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총리직을 없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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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지난 주말(25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지 보름 만에 깨어났습니다. 재벌이나 삼성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던 국민들에게도, 이 회장의 병세 호전 소식은 일단 굿 뉴스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삼성의 비중이 워낙 커, 국민들은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경기침체 상황이 이 회장의 유고(有故)에 따른 삼성의 위기로 까지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던 게 사실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라이온스 이승엽의 3점 홈런이 터지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는 뉴스가 25일과 26일 일간지와 종편TV 등에 일제히 보도됐습니다.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에 눈 번쩍…의식 회복”<TV조선> “이승엽 홈런 고함에 눈 뜬 이건희 회장”<중앙일보> 등 모든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지요. 반재벌 성향의 한겨레조차 <혼수상태 이건희 회장, 이승엽 홈런에 눈 번쩍>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런 얘기를 들으니 굉장히 행복하다. 빨리 (이 회장이) 쾌차하셨으면 좋겠다”는 이승엽의 말까지 친절히 전했습니다.
언론이 이건희 회장의 병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유고가 몰고 올 경제 악영향, 그리고 그의 건강 여부에 따라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뜬금없이 웬 이승엽?”하고,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요. 이 회장을 살린 장본인이, 삼성서울병원의 내로다 하는 박사님들이 아니라 야구방망이 휘두르는 재주 밖에 없는 이승엽이 된 셈이니 말입니다. 한 중견 언론인은 “언론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아무 스크린 없이 받아 쓴 게 문제다. 저널리즘이 아닌 주술(呪述), 무당이 해야 할 소리를 기자들이 그대로 썼다”고 비판했습니다. 이건희와 ‘포스트 이건희’, 즉 이재용을 향한 매스컴의 충성경쟁을 보는 것 같아 뒷맛이 씁쓸했습니다.

잇단 대형사고…악전고투 박근혜

이건희는 이승엽의 홈런 한 방에 눈이 번쩍 뜨였다는데, 사는 게 재미없고 고단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할 신바람 나는 뉴스는 없을까요? 엊그제 LA 다저스 류현진이 퍼펙트게임의 대기록을 세웠다면 눈 번쩍 뜰 사람 많았을 텐데, 마지막 두 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아쉬웠습니다.
‘세월호의 악마’ 유병언이라도 잡혀주면 어떨까요. 3주 넘게 계속되고 있는 한국경찰과 검찰의 ‘유병언 사냥’은 지금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탈옥수 신창원이나 연쇄살인마 유영철 때보다 훨씬 더 ‘고약하지만 흥미진진한’ 추격전이, 신출귀몰하는 전대미문의 이 사이비 종교 교주를 상대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수백명의 무고한 어린 생명을 수중고혼(水中孤魂)을 만들고도 저는 살겠다고, 유기농 식품과 해저 심층수까지 챙겨 먹으며 도망 다니는 유병언 소식을 실시간으로 TV에서 보면서, 국민들은 몹쓸 것을 본 듯 그만 떴던 눈도 감아버렸습니다.
어제 그제 한국에서는 또다시 잇달아 대형 화재사고가 나 수 십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제 일어난 고양 버스터미널 화재사고로 현재까지 8명이 숨지고, 어제 장성에서 일어난 요양원 화재로 2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두 사고 역시 안전 불감증이 빚은 인재(人災)여서, 세월호에 놀란 가슴들을 또 한 번 콩닥거리게 했습니다.
지방선거가 코앞인데 박근혜 정부와 여당엔 악재가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사이 유병언이라도 잡혀주면 모를까, 이 정부 들어 처음 치러지는 전국단위 선거인 6.4 지방선거는 여권으로서는 일찌감치 날 새게 생겼습니다.
세월호 사건 후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공직사회의 적폐를 척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국가개조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청빈한 ‘국민검사’ 이미지의 안대희를 새 국무총리에 지명했습니다.
안대희 카드는 국민의 눈을 번쩍 뜨게 했습니다. 안대희 정도라면 대통령한테 할 말 하고, 부패 무능한 공직사회의 기강을 틀어잡으면서, 명실상부 책임총리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검사생활 30여 년 동안 강북의 작은 아파트에 살았고 재산이 달랑 2억6천만원(대법관 인사청문회 때 신고)이라는 안대희는 시대가 찾는 ‘청빈한 공직자의 표상’이었습니다.

안대희 낙마…지방선거 악재로

 헌데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안대희는 대법관 퇴임 1년 후인 지난해 7월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연말까지 5개월 간 무려 16억원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5개월 16억원의 ‘대박’은 초특급 전관예우 대접을 받지 않고는 챙길 수 없는 수임료입니다.
그는 국세청 세무조사감독위원장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염치없게도 기업의 법인세 관련 소송을 수임했고, 몇 군데 대기업의 고문변호사도 맡았습니다. 강북 아파트도 미련없이 버렸습니다. 청빈검사 안대희는 이렇게 변호사가 된 후 맹렬하게 부(富)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열흘 금식한 사람이 열 하루째 날 중국집으로 달려 가, 짜장면 곱빼기에 탕수육 팔보채 군만두 시켜놓고 정신없이 먹어제낀 꼴이랄까요.
그렇게 살았으면 그만입니다. 명성 명예 공복(公僕)의 길과 몌별(袂別)하고, 안락 풍요 잡인(雜人)의 길로 들어섰다고 시비를 걸 사람은 없습니다. 헌데 세월호 파동으로 핀치에 몰린 대통령이 총리를 제의하자 그는 덥석 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세금 떼고 챙긴 돈 11억원 때문에 쪽팔렸던지, 이를 전액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했습니다. 악덕 재벌총수들이 감옥 들어가기 직전 수백억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며 실형면제를 구걸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세월호의 참극엔 이른바 ‘관피아’와 전관예우 같은 한국 공직사회의 구조화된 적폐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안대희 총리’ 한테는 이런 관료사회의 오래된 부정 부패 모순구조를 과감히 척결할 소명이 쥐어졌었습니다. 하루 1000만원짜리 ‘황제 전관예우’를 받은 사람이 이런 일을 과연 할 수 있을까요. 공직사회가 과연 그를 따를까요.
지난해 7월 안대희가 변호사 개업을 결심하자 친한 친구 몇몇이 극구 말렸습니다. 전관예우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으니 변호사 개업 대신 해외연수를 다녀오는 게 낫겠다는 충고였지요. 그때 해외연수를 떠나 전재산 2억6천만원짜리 청백리 검사로 남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총리가 되고, 국정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영원한 청백리’로 남아, 어쩌면 차기 대권까지 넘볼 명세지재(命世之才)가 됐을 겁니다.
오늘 안대희가 총리 후보를 전격 사퇴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 능력과 리더십은 또 한 차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안대희 총리지명에 눈을 번쩍 떴던 국민들은, 무항심(無恒心)의 순간적 탐묵에서 허우적대다 추락하는 그를 보며 떴던 눈을 다시 감아버렸습니다. ‘남산골 딸깍발이’ 같은 깨끗한 총리를 찾는 것 보다는, 차라리 총리직 자체를 없애는 게 국민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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