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스토리> 46년 전 베트남 전쟁에서 생명 구해준 은인 찾는 한인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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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 왔다가 이번에도 소식을 못 듣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죽기 전에 정말 만나볼 수 있을는지”라며 말을 잊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힌다. 고상현 목사(한국전참전 16개국 선양회 상임이사)는 베트남전 참전용사다. 그는 월남전에서 적의 포화로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전신화상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미공군병원에 후송되어 미국인 백인 간호사의 헌신적인 간호로 생명을 건졌다.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고상현 목사는 생명의 은인인 백인 간호사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백인 간호사를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4년 지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에는 혹시나 하고 기다렸으나 소식을 듣지 못하고 귀국 하는 고상현 목사는 “내년에는 꼭 좋은 소식이 올 것이라 믿고 기도하겠다”라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며 귀국길에 올랐다.
성 진(취재부 기자)

지금부터 46년 전. 1968년은 고상현 목사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고상현 목사는 당시 28세의 청년으로 맹호부대원으로 베트남전선에 파견되어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계급은 병장이었다.
1968년 1월 당시 월맹군은 소위 ‘구정공세’를 펼쳤는데 고 병장은 맹호 제1연대1대대3중대  통신병으로 공격임무를 명령받아 최전방 선두에서 중대지휘소 탱크를 타고 월맹 정규군 주력 부대인 3사단 18연대9대대를 압박해 진격했다.
만약 월맹정규군 9대대에게 맹호3중대가 패한다면 한국군 맹호부대 전체의 사기가 저하되는 치욕을 면할 수밖에 없는 막중한 공격임무였다. 결과적으로 맹호3중대는 손태익 중대장의 지휘로 월맹군제9대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투 끝마무리에서 적의 패잔병이 땅굴에 숨어 있다가 3중대 지휘소 탱크를 향해 B-40 적탄통을 발사한 것이 명중되면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손 중대장과 고 병장은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패잔병이 던진 화산통에 전신화상

적공용화기 B-40적탄통을 맞은 지휘소탱크는 화염에 휩싸였는데 고병장이 불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겨우 탱크 위 구멍으로 탈출하여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교전하는 총소리는 ‘따따따 탕탕타’ 하고 요란한 가운데서 손 중대장이 보였는데 그 모습은 흡사 숯덩이가 되어 얼굴은 완전히 타서 피부가 여름철 염천에 녹아내린 엿물처럼 턱에 대롱거렸다.
손 중대장은 그 가운데서도 “아이고! 내 부하 내 부하!” 소리치다 고병장을 발견하고는 “고병장 내 방탄조끼 좀 벗겨라” 울부짖었다.  방탄조끼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부상이 심한 고병장은 일어설 수가 없어서 굴러가서 방탄조끼를 벗기려하니 방탄복은 이미 다 타버렸고 어깨만 조금남아 있었다.

고 병장이 불길 덮힌 중대장의 방탄조끼를 벗기려고 손을 들었으나 손이 들리지 않자 손과 팔이 불타고 있음을 보면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헬리콥터로 후송 중이었다. 옆에 누운 손 중대장은 아파오는 고통에 참을 수 없는지 아픔을 호소하듯 “아이고! 나 좀 살려달라”고 소리 치고 있었다.
당시 큰 공을 세운 손 중대장과 고 병장을 살리기 위해 맹호부대는 이들을 필리핀에 있는 엔젤레스 클라크 미 공군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손 중대장은 후송 도중 순직하고, 클라크병원에는 통싱병인 고 병장만이 입원하게 됐다.
베트남전쟁에서 군인들이 입은 군복은 아주 얇은 나일론으로 불이 붙으면 녹아서 살과 함께 까맣게 타서 피부에 달라붙어 피부가 익어버려 익은 피부를 긁어내면 짐승 가죽을 벗겨놓은 것 같았다.
필리핀 미공군병원에서 고병장의 진단은 68도 전신 화상이었다. 이 정도면 원래 생존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했다.

68도 화상 입고도 기적적으로 생존

고 병장은 몸 전체 68도 화상이라 주사를 찌를 반반한 피부를 찾기 힘들어 의사들은 죽든지 살든지 전력을 다해 치료만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타버린 고 병장의 피부를 생으로 긁어내고 소독을 하니 그 아픔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미군의관들과 간호사들은 고 병장을 침대에 누이고 둘러서서 온 몸에 통째로 소독물을 들어붓고 붕대 거즈를 쥐고는 붉게 익은 피부상처를 닦아냈다. 인정사정도 없이 마치 마루바닥을 닦는 것처럼 상처를 문질러대면 고병장은 아파서 악을 쓰고 소리치나 의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닦아냈다. 그렇게 거즈로 상처를 닦은 후에 바셀린같은 것을 벽 바르듯이 온몸에 다 발라대면 이곳저곳에서 핏방울이 솟아오르면서 다시 고통이 쓰려왔다.
약을 바른 후에는 다시 붕대로 온 몸을 감았다. 붕대를 감아놓은 몸은 다시 또 쪼여드는 아픔과 화끈 거리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눈이 뒤집힐 정도의 고통으로 고병장은 미치광이가 되어 기절하기가 일수였다. 의사들은 붕대로 감아놓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팔다리를 침대양쪽 귀퉁이에 묶어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도, 위로하며 달래 줄 사람도 없었다. 낮선 이국땅의 병실, 한국인이라곤 없고 모두가 미국인뿐 이였다.
고 병장에게 가장 두려운 시간은 온몸에 감아놓은 붕대를 갈아 끼울 때다. 군의관의사, 위생병, 간호사들이 가위를 들고 오면서 “헤이, 체인지 오케이?”하면 소름이 끼쳐왔다. 붕대 교체는 하루에 두 번으로 오전 9시와 오후5시, 그 시간은 고 병장에겐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시간이었다.
의사들은 감아놓은 붕대가 살에 붙어 있다는 생각을 무시하고 사정없이 뜯어내면 피가 줄줄 흐르면서 생살을 면도칼로 도려내듯 너무도 아파서 고병장은 말도 통하지 않아 소리만 칠뿐이었다.
이러한 처절한 고통과의 사투는 상처가 아물 때까지 3개월간 계속 되었다. 위로해 줄 사람도, 웃어 줄 사람도, 울어 줄 사람도 없는, 이국병실은 고독의 그림자뿐이었다. 고통과 고독이 너무나 심하여 혼자 움직일 수 만 있다면 차라리 자살하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수없이 생각했다.
 
천사처럼 다가온 백의 천사
 
고병장이 있는 병실은 살 썩은 냄새 때문에 아무도 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는 썩은 냄새가 심한 독방에서 혼자 울다 웃다 미친 정신병자처럼 되어 버렸다. 끔찍한 아픔을 이겨보려고 어머니를 수 천만번을 불러 봐도 대답이 없었다.
혼자서 몸부림치다 무서운 긴긴밤들을 지새우는 나날들이 하루 이틀이 아닌 3개월로 하루가 천년 같았다. 의사나 간호사만 보아도 치료가 무섭고 겁나지만 한편은 반갑기도 했다. 간호사들은 밤이면 간간이 순찰하느라 방문을 열고 손전등으로 고 병장을 비쳐보고 울고 있는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냄새가 나니까 문을 쾅 닫고 가버리곤 했다.  그럴 때면 고병장은 스스로 움직일 때가 되면 어떤 방법이든 자결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어느 날부터 고 병장은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물리치료실로 옮겨졌다. 물리치료는 커다란 약물통에 환자를 통채로 담그고 30여분간 세척한 후 침대에 눕게 한다.
그 물리치료실에 백인 간호사 중위가 있었다.  백인 간호사는 아픔의 고통으로 몇 날이 가도 잠 한숨을 못잔 고 병장을 빨가벗겨 침대에 누이고 상처 난 피부를 아프지 않도록 정성껏 약을 바르며 너덜거린 것들을 핀센트와 가위로 조심스럽게 자르고 뜯어내는 바람에 고 병장은 병원에 온 이후 처음으로 포근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고 병장은 클라크 병원에서 자신을 안아주며 잠재워 주는 천사를 처음 만난 것이다. 그 간호사는 고 병장이 치료받는 중 고통을 호소하면 피와 농이 그녀의 하얀 가운 가슴에 묻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얼른 꼬오옥 안아주면서 환하게 밝은 미소로 위로하곤 했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간호장교라는 의무를 초월해서 어머니 같은 손길로 다가왔으며 그 순간부터 고 병장은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안을 찾았다. 그녀는 고 병장이 아픈 표정만 해도 “오…”라며 감싸며 아기를 보살피는 것처럼 하였다. 고 병장은 평안을 찾았고 68도 화상으로 온통 일그러진 얼굴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고 병장은 물리 치료실로 오면서 백인간호사의 정성과 사랑의 손길에서 아픔은 사라지고 병세도 급속도로 좋아져 지팡이를 의지하고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손길 같았던 간호장교

드디어 살아난 고 병장은 한국으로 후송명령이 떨어졌다. 미군들은 죽어가는 그를 살려서 돌려보낸 것이다. 고 병장이 한국으로 후송되는 날, 1968년 4월9일, 백인 간호사는 휴일 근무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 후송되는 고병장을 환송하기위해 사복을 입고 새벽 4시에 미리 병원 복도에 나와서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백인간호사는 공항으로 가는 고병장의 후송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고 병장에게 자신의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며 “잘가라, 편지하세요”라고 말했다.
한국으로 올 때도 몸이 성치 않았던 고 병장은 그 생명의 은인의 이름이 단지 ‘베티 브래디’라는 발음 정도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들려주었던 그 간호사는 당시 미 공군 간호장교로 27세 정도라는 단편적인 사항뿐이었다. 나중 그녀는 필리핀 공군병원에서 콜로라도로 전근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편지에서 백인간호사는 ‘콜로라도로 전근한다’라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러나 고 병장이 대구1육군병원에서 1968년8월 20일 제대하면서 백인 간호사와의 연락이 끊어졌다. 
더군다나 제대 후 사회적응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 병장이었다.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있어도 얼굴은 문둥병자나 다름없이 얼룩졌다. 사회의 냉대는 심했다. 하루는 서울역 근처 다방에 들어가 차를 시켰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종업원에게 “저 문둥병자가 먹던 그릇은 깨끗이 씻어라” 라는 이야기를 듣고 화가 북받쳐 그 자리에서 탁자를 엎어버리는 등 난동을 부려 파출소에 끌려간 적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성형수술 특별하사금

고 병장은 1970년도 겨울, 성형수술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꼬부라진 손가락으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소문을 썼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했다. 박 대통령은 월남전에서 전상을 입은 것을 치하하며 망가진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위로하면서 성형수술 비용을 그 자리에서 내놓았다. 고 병장은 박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성형수술을 받게 되었다. 얼굴은 명동성형외과 장상숙원장이, 손가락 정형수술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그 후 멸시와 천대라는 비천한 질곡의 먹구름들을 걷어내고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인생을 걷기로 하고 끝내 목사 안수를 받기에 이르렀다. 고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보람 있는 사업을 하고자 기도 끝에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 등 16개국을 위한 선양 사업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그 후 이 사업을 미국에서도 하기로 작정하고 2000년부터 미국을 오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러는 동안에도 고 목사에게는 생애의 남은 소망인 생명의 은인 백의의 천사 ‘배티 블래디’를 찾는 일에 매달렸다. 미국 언론에도 호소하고, 미 국방부와 미재향군인회에도 연락을 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지난 10월에 다시 LA에 온 고 목사는 여러 곳을 수소문했으나, 그 백의의 천사의 소식을 얻을 수가 없어 마지막으로 한국전참전16개국 선양회미주지부(회장 김명관)에 부탁하고 29일 귀국했다.
귀국하면서 고 목사는  “그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혈맹국의 깊은 사랑이 아닐까 하고 항상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꼭 찾게 해주세요”라며 동포사회에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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