐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목격자들의 범인 확인 증언이야 말로 당시 재판의 가장 중심 이슈이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이 경우에 있어 『동양 사람은 다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백인 들의 생각을 고려하여  이철수씨를  용의자로 겨냥했을  때 상당한 의심과 주의를 했어야 했다.



더구나 당시 이철수씨는 사건 전이나, 사건 당시, 또는 사건 후에  그가 취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청부살인자들이 하는 행동, 즉 교묘하게 자신을 은폐하는 따위의 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씨는 이와는  정반대의 행동과 몸가짐을 취했던 것이다.
당시 재판에서 검찰 측이 제시한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이철수씨가 차이나타운의 갱조직의 충실한 하수인으로서 돈을 받으면 앞장서서 일을 치룬다고 했는데, 이는 아시안 커뮤니티에 대한  상식 이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주장이었다.
당시 재판기록에 나타난 이철수씨의 행적을 사건 당일인 1973년 6월3일을 전후하여 살펴보자,
1973년 6월 2일(살인사건 전날)에 이철수씨는 차이나타운에 가까이 있는 그의 숙소인 ‘브로드웨이 호텔’의 한 작은 방에서  권총 오발사고를 일으켰다. 그가 만지던 총은 구경  38 권총이었다. 그날 경찰이 와서 이철수와  잠깐 대화를 하고, 옆 빌딩의 벽에서 38구경용 총알을 수거했다.
다음날 (6월 3일) 하오 7시 30분께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한 젊은 동양계 범인이  갱단 두목격인 입이택을 향해 3발의 총을 쏘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목격자에 따르면 범인은 콧수염에 머리를 길게 기른 자이며 금색의 자켓을 입고 있었다. 후에 38구경의 스미스 웨슨 권총이 인근 골목에서 발견 되었으며, 총격에 사용된  무기로 판명되었다.


알리바이 증인 실종 재판강행













 ▲ 이경원 기자의 특종기사는 미 전국적으로 이철수 구명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사건 당일 경찰은 5명의 목격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2명은 해군사병이고 3명은 콜로라도에서 온 스키 선수들이었다. 이들 목격자들은 사건 당일 밤 경찰서에서 경찰이 비치하고 있는 동양계 용의자들의 사진 앨범 ‘머그 북’(Mug book)을 들춰 보았다. 이들은 머그 앨범에서 사건 용의자와 비슷한 인물사진 5장을 가려냈다.
콜로라도에서 온 스키 선수인  데이브 레논과 앤디 밀은 머그 사진첩에서 이철수씨를 지목했다. 해군사병 존 휴에이는 이철수씨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사진을 지목했다. 이들 3명의 목격자들은 나중 검찰의 증인으로 나섰다. 당시 경찰이 갖고 있던 이철수씨의 사진은  사건 당시보다 4년전인 16세 때 모습이었다.
이철수씨는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당일 호텔 숙소에서 그의 여자 친구인 카산드라 오왕과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 그 호텔에 숙박객인 멕시코계인지 필리핀계인지 분간이 안되지만 한 노인 숙박객이 복도에 있는  전화를 받아 이철수의 방문을 노크하고 전화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당시 호텔에는 방마다 전화가 없고 복도에 공동 전화가 있었다.)
한편 이씨에게 전화를 알려주었던  노인은 그 후 곧바로 죽었다. 이철수씨에 의하면 그날 밤 그는 여자친구 오왕을 데려와 자기 방에서 같이 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씨는 다음날인 6월4일, 자신의 총기 오발사고를 보고하기 위해 그의 프로베이션 오피서(집행유예 담당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이씨는 여자친구와 다음 날인 5일까지 같이 숙소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총기오발사고 탄창이 화근


이철수씨가 5일 숙소인 호텔을 나온 것은 그가 여자 친구와 두번이나 크게 싸운 뒤였다. 첫번째 말다툼이 끝나고 두번째 말다툼이 벌어지자 호텔 여주인이 ‘경찰을 불렀으니 곧 올 것’이라고 이씨에게 소리치는 바람에 거의 쫒겨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주인은 사실상 경찰을 부르지는 않았다.
법정에서 이철수씨는 그가 숙소에서 도망친  이유에 대해 경찰이 오면 자기 총을 발견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오발사고가 난 날에는 경찰이 이씨의 방을 뒤지지는 않았다. 그는 방에 권총집과 탄창은 놔두었다.
이철수씨는 그 후 5일부터 7일까지 친구(Joan Hu) 집에서 지냈으며 7일에 자신의 짐을 챙기려 전의 숙소인 ‘브로드웨이 호텔’로 갔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는 38 구경 권총을 지니고 있었으며 탄알 41발도 가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