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한인이민 역사 시작은 1903년이 아닌 1885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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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필 박사

‘미주 한인의 날’인 지난 1월 13일 전국의 한인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려 미주한인의 정체성과  이민 선조들의 업적을 되새겼다. ‘미주한인의 날’을 기념해 LA주변에서만도 한인사회는 물론 LA시의회, 캘리포니아주의회, 어바인시, 부에나파크시, 글렌데일시 등 미주류사회에서 기념행사가 잇따랐다.
기념식을 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한인들이 미국이민의 역사가 1903년 1월 13일부터 시작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한인들이 미국 땅에 온 것이 1903년부터이고 그 전에는 한인들이 미국 땅에서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해마다 기념식을 주관하는 단체 인사들은 ‘한인들의 미국이민은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이민선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03년 1월 13일은 오래전부터 하와이에 이민한 한인들이 ‘조상숭배의 날’로 기념해왔다. 그래서 2002년도에 미주에서 ‘한인이민 100 주년기념’ 행사를 기획할 때, 1903년 하와이 도착 이민 100주년을 택한 것뿐이다.
하지만 미국 땅에 한인의 역사는 1903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한인 모두가 존경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2년에 부인과 함께 유학생 신분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동포들을 위한 봉사를 했다. 도산보다 더 일찍 미국 땅에서 활동한 한인이 많다.
그 중에서 1885년에 미국에 와서 5년 만에 1890년 6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서재필 박사가 있다. 미주한인 1호인 셈이다. 이처럼 한인이 1885년에도 버젓이 미국 땅에서 활동한 한인의 역사가 있는데  미주이민의 역사를 ‘1903년부터’로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서울에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 박사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 망명 중 188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며 1년을 보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취업허가의 보호를 받지 못해 임금을 받지 못하고 사업장에서 쫓겨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낮엔 막일을 하고 밤엔 영어를 배우던 서재필은 그러던 어느 날 운 좋게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 받는다. 그리하여 1886년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1886년 9월 해리 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 했다. 힐만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언론에 칼럼을 기고할 때의 필명은 오시아(N. H. Osia)라 하였다. 1893년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하여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 학사(M.D.) 가 되었다.
서재필은 컬럼비아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6월 10일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 당시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미국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재필은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으며, 미국 초대 철도우체국장의 딸과 재혼하고 미국 주류사회에 동참했다.
또 한사람이 있다. 변수(1861년 ~ 1891)라는 조선말의 개화파로 나중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공무원이 된 사람이다.
변수는 1882년 일본 유학을 갔다가 임오군란으로 귀국하였으나, 제물포 조약 답례 수신사로 파견되는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3년에는 한미수호통상조약의 답례로 미국에 전권대신 민영익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귀국후 갑신정변에 참여 한 후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는 1886년 1월 미국으로 유학,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마치고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0년부터는 미국 농무성의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나 1891년 모교 입구 정거장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처럼 한인들이 1903년 훨씬 이전부터 미국 땅에서 미주류 사회에서 의미 있는 활동한 역사가 있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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