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는> 뼛속까지 친일파 집안인 김무성 ‘대망론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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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신임 대표로 김무성 의원이 압도적인 표차로 서청원 의원을 누르고 선출됐다. 김 신임대표는 지난 14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여론조사결과와 일반당원 투표, 대의원 현장투표를 최종 합산한 결과 5만 2706표를 얻어 ‘친박계의 맏형’인 서청원 의원(3만 8293표)을 예상보다 큰표차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김무성 대표가 집권여당의 대표가 되었다는 것은 한국 정치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과 관련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사전입수 해 이를 선거에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찌라시(정보지)에 봤다고 해명함으로서 오히려 국민적 공분을 샀고, 검찰은 이에 대해 무혐의 판정을 내리면서 ‘견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수원대 총장을 국정감사 증인에서 빼주는 대가로 자신의 딸을 수원대 교수로 채용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여기에 복잡한 가정사(차후보도) 등으로 인해 ‘수신제가’가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 그가 집권여당의 당대표뿐만 아니라 차기 대권 주자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 신임대표로 선출된 김무성 대표가 누구인지 <선데이저널>이 쫓아가봤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김무성 대표는 자수성가형이라기보다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김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 선생은 전남방직그룹 창업자이자 회장으로 해방 직후 신한제분을 운영하고 대한해운공사 사장과 주 일본공사관 공사를 지냈다.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기도 한다.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으며, 전쟁동원 친일단체인 조선 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주도한 사실이 1941년도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매일신보에는 “금전용주(金田龍周)씨로부터 황군 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할 것을 긴급동의하야 만장일치로 가결”됐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김 전 회장은 원래 전라도 토박이 사업가였으나 해방 직후 도망치듯이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부산에서 카페(음식점)을 하던 김무성 대표의 어머니를 만나 김 대표를 출산했다. 김무성의 의원은 배다른 형제들과도 현재 재산문제로 지금까지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LA 얼바인에 살고 있는 동생 김남권 씨와 형 김한성 씨는 하와이에서 ‘토다이’라는 일식부페를 경영하고 있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와는 소원한 관계로 이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 재벌가 복잡한 가계도

김무성 대표의 부친인 고 김용주씨는 이승만 정권 시절 제5대 총선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김 전 회장은 민주당 원내총무(현재 원내대표)에까지 올랐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났다.
김 의원의 장인인 고 최치환씨는 만주국 신징(신경)군관학교 3기생 출신으로 역시 이승만 정권 시절 서울시 경찰국장과 공보처장을 지냈다.

김 대표의 형은 김창성 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으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 전남방직 명예회장을 지냈다. 김 대표보다 20살 연상인 누나는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이다. 김 이사장의 남편이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고 딸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 회장이 김 대표의 외조카인 것이다. 김 이사장은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자신의 딸을 서울 강남구 논현동 용문학원 소유 건물의 관리인으로 임명해 급여 명목으로 3억7000만원을 지급한 혐의(업무상 횡령)로 지난 3월 벌금 2000만원에 약식기소되어 법원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김 대표의 자녀들도 유별나다. 김 대표는 부인 최양옥씨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김 대표의 딸 김현정 씨는 최연소로 수원대 전임교수로 채용된 인물로, 최근 수원대 채용과정에 김 대표가 모종의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 김 대표는 지난달 9일 전당대회 출마선언에서 딸 특혜의혹과 관련한 질문에 “딸이 영어 강의 능력이 있어 강사 생활을 충실히 했다. 채용은 학교 방침에 따른 것”이라고 의혹을 전면 부인한 바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영어 강의 능력은 교수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있는 것이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30대 초반에 전임교수가 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데에 입을 모으고 있다.
여기에 KBS-2 ‘아이리스2’에 출연했던 탤런트 고윤(본명 김종민)은 김의원의 아들이다.

NNL 찌라시 발언 논란

김무성 대표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무대’(무성대장)이라는 그의 별명에서 이같은 성격은 잘 드러난다. 지난 대선에서 문제가 됐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의혹이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는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가자 어디서 구했는지 정상회담 회의록에 나온 발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유세 현장에서 읊었다. 그는 이것이 문제되자 검찰청사 현관 앞에서 ‘찌라시’라고 발뺌했고, 검찰도 그에게 무혐의를 줬다. 하지만 출처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찌라시’는 흔히 증권가 정보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소문 수준의 내용이 담긴 것이어서 신뢰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무성 의원은 대선 당시 선거대책본부 총괄본부장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대선을 총괄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 찌라시를 보고 대선을 뒤흔든 ‘NLL 포기’ 의혹을 쟁점화했다는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결국 고급 정보를 쥔 쪽에서 여당 쪽에 정보를 흘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은 ‘찌라시’ 논란에 대해 설명했다. 검찰 관계자는 “조사한 바에 의하면 찌라시라고 말한 건 우리가 아는 증권가 찌라시가 아니다”라면서 “(김무성 의원은) 선거대책본부에 올라오는 여러 동향 관련 문서를 지칭하다 그 용어를 썼다고 해명했다”고 말했다. 결국 증권가 찌라시 수준의 문서가 아니라 대선 관련 보고 문서였다는 얘기다. 검찰은 김무성 의원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내용을 여당 대선캠프 쪽에 전했는지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국 검찰은 지난 6월 지방선거 며칠 뒤 김무성 대표에게 면죄부를 줬다. 힘센 거물이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나서 법을 어긴 것이 찌라시에서 봤다고 우기면 검찰이 면죄부를 주는 희대의 관행이 자리 잡게 됐다. 이런 사람이 집권여당의 당대표가 됐으니, 정치권력과 검찰의 유착은 더욱 가까워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게 됐다.
 
무대, 박과 맞설까

김 대표의 무대포 기질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정치적인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은 지난 2005년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하던 시절 김 대표가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김 대표는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의 좌장으로 박 대통령을 돕는다. 그는 박근혜 캠프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캠프를 진두지휘했다. ‘친박 좌장’이라는 명칭은 이때 생겼다. 당시 김무성 대표를 정치로 이끈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박근혜 후보가 아니라 이명박 후보 지원을 권유해도 김 대표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후보에게 졌다. 김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뒤로 미뤄야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2008년 총선 때 김무성 대표는 공천에서 탈락했다. 이른바 ‘친박 학살’ 공천이었다. 김 대표는 탈당 이후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부산에서 친박 무소속 연대 바람을 일으키며 당선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공천에 대해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는 말로 비판하며 친박 공천 탈락자들을 도왔다. 박 대통령은 친박 공천 탈락자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했다. 살아 돌아온 김무성 대표는 한나라당에 복당한다.
하지만 한나라당 복당 이후 김무성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김무성 대표에게 원내대표를 시키려 하자 박근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내심 원내대표를 하고 싶었던 김무성 대표는 서운했다.

급기야 2010년 2월 김무성 대표가 ‘탈박(脫朴)’이 되는 결정적 사건이 생긴다. 세종시 수정안을 둘러싼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갈등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친박 좌장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던 김 대표는 세종시 원안과 수정안을 조합한 중재안을 개인 자격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원안을 고수했던 박 대통령은 김 대표의 중재안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일축해버렸다. 그리고 “친박에 좌장은 없다”는 말로 김무성 대표를 친박에서 파문(破門)시켰다.
친박에서 파문 당한 김 대표는 결국 박 대통령의 뜻과 다른 길을 걷는다. 2010년 5월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의 허락 없이 당시 당 주류였던 친이(親李)계의 지원을 받아 원내대표가 된다. 박 대통령과 사실상 갈라선 것이다. 이 때문에 김 의원은 친박계가 공천 주도권을 쥐었던 2012년 19대 총선에서 공천 탈락한다. ‘탈박의 대가(代價)’라는 얘기가 있었다.

김 대표가 공천에서 탈락하자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관측이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그는 이때 탈당하지 않고 당에 남아 ‘백의종군’한다. 그리고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선대위 선거대책총괄본부장을 맡아 박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다. 하지만 김 대표는 박 대통령과 껄끄러운 사이는 풀지 못했다. 대선 이후 다시 야인(野人)으로 지내던 김 대표는 2013년 4·24재보선에 당선돼 원내로 돌아왔다. 그리고 1년 3개월 뒤 여당 대표가 됐다.
김 대표는 이번 전당대회 과정에서 “청와대에 할말은 하겠다”고 했다. “건강한 당청(黨靑)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도 했다. 김 대표는 14일 당 대표 당선 후 기자회견에서도 “대통령의 눈과 귀가 돼 국민 여론을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했다. 더구나 김 대표는 당 주류인 친박이 아니라 비박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표가 됐다. 이 때문에 김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울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당·청관계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얘기다. 김 대표가 차기 대선까지 염두에 두고 자기 정치를 하려 한다면 청와대와의 갈등은 심해질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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