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테러 그후 30년> ‘아웅산테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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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AP통신은 한국의 현충일인 지난 6일 한국이 30여년 전 미얀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폭탄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 제막식을 미얀마(버마) 수도 양곤에서 가졌다고 보도했다. 지난 1983년 10월 아웅산 묘소를 방문한 전두환 (당시)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폭탄 테러로 한국 고위 관리 17명을 포함해 21명이 사망하고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었다.  이번에 제막된 1.5m 높이의 이 기념비는 아웅산 묘소 외곽 테러 현장에서 그다지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건립됐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아웅산 테러(1980년) 30주년을 기해 흥미있는 기사를 게재했다.  아웅산 테러사건 발생 30주년을 맞아 발간된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라종일 지음, 창비 펴냄)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민철은 30여년전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북한정권이 보낸 3명 테러 리스트 중의 한 명이었다. 이 책은 그 강민철의 삶과 죽음을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이 책을 편 인물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해외담당차장으로 일했던  라종일 전 우석대 총장(한양대 석좌 교수)이다.  본보는 화제의 책 내용과 월간조선 기사(2010년 9월), 그리고 저자가 지난해 중앙 Sunday와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아웅산’ 테러 리스트 강민철의 생애를 조명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강민철은 북한 지령에 따라 1983년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고 한국 고위관료 등 21명이 사망했다. 강은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자신이 북한 공작원임을 자백한 점이 참작돼 사형집행이 보류됐었다.
강민철의 본명은 강영철이다. 미얀마인들은 그들이 부르기 쉬운 방식으로 강민철을 “강민추” 라고 공식 기록에 표기했다.  기록에는 강이 1955년 4월 18일생으로 돼 있지만 사실은 57년 7월 29일생이라고 말했다. 그는 강원도 북방의 통천 출신으로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
강민철은 83년 10월 ‘아웅산테러’ 사건 직후 탈출과정에서 미얀마 군경과 교전 끝에 중상을 입고 체포됐다.

▲ 1983년 10월 9일 발생한 버마 아웅산 테러범 진모 (왼쪽에서 두번째)와 강민철(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버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강민철은 북한고향에 부친 강석준, 모친 김옥선, 그리고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 등 가족이 있다. 그에게는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 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4년과 중등학교 6년의 10년 과정을 졸업하고 군에 소집돼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학과나 운동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고 군 훈련 과정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 장교로 충원됐다.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 군사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특수학교 훈련생들은 전국에서 출신 성분이나 능력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다. 전투나 무술•사격 등에서 뛰어난 능력의 소지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서로 실명을 알지 못하도록 돼 있었다. 교육 중에는 남한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교과 과정도 있고 남한의 영화나 TV를 볼 수 있는 특권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살인적인 훈련이 있었다. 이들 중 남한에 침투한 요원 중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살을 하거나 지휘관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적지(한국)에서 수많은 군경으로 포위된 상황을 돌파하고 휴전선을 넘어 귀환하는 요원들도 있었다.

고된 훈련을 끝내고 하늘•땅•바다를 가리지 않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거의 만능의 전사가 되었다. 혼자서 100톤급 배를 운항할 수 있고, 전술 행동을 하면서 12마일을 수영할 수 있으며, 육지와 바다간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할 수도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집처럼 특수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강민철은 고된 훈련을 잘 이겨내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바로 대위계급장을 달았다. 군번은 9970이었다. 특수부대원으로 그는 많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운명은 이 젊은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내몰았다. 83년 8월 그가 속한 ‘강창수 부대’의 지휘관인 강창수 중장은 3명의 장교를 불러들여 색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전두환 대통령 암살이었다’며 최고위층의 지시라고 했다. 선발된 그 3명의 장교 중 하나가 강민철 대위였다. 또다른 진모, 신기철이었다.

북한의 배신
 
아웅산 폭발이 있은 뒤 강민철 등 3인조의 북한 테러리스트 들은 급히 현장에서 탈출하여야 했다. 애초 작전계획에서는 랑군(양곤의 옛 이름)강에 쾌속정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며, 이 배가 강 하구에 정박하고 있는 북한선박 ‘동건애국호’까지 데려갈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는 쾌속정은 없었다. 북한은 애초부터 이들의 후속계획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3인 중 현장을 먼저 탈출한 진모는 관민 합동의 추적을 받아 결국 현지인들에게 에워싸이자 허리에 차고 있던 백에서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안전핀을 뽑지 않았는데 바로 폭발이 있었고, 중상을 입었지만 살아 체포됐다. 한편 강민철과 신기철은 쾌속정을 찾는 것을 포기한 채 강변의 채소시장으로 가서 배를 빌려 강을 건넜다. 하지만 어구에서 새벽에 고기를 잡으러 가는 어부들이 이들을 수상히 여기고 바로 경찰과 인민위원회에 신고를 하였다.

강과 신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마을의 가게에서 경찰관 네 명과 마을의 인민위원장의 불심검문을 받게 됐다. 이들은 결국 파출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끝내 경찰이 총을 겨누고 신기철이 총을 꺼내 들어 총격이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신은 현장에서 죽었고 버마 경찰도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한편 강민철은 밖으로 달아났다. 즉시 현장에 정규군이 투입되어 수색을 시작됐다. 다음 날인 10월 12일 아침 군경이 그를 둘러싸자 강은 숨어 있던 곳에서 일어서면서 수류탄으로 위협했는데 안전핀을 뽑지 않았는데 폭발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렇게 하여 테러리스트 3명 중 신기철은 죽고 강민철과 진모 둘은 중상을 입고 체포 되었다. 북한 정권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중상을 입었지만 둘은 모두 회복이 빨랐다. 미얀마 정부는 외부의 간섭을 일절 차단한 채 이들의 신문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두 사람이 모두 조사에 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남한 측의 수사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 거부하던 미얀마 정부는 나중에 남한 측 수사관의 신문을 허락하였다.
부상으로 시력을 잃은 진모는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이었지만 강은 자신이 남한 출신이며 성북 초등학교에 다녔고 서울대학교 학생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진술은 곧 허위임이 드러났다. 성북 초등학교 졸업생 중에 강민철이란 이름은 없었다. 서울대학교에는 같은 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서울에 있었다.

한국 측은 이들이 계속 수사에 협조 하지 않으면 수많은 추측과 억측 가운데 진상이 영원히 묻혀 버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3일 마침내 강민철이 입을 열었다. 후일 강은 자기가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된 경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상에서 회복되는 과정에 버마 의료진은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특히 간호원 한 명이 친절하게 해 주었는데 북한 같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이 믿었던 조국 북한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이었다. 진모도 마찬가지이지만 강이 수류탄을 투척하기도 전에 바로 터져 오히려 본인이 부상을 입은 것도 자신들을 강제로 자폭하게 하려는 북한의 비열한 술책이라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북한 정부는 공작에만 마음을 쓸 뿐 그 이후 요원들의 안전이나 체포되었을 때에 대한 준비는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 당국자들은 자신들은 아무 관련도 없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 상대국 정부와 교섭으로라도 이들을 구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해 11월 4일 버마 정부는 그간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또한 수개국이 북한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69개국이 북한정권을 비난하고 교류를 제한하는 제재를 가하였다.

 ‘눈 뜬채 사망’

강민철은 감옥 생활 중 가장 괴로운 것은 절망감이었다. 한밤중 잠을 깨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계속되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엄격한 자기관리로 건강을 지켜 보통 누구나 20년 이상 견디기 어렵다는 인세인 감옥에서 25년이나 버티었다. 운동을 많이 하고 종교에 귀의하여 명상을 하면서 온갖 육체적• 정신적인 어려움과 싸워 갔다. 매일 고향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그는 끝까지 남한이건 북한이건 설혹 처벌을 받을지라도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2003년 강은 20년을 복역한 셈이었고 미얀마 정부는 그를 석방할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남한도 북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년에 강은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소화불량으로 시작되었지만 후에는 복부 통증으로 발전해, 2008년 4월 병세가 더 악화하였다. 다시 양곤 병원에 입원하여 진단받은 결과 말기 간암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하기 전 그는 차 안에서 숨졌다. 유언 한마디도 남기지 못하였다. 극심한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진 채 죽어가는 50대 병자에게서 한때 억세고 당당했던 젊은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강민철은 눈을 뜬 채 죽었다. 마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인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2008년 5월 18일 오후 4시 30분이었다. 종교의식은 물론 아무런 장례식도 없었다. 강민철은 미얀마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 모든 이로부터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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