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개의 안중근 의사 유묵 ‘어느 것이 진본일까’ 진실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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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씨가 소장한 안중근 의사 유묵

LA동포가 지난 1999년에 우연하게 수집한 족자 한 폭에는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이라고 쓰여져 있다. 이글의 의미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이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은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순국하기 까지 약 200편정도 유묵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발견된 24편은 대한민국정부에서 보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LA동포가 소장하고 있는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와 똑같은 글씨는 이미 국내에서 지난 1972년 8월 16일에 보물 제2호 지정되어 (지정번호 보물 제569-2호)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 (서울 중구 필동3가 26)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의 또 다른 유묵을 지니고 있다는 LA동포 경성현•(사진)는 지난 2008년부터 세 차례 한국을 방문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숭모회 등을 포함 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자신이 소장한  족자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최고의 권위자들이라고 한 관계자들은 경씨의 소장품에대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답변을 거부했다.
무엇보다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는 ‘기증해주면 좋겠다’라고 까지 하면서도 진품여부에 대한 감정을 해주지 않았다. 이같은 결과에 대해 소장자 경씨는 “기증해 달라는 것은 이 물품이 가짜는 아니라는 증거”라면서 “만약 내가 지닌 작품이 진품 유묵인 경우 에는 현재 동국대가 소장한 보물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경씨는 김좌진 장군기념 사업회 미주본부(회장 권욱종)를 방문해 협조를 요청했다.  본보는 경씨와 만나 경위를 취재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경씨는 지난 1999년경 말리나델레이 인근 워싱턴 불러버드 길을 운전하고 가는데 길거리 야드 세일장에 놓여있는 족자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슬에 약간 젖은 족자 글씨가 아름다웠다. 값을 물었더니 30달러라고 하여 흥정을 하여 7달러에 구입했다.
물품을 판매한 라티노에게 ‘어디서 구입한 것이나’고 했더니 ‘오래전에 청소 페이트 일을 일본인 집에서 했는데 주인이 이사를 가서 집을 치우면서 남기고 간 족자와 다른 물품들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경씨는 나중 코리아타운 내 올림픽 만물상에 이 족자를 가지고 갔더니 ‘귀한 물건이다’면서 흥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던 S표구사의 관계자가 경씨에게  ‘이거 안중근 의사 글씨다. 잘 보관 하세요’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 글씨의 주인공이 안중근의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경씨는 아무리보아도 예사 작품이 아니라고 판단해 주위의 권고로 한국의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에 부인과 지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그 전에 서예와 미술품을 경매하는 ‘서울억션’에도 연락했다. 서울에 도착해 우선 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기념사업회 숭모회에 갔다. 당시 김호일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을 포함해 관계자들 앞에서 가지고 간 족자를 펄쳤다.
경씨는 먼저 족자를 구한 경위를 간단히 설명했다. 다 듣고난 김호일 관장은 대뜸 ‘기증할 의사는 없냐’고 물었다. 경씨는 내심 당황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 족자가 안의사의 진품 유묵인지를 판정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서 경씨는  ‘만약 서울억션에서 매매가 잘되면 일정액을 숭모회에 기부하겠다’고 말했다.

우연치 않게 안의사 유묵 소장

 ▲ 경성현씨

서울억션에서도 족자를 보더니 처음에는 자신들이 조치하겠다고 했으나 나중엔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다시 숭모회에 가서 감정을 의뢰했더니 ‘6천달러 감정료가 든다’고 해서 일단 중단했다. 인사동에 있는 고미술협회에서는 ‘이 족자는 인쇄본이다’면서 ‘동국대학교에 원본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경씨는 “글자 자체가 틀린데 어떻게 인쇄본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반박했다. 다시 숭모회에 갔다. 이 모 담당관은 ‘내 마음대로 감정은 못하고, 윗분들이 있어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할 수 없이 경씨는 LA로 돌아왔다.
2009년에 두 번째로 다시 한국에 나갔다. 이번에는 골동품상을 하는 남 모씨와 계약을 맺고 나갔다. 한국에서 남 씨가 인사동에서 골동품상을 하는 임 모씨를 소개해주었다. 임 모씨는 다시 화랑을 하는 공창호씨를 소개했다. 공 씨는 족자를 다 펼치기도 전에 반쪽만 보고서는 “이것은 동국대 원본의 인쇄본이다”라고 해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연락했는데 이혜균씨가 전화를 받고는 “빨리 미국에 돌아가시라’라는 차가운 답변이 왔다.
경씨는 미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등에서 우선 많은 정보가 있었다. 동국대가 소장하고 있다는 안중근의사 유묵 보물에 대해서도 자료를 찾아보았다.
경씨는 2012년 경 평소 알고 지내던 P모기업의 류 모 회장에게 안중근 유묵에 대해 사정을 이야기했다. 류 모 회장은 자신의 지인인 한국의 중앙일보 고위 관계자에게 협조를 받겠다며 한국을  방문했다. 국내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류 모 회장은 ‘청와대에 기증하면 좋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으며 ‘언론사에서도 경씨 소장품이 진짜’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는 과정에서 경씨는 LA소재 SBS International의 박 모 기자를 소개받았다. 경씨는 ‘내가 지니고 있는 족자에 대해 한국의 관계자나 기관들이 감정을 안해준다’고 호소했다. 박 기자는 서울본사의  최 모 기자를 소개했다. 경 씨는 SBS 측에 자신이 지난동안 서울에서 당한 경위를 설명하면서 관계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SBS 관계 기자들은 ‘우리가 언론사이기에 관계자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경씨는 지난 10월 21일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다. 서울 SBS본사에서 최 모 기자를 만났다. 최 기자는 ‘선배님들과 상의한 결과 1분 30초 동안 보도하기로 했다’면서 안중근 유묵 전문가의 한 사람인 예술의 전당의 이동국 큐레이터를 소개했다. 

‘고미술업계 짜고치는 고스톱’

경 씨는 SBS의 여 기자의 안내를 받아 예술의전당에 가서 이동국 큐레이터를 만났다. 이동국 큐레이터는 경 씨가 그동안 만난 관계자들 이름을 대자 ‘어마 어마한 사람들을 만났다’면서 족자를 보더니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SBS기자에게만 나중에 연락 하겠다’라는 말만 했다.
몇일 후 경씨는 SBS의 최 기자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최 기자는 ‘이동국 큐레이터가 한 말을 전할 수 없다’면서 ‘현재로는 모든 사람들이 동국대학이 소장한 유묵을 보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동안 세 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경씨가 만난 관계자들은 안중근의사 글씨에 대해 누구보다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 최고의 권위자들이라고 하는 관계자들은 진품여부 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으며, 기타 일부 관계자들은 ‘인쇄본’또는 ‘쌍구본’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경씨가 만난 안중근의사숭모회의 자문위원으로 있는 김호일 전기념관장(중앙대 역사학과 명예 교수)은 국내에서는 안중근의사 필체에 대해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의 하나이다. 그러한 그가 경씨가 내 놓은 족자에 대해 진품 여부에 대한 판단보다 ‘기증할 의사는 없냐’라고 묻기만 했다는 것도 이상했다. 두 번째 권위를 인정받는 예술의 전당의 이동국 큐레이터도 언급없이 ‘숭모회로 가져가라’는 했다는 점도 이상했다.
현재 인사동  골동품상 주변에서 나도는 소문에는 ‘만약 LA동포 경씨가 소장한 유묵이 판정나면 엄청난 폭풍이 불지도 모른다. 이 유묵이 경매에 들어오면 한국이 뒤집어질지도 모른다’라고 전한 경씨는 “국내 관계자들이 냉대를 하는 바람에 한 때는 내가 이 족자를 들고 일본이나 중국에 가고 싶은 욕망도 생겼었다”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족자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안중근의사기념숭모회 사이트 게시판에는 안중근 의사의 다른 필체에 대해 진실 공방도 이어지고 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숭모회 사이트에 수록된 설명에 따르면1910년 2월과 3월에 걸쳐 여순 옥중에서 휘호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 특유의 고귀한 유묵은 200여 폭이 작성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한ㆍ중ㆍ일에 산재되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실물 또는 사진본 등을 합하여 54편이다.
이러한 유물은 남산 안의사 기념관 등 국내 각처에 소장된 24폭의 유묵만이 현재까지 문화재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보물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30폭은 한ㆍ중ㆍ일에 산재되어 유묵, 혹은 유묵의 영인본으로만 알려져 국가보물로서의 심의절차를 마치지 못한 것이다.
이들 문화재들은 각각의 소재와 소유자가 서로 다르고, 형식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대표적 인 것으로는 보물 제569호의 1호인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 보물 제569호의 2호인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보물 제569호의 14호인 ‘제일강산(第一江山)’ 등이 있고, 보물 제 569호의 25호에 이르기까지 총 25편이며, 끝에는 모두 안중근이 썼다는 글과 장인(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이것은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義士)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여순감옥에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 옥중에서 휘호(揮毫: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이르는 말)한 유묵(遺墨:살아있을 때에 써 둔 글씨나 그린 그림)들을 일괄해서 지정한 것이다.
안중근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한 유묵을 일괄ㆍ지정한 것이다.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서(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ㆍ「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제569-21호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절전독(折田督)]이 받은 것으로,
8ㆍ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569-25호는 안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 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팔목정징(八木正澄)]가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또 제569-22, 23호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나서자 이에 참가하였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기도 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후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했으며,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여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권총을 쏴 3발을 명중시켰다. 여순감옥에 수감된 후 1910년 3월 26일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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