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한미동맹 61주년 기념 6.25 사진 전시회 의미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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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절(7월4일)을 계기로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4일 동안 코리아타운 갤러리아에서 개최된 한미동맹 61주년기념 6.25 사진 전시회는 약 2천명이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사진전시회에는 특히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세대 부모들이 많았다. 또한 6.25참전용사도 있고, 북한에서 공산 치하를 탈출한 실향민 가족들도 많았다. 한류가 좋아 코리아타운을 찾은 미국인 등을 포함한 외국인도 있었다. 많은 참관객들은 6.25 참상을 보며 통일 한국을 염원했다. 지난 2012년부터 시작된 6.25사진전시회는 해마다 관심의 폭이 증가하면서 자신들이 소장한 6.25 자료 사진들도 기증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또 한편 6.25 전쟁에 대해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증언하는 등 역사의 교훈장으로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이 6.25 사진전은 전시사관학교인 육군종합학교미주전우회LA(회장 정용봉 박사)가 주최하고 6.25역사재단 (회장 안재득)씨가 협찬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코리아타운 갤러리아 2층 분수대 플라자에서 열린 6.25 사진전에는 300여점의 사진들이 전시 됐다. 64년 전인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6.25 전쟁의 참혹상과 미국의 참전과 젊은 미군들의 희생 그리고 국군포로, 소년병, 납북자, 탈북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전은 많은 관람객들에게 6.25의 교훈을 생생하게 가르쳐 준 계기를 만들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특히 한국전쟁의 역사를 바꾼 인천상륙작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작전전시도 (안원삼 제공)가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사진을 제공한 안원삼씨는 6.25전쟁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LA중앙도서관에 나가 틈틈이 공부를 했다. 70년대에 이민한 안씨는 6.25 사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 작전도를 기증했다. 미국에서 방사선과 분야에서 20여년간 종사한 후 은퇴한 안씨는 “6.25를 모르는 세대가 너무나 많다”면서 “이같은 사진전이 역사를 알린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민운동가인 90세의 김희복 할머니도 전시장을 찾았다. 김 할머니는 “이같은 사진전시회는 우리들에게 통일을 이룩하라는 메시지이다”면서 “요즈음은 우리사회에 통일노래를 안 불러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남침 6·25 잔혹상 알려야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한 안용수 미주한국참전종군기자협회장은 “내가 참전한 역사를 사진전을 통해서 만나니 감개가 무량하다”면서 “이같은 사진전을 통해 후세 사람들이 역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종군기자 시절에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에 크나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평소 이 대통령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성명은 우리 민족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새겨야 하는 명언”이라고 강조했다.
원로목사회장을 지낸 안광남 목사도 사진전시장을 찾아 “호국영령들이 찾은 우리나라를 종북 세력들이 흔들다니 우리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면서 “6.25를 기리 보전하자. 대한민국 만세!!”라고 방명록에 기록했다.

6.25참전용사인 김예현(89)씨는 손자들까지 10여명 가족친지들과 함께 사진전시장을 찾아 역사의 사진들 앞에서 옛일을 회상했다. 김씨는 전쟁 당시 7사단 5연대 수색대원으로 활동했는데 가족 들 앞에서 옛 전투 지역을 설명하기도 했다.
김씨는 평양에서 단신 월남해 6.25가 발발하자, 나이 25세에 자원입대했다. 전쟁터에서 동상으로 다리를 절단해야하는 상황에도 이를 거부했는데, 군의관이 발라준 고약으로 약 1주일 만에 새살이 돋아나는 바람에 회복되어 당시 의료진들도 놀랐다고 했다. 그는 대구 근처 육군병원에서 명예 제대 했다. 지난 71년에 이민한 김씨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자녀들 모두가 미국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훌륭한 시민으로 키웠다.
실향민 김덕순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에 살고 있다며 LA방문 중에 사진전시회를 만나 “1950년 12월 23일 흥남에서 피난하기 위해 미군 화물선에 승선했던 기억이 오늘 6.25사진전을 통해서 감회가 새로워졌다”면서 “사진전을 주관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감사한다”며 글을 적었다.
지난 4일 독립절에는 한인보이스카웃 777의 조셉 신 부부가 참관을 하면서 “우리 한인보이스카웃 대원들에게 6.25전쟁의 역사를 모두 가르쳐주고 싶다”면서 “또한 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을 도왔던 미국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도 가져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한다”고  말했다.

실향민들 전시장 찾아

주한미군에서 복무했던 미군퇴역장교인 피터 디아즈(Col(Ret.)Peter Diaz)예비역대령은  한국인  부인과 함께 전시장을 찾아 “6.25역사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꼭 필요한 교육장”이라며 “무엇보다 한국전쟁 참전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전시회가 개최됐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며 주최 측에 감사를 표했다.
미군에서 30년을 복무하고, 주한미군 복무 당시 한미연합사에서 근무하고 전역을 했다는 디아즈 예비역 대령은 한국정부로부터 ‘3.1장’ 훈장도 받았는데 “한국전쟁 초기에 빈약했던 한국군은 이제 세계적으로 최고의 군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택사스 샌 앤토니시에 거주한다는 디아즈 예비역 대령은 이번 LA방문 중에 ‘6.25사진전’소식을 듣고 일부러 전시장을 찾았다며 “이같은 전시회가 여러 곳에서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이 ‘Sanya’라는 스리랑카인도 사진전시회에 와서 “한국전쟁을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사진전을 통해서 교육을 한다는 점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면서 “사진전을 개최한 주최 측에게 존경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 스리링카도 수많은 내전으로 전쟁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3일 오후 5시에 열린 사진전 개막식은 YTN FM Radio의 이아미 기자의 사회로 진행 됐는데 국악인 심현정(인강판소예술원장)의 한미양국가 선창에 이어 주최자인 육군 종합학교 미주전우회 LA의 정용봉 회장은 인사에서 “64년전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는 초토화 되었으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면서 “오늘의 사진전은 64년 전의 아픔을 조명하여 미래를 새롭게 하는데 있다”고 의의를 밝혔다.
김현명 LA총영사는 축사에서 “사진전을 통해 새삼 6.25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보낸다”면서 “6.25전쟁으로 맺은 한미동맹 정신으로 재미한인사회의단결과 분단조국이 통일로 가는데 모두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박홍기 향군회장은 “6.25 사진전의 의미는 북한 공산당의 존재를 말살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김봉건 자국본회장은 “6.25교훈은 애국충정으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김형석 변호사는 “오늘의 사진전은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전해주는 귀중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6.25사진전이 끝나는 6일 한 노병 정임만(91)·사진 옹이 전시장을 찾았다. 그는 사진 한장 한장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정 옹은 ‘6.25 비사’를 들려주었다.
전쟁 당시 육군보병학교 통역장교였던 정 옹은 6.25가 발발하자 보병학교가 전시체제로 바뀌면서 상관의 명에 따라 한강 남쪽에서 정부의 지시 없이 서울을 탈출하는 공직자 점검에 나섰다. 그가 만난 공직자들은 C국회의원을 포함해, 정부 입법부 고위직들인데 그들이 6월 26일부터 먼저 서울을 탈출하고 있었다. 
6월28일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기전 전선시찰을 나온 맥아더 장군과도 조우했다. 지프차에 탄 맥아더 장군은 한강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반대로 정부 고위관리들은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당시 제1 후퇴선이 수원, 다음이 대전이어서 정 옹의 보병학교는 대전을 지나 남원 전매청에서 쌀과 담배를 싣고 여수항까지 기차로 수차례나 운반해 마산까지 운송하는 작전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정 옹이 6.25 전쟁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한강다리 폭파’로 사형을 당한 최창덕 공병감과의 만남이었다.  전선이 낙동강교두보에서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던 9월 어느날 정 옹은 보병학교 보급 문제로 부산교도소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수감된 최창덕 공병감을 만났다. 최창덕 공병감은 정 옹에게 ‘나는 억울하다.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전 9시께 최 공병감이 수감된 감방 앞에 헌병 2명이 나타났다.  헌병  한 명이 ‘최창식 피고인은 한강다리 폭파로 미국 민간인이 많이 사망하여 미국무성에서 증인 채택을 요청해와 증언을 위해 호송한다’면서 데리고 나갔다. 최 공병감은 나가면서 정 옹에게 ‘나 먼저 나가오’라며 손짓으로 인사하며 떠났다.
그리고 이틀 후 정 옹은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신문에는 한강폭파로 최 공병감이 사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1950년 9월 15일 육군 계엄고등군법회의는 한강 인도교 폭파의 책임을 물어 최창식 대령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최 대령은 6일 뒤인 9월 21일 국방경비법 제27조 적전비행혐의로 처형되었다. “명령에 따라 교량을 폭파한 것은 인정하나 상황을 잘못 판단, 너무 일찍 폭파해 막대한 차량과 군 병력을 추락시키고 전전에서 비행 또는 태만함으로써 부대안전을 위태롭게 했다”는 게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판결의 이유였다.
최 대령은 자신의 행동이 상관의 명령에 의한 불가피한 것이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격앙된 여론과 희생양을 만들려는 당시의 분위기에 파묻혀 결국 사형에 처해졌다. 1차 책임을 져야 할 폭파 명령자 채병덕 소장은 최 대령이 처형되기 두 달 전인 7월 27일 경남 하동전선에서 인민군의 기습을 받고 이미 전사한 뒤였다.
최 대령의 부인 옥정애씨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인도교 폭파가 있고 11년이 지난 1961년 재심을 청구했다. 육군 보통군법회의는 1964년 10월 23일 최 대령에게 사후 14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최 대령이 다리를 폭파한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상관의 작전명령을 따른 것” 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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