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에 생각나는 이야기 <아름다운 여인 = 오드리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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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 12월 한 달이 남았다. 한 해를 보내며 많은 사람들은 지난날을 되새기며 앞날을 기원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보람있는 삶인가. 여기 나눔의 삶을 살아간 은막의 스타가 있다.
오드리 햅번(1929 ~ 1993), 많은 사람들이 ‘청초한 매력’에 반한 인기 여배우였다.  화려한 은막의 스타가 아프리카 땅 오지에 가서 병든 어린이를 구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자신의 희생을 오직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봉사한 은막의 스타는 진정 휴머니즘을 실천한 여인이었다. <편집자> 

1929년 벨기에 브뤼셀의 한 병원. 아기를 업은 한 여인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우리 딸이 며칠 전부터 심하게 기침을 합니다” 생후 3개월이 된 갓난아기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마른기침을 뱉어내는 아기는 한눈에 봐도 병색이 역력했다. 숙직 의사는 청진기로 이리저리 아기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단순한 감기가 아닙니다. 백일해입니다” “백일해요? 안 좋은 병인가요?” “연령이 낮을수록 위험한 병입니다. 기관지 폐렴이나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인 무기폐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요. 이 아이는 조금 심각한 상태입니다”
의사에 말에 아기의 엄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선생님, 꼭 좀 살려주세요. 무슨 일이든 할 테니 제 아기만은 꼭 살려주세요”
다행히도 아기는 의사와 엄마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에 극적으로 살아났다.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맡겨졌다. 아이는 이때부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발레리나를 꿈꾸웠던 오드리 헵번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좋아하는 꿈 많은 발레리나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가 문제였다. 발레리나는 신체적인 조건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 녀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1948년 짐을 꾸려 영국으로 건너갔다.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즈음 우연히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캐스팅이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영화 〈로마의 휴일〉에 출연 할 수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데뷔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를 일약 ‘은막의 여왕’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공주님의 사랑이라는 동화 같은 주제가 로마를 무대로 펼쳐지면서 숱한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영국 공주 역을 맡았던 <오드리 헵번>과 신문기자 역의 <그레고리 팩>은 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녀 는 소위 ‘헵번 스타일’이라는 숏커트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 운도 좋았다. 영국 왕실의 유명한 로맨스인 마가렛 공주와 타운젠드 대령의 비련이 이슈가 되고 있을 때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로마에서 ‘소원의 벽’에서의 장면은 지금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작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는 제26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주연여우상, 제7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 상에서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티파니에서 아침을>,<마이 페어 레이디>, <언제나 둘이서>,<백만달러의 사랑>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9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우정 출연으로 등장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오드리 햅번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이었다.

유니세프 제2의 값진 인생

그리고 그녀에게는 제2막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해 그녀는 유니세프(UNICEF) 친선대사가 되었다. 헵번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자신이  이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특별기구인 유니세프는 백일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던 오드리 헵번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보수는 1년에 1달러뿐이었고 교통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열정을 다해 헌신했다.

그녀는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곤경과 죽음에 처한 아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길은 아프리카 전 지역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게 이어졌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녀의 끝없는 행보에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에 걸린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각국에서 구호물자와 기부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요?”
1992년 소말리아를 방문했을 때 마을 공터 구석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자루꾸러미를 보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원주민에게 웃으며 물었을 때 그녀는 귀를 의심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아이들의 시체였다.
“오마이갓” 오드리 헵번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두 손을 모았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부터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을 향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을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다. 이 소말리아 방문이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는 것을. 사실 헵번은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되는 것이 두려워 아무한테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암투병 속에서도 온몸던져 희생

그녀는 아랫배에 강한 통증을 느낄 때마다 진통제를 맞으며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오드리 헵번은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명망 있는 의사들이 앞 다투어 그녀를 살려 보겠다고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암이 워낙 온몸에 널리 퍼져 있어서”  오드리 헵번은 고개를 떨군 의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한테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그 것이 제 숙명인걸요.  그래, 신이 제게 주신 시간이 얼마쯤 남았지요?”   “한 3개월쯤 남았습니다.” 
“3개월이라 … 고향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낼 시간은 충분하군요.”  

오드리 헵번의 암소식이 알려졌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당신은 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이들을 돕는 거죠?”
오드리 헵번이 대답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희생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받은 선물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마침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그녀는 기족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좋아하는 시가 있어. 한번 들어보렴.”

그녀는 유언처럼 시를 읊었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이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하고/ 무지함 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손이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93년 1월 20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였다.
그날은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던 날이었지만 그녀의 사망 기사가 클린턴 대통령 취임 기사보다 먼저 다루어졌다.

그를 조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은 장기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를 그냥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오드리 헵번은 은막의 스타였을 때도 유독 빛나는 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남을 돕는 손이 되었을 때 더욱 커다란 별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았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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