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참상-군의관들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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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저지른 소위 ‘위안부’ 만행을 비롯한 비 인륜적 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날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는데도 일본 정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 그러나 일본 내에도 양심적인 목소리가 있다. 지난 2011년에 일본 신조사에서 발간된 ‘반딧불의 항적’(‘호따루노 쿠세키’, Hotaru no Kouseki)이란 책에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면서, 당시 위안부들의 참상을 일본 군의관들의 눈으로 그려내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의 편자인 하하기끼 호세이씨는 2차 대전에 종군한 15명의 일본 군의관들의 고백적인 목소리를 담아 ‘군의관들의 묵시록’이란 부제를 달았다. 이 책의 369페이지에서 약 10페이지 정도는 “순회위안소”라는 제목으로 버마 전선에 버려진 ‘위안부’들의 참상을 그려내고 있다. 1944년 9월 버마 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제 55사단에서 일어난 실화이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순회위안소”는 제국주의 일본군 사령부가 장병들을 위해 위안부들을 수용했던 임시막사다.
일본의 패망이 서서히 감돌기 시작한 1944년 9월 버마(현재 미얀마) 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제 55사단의 4천 여명의 군인들은 그해 3월부터 버마 남부 전선에서 퇴각을 시작해 9월에는 이리와리 데루따까지 후퇴해 있었다.



연합군의 공습과 정글에서의 천연두 발병은 일본군에게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날이었다. 이리와리 데루따라는 곳에 주둔한 55사단은 이 때 군사령부로부터 ‘10일간 순회위안소를 설치한다’며 ‘5명의 위안부를 보낸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같은 명령을 받은 55사단 군의관들은 난감했다. ‘어떻게 5명의 위안부가 4천명이나 되는 사단 군인들을 상대할 수 있는가’라며 망연자실 했다. 상부에서는 ‘그대로 실시하라’라는 명령이 떨어 졌다. 다시 군의관들이 ‘위안부가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대부분 군의관들은 이같은 상항을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부족한 콘돔 물로 씻어 재사용


한 군의관은 ‘10일 동안에 4천명 군인을 5명의 위안부가 상대하려면 하루에 80명을 상대해야 하는 계산인데 말이 안된다’며 ‘살아남을 여자가 없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또 다른 한 군의관도 ‘너무나 잔혹한 처사이다’라며 ‘군인 한 명당 평균 18분 동안 상대할 경우 위안부 한 명이 24시간 동안 밥도 먹지 말고 잠도 자지 않아야 한다’면서 반발했다.
이에 다시 회의가 진행됐다. 여기서 나온 의견은 4천명 부대원 중에서 부상병이나 허약체질 병사 들을 제외시키고 2천 여명을 상대시키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면서 10일간 위안소 설치를  하루 연장해 11일 간으로 위안소 설치를 변경한 것이 고작이었다.



한 군의관의 일지에는 이런 기록도 적혀 있었다. 위안소 설치 시간표에 일반 장병은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하사관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그리고 장교는 오후 8시 이후로 정해졌다. 가장 인원이 많은 일반 장병들을 아침부터 오후까지 입장시키고, 그 다음 하사관을 마지막으로 장교 들을 순번으로 정했다. 위안소가 설치되자 군의관들은 장병들을 위한 예방교육을 실시했다. 무엇보다 성병에 대한 주의 사항을 강조하면서 콘돔 사용법도 실시했다. 한 군의관은 예방 교육을 하면서 장병들에게 ‘콘돔에 이상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담배 연기를 주입시켜 보라’고 했다.
하지만 부대에는 콘돔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군의관의 일지에는 ‘콘돔이 모자라 다른 군인들이 사용한 것을 씻어서 다시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적었다.
‘위안소’가 설치되자, 막사 앞에는 군인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손에 군표를 든 군인들이 늘어선 모습을  한 군의관의 일기에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전쟁터에서 마치 벌꿀에 달라 드는 일개미처럼 군인들이 순회막사 앞에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국 전선은 지옥과 흡사














또한 검사를 위해 막사 안에 들어갔던 한 불교신자 군의관은 잠깐 한 순간에 반나의 여인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전쟁터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 있는 남성들의 번뇌를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닐까. 이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 아닐까’
이 군의관의 눈에는 위안부의 모습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군인들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위로를 하는 해탈의 경지로 보여 졌다는 것이다.
군의관들의 고백을 실은 ‘반딧불의 항적’에는 전쟁터에서 보여 지는 인간들의 살육전을 체험한 15명의 군의관들이 토해낸 전쟁의 무정함을 잘 그려내었다. 해군 함정에서 근무한 한 군의관은 ‘침몰하는 함정의 한 칸 방에서 환자를 수술하면서 새삼 무력함을 느꼈다’면서 ‘고국에서는 이런 우리들의 심정을 알기나 하는지’ 라면서 독백을 했다.
이 군의관들의 독백을 실은 이 책의 편자는 ‘이국 땅 전선에서 군의관들은 지옥을 봤다’면서 ‘야자수 숲에 꺼져가는 생명들을 보면서 전쟁의 상처를 아파했다’고 적었다.  









코리아타운에 살고 있는 최자애 할머니는 70여년 전 일제강압시기의 초등학교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루는 교실에서 담임선생이 ‘집에 언니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라’고 하자, 두 서너명 학생이 손을 들었다. 손을 들었던 한 학생은 그날 집에서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자 부모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
실지로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담임선생과 면서기가 ‘언니가 있다’라고 한 학생 집에 찾아가  언니를 찾아 어디론가 보냈는데 그 것이 나중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것을 한참 후에나 알게 됐다.
이같은 일은 비단 최 할머니가 살았던 고장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일제강압시절 한반도 곳곳에서 일어났던 비극의 역사이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달라


최 할머니는 아직도 초등학교 시절에 불렀던 ‘애국행진곡’을 기억하고 있다. 그 행진곡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보라 동해의 여명에/태양이 높게 빛난다,
천지의 정기가 발랄하고/희망은 *대팔주에 춤울 춘다>
이를 두고 최 할머니는 “그 당시 일본은 우리의 동해를  인정했는데, 지금은 이를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면서 “위안부 존재도 인정을 안하는 일본 정부는 미친 것”이라고 항변했다.
‘위안부’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에서는 일본군 성노예(Japanese Army Sex Slaves)라고 표현했다. 정신대로 징집된 여성들 일부가 전쟁말기에 위안부로 뽑혀나갔으나, 정신대와 위안부는 다르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뉴스에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만 소개되어서 한국에만 있다고 아는 경우도 많은데, 이 문제는 세계적인 문제이다. 미국인,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 여성들도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발견되었으니 결론은 일본이 건드린 나라의 여성들은 대부분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보면 된다. 즉슨 인종과 민족을 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일본의 당시 만행은 근대 전쟁사의 심각한 인권 유린 사례 중 하나이다. 다른 나라의 강간이나 성노예 사례 등은 최소한 전쟁 지도부의 윤리관에는 반하며, 군법으로도 금지된 행위 들인 반면에 일본에서는 지도부에 의해 권장된 제도이기 때문이다.
근대 들어서 많은 군대가 현지 윤락 업소와의 협력 체제를 통해 위안소를 운영해 온 것은 사실이나, 일본은 그것도 모자라 사실상 유일하게 군 당국에서 위안부를 본국 및 그 식민지 또는 점령지에서 직접 조달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영내 또는 주둔지로부터 도보로 이동 가능한 가까운 구역에 설치 된 위안소에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로, 혹은 속여서 끌고 가 병사들을 상대로 강제적인 성노리개로 삼았는데, 이를 자기들 용어로는 ‘위안부’라고 불렀다. 위안부란 말도 실제로는 완곡어법에 불과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성노예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중 대다수, 적어도 상당수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 로 납치당했거나 혹은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속아서 지원한 뒤 태평양 섬 등지의 외딴 곳에 성노예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강제 연행된 ‘위안부’


강제연행 및 사기를 통한 인신매매 사실은 모두 확인되며, 비율상으로는 일단 사기가 더 많다. 여기에 처음부터 위안부로 갈 것임을 명시하고 모집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는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모집한 일본인 윤락녀였다. 그 외의 식민지 및 점령지에서의 모집은 양상이 매우 복잡 한데, 처음부터 직업 윤락녀를 대상으로 모집하는 경우에도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밝히지 않은 사례도 제법 있고, 윤락녀를 모집한다는 것 자체를 숨긴 사례도 많다.
또한 당시 사창이 합법이었던 일본의 체제상 윤락녀 모집에는 민간인 매춘업자가 개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정부 책임을 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본 정권의 주류이긴 하다. 그러나 증거를 살펴보면 모집 과정에서 정부기관 및 군 당국의 직접적인 협력이 노출된 사례가 상당히 많고, 군이나 정부기관이 직접 민간인을 납치 또는 강제 징용한 경우도 적지 않다.
당시 피해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구타, 가해는 일상다반사로, 군도나 칼 등으로 몸을 긋거나 담뱃불로 지지는 등 가히 고문, 학대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수십 명의 남자들을 상대하기에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 후 강제로 중절수술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는 경우도 많았으며, 배식량은 막장 일본군의 수준에 맞게 극도로 떨어져서 영양실조도 많았던 듯하다.
게다가 그런 납치나 성적 학대로 끝난 것도 아니어서, 심지어는 해당 지역의 일본군이 항복을 거부 하고 자폭할 때 ‘일본군의 비밀 누설 방지’ 혹은 ‘황군의 망신거리를 살려두면 안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같이 죽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이를 옥쇄 정책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 군대는 유사 상황이 적발될 경우 전시 성범죄로 강력 처벌했다. 심지어 나치가 소련 여성 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해도 종종 처벌되었다. 이처럼 전선에 ‘위안부’를 보낸 것은 사실상 일본군이 유일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간신히 전쟁이 끝나도록 살아남았으나, 일제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오히려 일본군과 놀다온 더러운 여자들이란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되며 억울한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 1990년대에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자 그동안의 고통을 받아온 위안부 생존자들은 직접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거나 일본의 만행에 대한 증언을 하였으며 우리나라 정부는 1991년 9월 ‘정신대 실태조사대책위원회’를 구성, 일본에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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