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진 수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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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상 진
<전 LAPD수사관>

최근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NYPD 중국계 경찰관 장례식을 보며 새삼 나의 LAPD Police Academy(경찰학교) 시절로 돌아 가 봤다. 유난히 특별한 클래스였다. 1981년 9월 8일 클래스 첫 날 여자 후보생  13명을 포함 모두 63 명 으로 시작했다. 거의  군대식 훈련이었지만 집에서 출,퇴근하여 자유 시간은  많았다.
그 당시 만해도 LAPD Police Academy 를 들어가기 위해 평균 기다리는 시간은 2 년이 넘었다. 당시 한 교관의 말에 의하면 140 명 지원하면 1명 정도가 졸업 할 정도로 선정과 훈련과정이 엄했다. 힘든 절차를 거쳐 들어 왔지만 중도 하차율도 높았다. 24 주 클래스 이었는데 날짜가 지나며 훈련생  숫자는 점점 줄어 들었다.
처음 63 명이 시작한 클래스가 졸업할 당시 31 명으로 줄었다. 여성은 하나도 남지 못했다. 훈련이 그 정도로 힘들었다.  나도 훈련 첫날 허리를 다쳤지만 아픈 척도 못했다. 훈련 도중 다치면 즉각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고 증세가 나쁘면 퇴교 당하던지, 언제 있을지 모르는 다음 클래스로 떨어진다.
11 주 과정에서  레슬링하다 왼쪽 어깨가 골절 됐지만 잠깐 체능 시간만 빠지고는 클래스를 계속 하여 꼭 통과해야 하는 자기방어과정(self defense test )을 통과했다. 나는 공부와 사격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체능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허리도 문제이었지만 완전 평발이라  달리기에서 고생이 심했다. 
모든 훈련생들이 참가하는  1 마일 달리기에  나가면 항상 꼴찌였다.특히 여자 교관 하나가 맨 뒤에 처진 나와 같이 뛰며 내 귀에 소리 지르던 음성은 지금까지 귀가 찡하다. 나 같이 몇 명 못뛰는 생도 를  “거북이군단”(turtle squad) 이라 불렀다.  그래도 한번도 중간에 포기한 적이 없다. 아무리 늦게 뛰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퇴교는 시키지 않았다. 잘은 모르지만  당시 나는 LAPD 역사상 체능 점수 를 가장 낮게 받고 졸업한 것 같다. 

NYPD 중국계 경찰관의 장례식을 보며 내 아카데미 생활을 새삼 돌이켜 본 이유는 내 클래스 동기중 하나가 차이나 타운 보석상 강도 사건중 중국계 갱단과 총격전 중에 범인 총을 맞고 사망해서다. 그래서  동료 경찰관 장례식에 처음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 사건은 1984 년 12월 19 일 수요일 오후 2 시쯤 이었다. 비가 억수로 오던 날이다. 차이나 타운 보석상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원정온 3 명의 갱이 나타났다. 항상 문을 잠그고 장사하는 보석 점이었는데  갱들은 손님으로 가장하고 들어갔다. 주인은  눈치채고 비상경보 벨을 눌렀다. 무전을 받고 경찰관 2명이 현장에 출동했다.
잠긴 문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니 주인이 스위치를 눌러 문을 열게끔 했다. 경관 두명이 점포안으로 들어가자 범인 한 명이 듀에인 쟌슨 경찰 얼굴에 총을 쐈다.  그 경찰은 나와 경찰학교 동기였다. 또 다른 경찰인  아치 나가오 는 총을 꺼내 범인 두명을 사살했지만 그자신도 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쟌슨은 숨지고, 세번째 범인은 도주했으나 후에 잡혀 종신형을 받았다.
또 다른 우리 한인과 관련된 사건을 소개한다. 한인 리커 스토어에 대한 이야기다.
 1950/60년 대의 LA 흑인 동네에 (South Central  LA)있던 리커 스토어 는 주로 유대인 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1965 년 당시 전쟁을 방불케한 ‘왔츠폭동’(Watts Rio) 의 결과로 많은 유대인들은 리커 스토어를 흑인들에게 팔아 넘기고 South Central LA 를 떠났다.
1970 년대 말기에  술 가격의 규제가 풀리면서 리커 스토어의 경기가 나빠지자 흑인들은 업소를 한인들에게 팔아 넘기면서 한인들의 리커 스토어 전성기가 시작됐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1980년 대의 South Central LA 엔 변변한 마켓도 은행도 없었다.
‘왔츠폭동’의 후유증으로 새로운 비지니스 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높은 범죄율과 갱 폭력의 난무로 이미 있었던 비즈니스도 망했던지 이곳을 떠났다. 그러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들어 온  한인들은 돈을 벌었다. 가족이 다 나서서 강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긴 시간을 일한 보답이었다. 하지만 희생도 많이 따랐다.
당시 나는 LAPD동양인 수사과에서 일하며 한인 강도 살해 피해 사건엔 꼭 출동을 하였기에 모든 사건에 대해 생생히 기억한다. 많은 리커 스토어 주인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한인들은 업소를 지켰다. 
어느날 한 살인 강도에게  한인부부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 현장은 피로 물들었고 피로 물 들은 돈이 여기 저기 널려져 있었다. 가족 중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한 사람은 죽은 여 주인의 여동생 이었다. 밖에서 벌벌 떨고만 있던 여동생은 무섭다고 업소 안에 들어 오는것을 단호이 거절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대화 중에 업소 안에 많은 돈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다하자 갑자기 빨리 업소로 들어 가겠다고 했다. 돈을 모두 수거해 경찰이 증거물로  일단 수사상 보관하려하자 그  여동생은 언니 돈이니 자기가 갖고 가겠다고 우겼다. 모두 옛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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