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속의 ‘국제시장’ 흥남철수 영웅 현봉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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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영화 ‘국제시장’은 눈물샘은 자극했지만, 감동은 그에 비해 적어 작위적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감동을 주려고 너무 치중했기에 진실 된 감동이 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잔잔하게 감동이 밀려 올 때 뚝하고 끊겨버리는 코미디가 흐름을 끊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작금의 우리사회가 지난 60여년의 과거를 너무나 모르고 살고 왔던 것을 일깨워준 영화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불과 60년도 안 되는 역사를 잊고 있다는 현실을 ‘국제시장’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은 ‘흥남철수작전’에서 시작된다. 흥남철수작전에서 가장 많은 피난민을 실은 미국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LA에서 건조된 선박이고, 당시 피난민을 구조해 달라고 미군사령관에게 소리치는 주인공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한국전에 참전한 유학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감춰진 진실 속에 진정한 국제시장의 주인공, 그들의 영웅적인 현장을 <선데이저널>이 다시 한 번 따라가 보았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영화 ‘국제시장’에서 흥남철수작전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1950년 12월 당시 수십만명의 피난민 들이 흥남 부둣가에 몰려있고, 미군과 한국군이 함정을 동원해 철수작전을 펴고 있었다. 군작전이라 피난민이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선박 간판에서 20대의 한 젊은 한국인이 미군 사령관에게 ‘저 피난민들을 태워 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미군사령관은 무기와 장비를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우기로 결심한다.

그날의 그 젊은 청년은 현봉학 박사(1922-2007)로 미국에서 의사로서 활동하다 지난 2007년에 미국에서 작고했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28세의 청년 현봉학은 미10군단 알몬드 사령관의 민사고문이며  한국해병대 문관이었다. 나중 의학박사가 된 현봉학박사는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고녀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함흥 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했다.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그 후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주 버지니아 주립 대학에서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한 후 6.25전쟁 3개월 전에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한국전쟁을 맞았다.


 ▲ 1950년 12월 흥남부두에 몰려든 피난민들과 군인들

‘한국판 쉰들러’ 소년 현봉학

 

청년 현봉학은 지인의 권유로 해병대 문관이 되어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민사부 고문으로 일하면서 흥남 철수작전에 출동했다. 당시 피난민이 함께 승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미군 사령관을 설득해 결국 9만8천 여명의 피난민을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포함한 수십척의 수송선에 싣고 거제도로 옮기게 했다.
나중 현 박사는 “당시 피난민들은 선박 구석구석뿐 아니라 차량 밑, 장갑차 위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홍해를 건너는 심정으로 거제도로 갔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그를  ‘한국판 쉰들러’로 불린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총성이 멎자 현 박사는 다시 미국에 와서 펜실베이니아 장로교대학 메디컬 센터에서 레지던트를 마쳤으며,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원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1962년까지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 있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의 병리학자로 일했고, 1962년부터 1987년까지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또 버지니아 의대, 콜럼비아 내과, 외과의대, 피츠버그의 토머스 제퍼슨대학교,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등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로 재직했다. 연세대 의대 객원교수도 역임했다.
또한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 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또한 임상병리학 연구로 199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임상병리학회(ASCP)가 주는 세계적 권위인 ‘이스라엘 데이비슨상’을 수상했고, 2005년 서재필 의학상을 받았다.
사회활동으로 서재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등을 기리는 사업과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을 맡았으며 윤동주의 묘를 찾아내 단장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했다.
일생을 인도적 활동으로 공헌했던 현봉학 박사는 2007년 11월25일 오후 1시30분 미국 뉴저지 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개봉된 지난해 2014년 12월 국가 보훈처의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 되었다.

2,000 명 한도에 14,000명 태워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난민을 싣고 마지막으로 출항한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y. 1945년~1993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앤젤레스에서 건조된 화물선이다. 배의 정원은 60명. ‘SS Meredith Victory’라는 이름은 북부 캐롤라이나의 작은 대학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배 이름 뒤에 ‘빅토리’라는 단어가 붙은 일련의 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짐과 장비를 실어 나르는 화물선으로 만들어졌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부산에 물자를 내려놓은 뒤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되어 그해 12월 22일 흥남부두(흥남항)로 갔다. 당시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5천명과 피난민 9만 여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 미국 군함과 비행기가 중공군에 폭격을 하는 동안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흥남 철수 작전에 동원 됐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정원은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13명만 더 태울 수 있었다. 당시 미 육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한국인 해병대 문관겸 미사령관 민사고문 현봉학씨가 피난민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고, 레너드 P.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령했다. 피난민들도 자신의 짐을 버리고 승선해 모두 1만4천명이 배에 올랐다.

배안의 사정은 훨씬 엄혹했다. 애당초  많이 태워야2000명 정도라고 여겼던 배라고 한다. 하지만 라루 선장이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다”고 결정했다. 공간이란 공간마다 피란민을 밀어 넣었고 선창을 새로 내기도 했다. 승무원들이 “조그만 차에 12명의 거인이 타는 것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13시간 40분 걸려 1만4000명을 태웠다. 피란민들은 배에 올랐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다. 선원은 라루 선장을 포함, 달랑 48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아는 한국어는 ‘빨리 빨리’ 정도였다. 배 안엔 인화성이 높은 항공유 300t이 실려 있었고 바다엔 기뢰가 가득했다. 라루 선장이 “이론상으로는 인명의 피해가 엄청날 수 있었다”고 불안해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의 희생도 없이, 오히려 새 생명을 잉태한 항해가 된 셈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 동안 항해해서 부산항으로 운항했다. 음식과 물, 이불, 의약품이 모두 부족했고, 적이 공격하는 와중이었지만 희생자는 한명도 없었다.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 들에게 줬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한때는 젊은이들이 음식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갔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입항이 거절됐다. 라루 선장은 할 수 없이 50마일을 더 항해해서 크리스마스인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을 내려놓았다. 항해 도중 아기 5명이 태어났다. 이를 불러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란 말이 생겼다.

5명 신생아 탄생 ‘크리스마스’의 기적

 ▲ 알몬드 미국사령관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난 뒤 시애틀로 갔다가 베트남전에 투입되기 전까지 수년간 워싱턴주 브레머턴(Bremerton, WA)에 정박해 있다가 1971년 퇴역했고, 1993년 중국에 팔려 고철로 분해됐다. 이 배는 미국 의회에서 갤런트상(Gallant Award)을 받은 몇 안 되는 배 중의 하나이다. 미국 교통부(DOT)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출을 한 기적의 배’라고 선포했다.
라루 선장은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모든 선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1958년)과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 ‘상선단 공훈 메달’(1960년)을 받았다. 2004년 9월엔 기네스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를 한 배로 기록됐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 공원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모형이 만들어졌다.
“될수록 많은 피난민을 태워라”고 소리친 라루 선장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다. 흥남철수작전을 마친 후 1954년 바다를 떠나 뉴저지주 뉴턴시에 있는 천주교 수도회 베네딕토회의 성 바오로 수도원(St. Paul’s Abbey in Newton, N.J)에 들어가 ‘마리너스’ (Marinus) 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8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 마리너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라루 선장은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상황을 “나는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라루 선장은 이때의 경험으로 천주교 수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선원들, 진정한 영웅은 바로 피난민

한편 빅토리호의 일등항해사였던  로버트 러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네스 등재를 신청한 인물로 해군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전쟁 당시 함흥 철수 작전에는 22살의 일등 항해사 였다. 전쟁이 휴전되자 코넬대 로스쿨을 거쳐 2008년에 미국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했다. 예비역으로 복무, 소장까지 진급했다. 2006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재향군인회로부터 ‘향군 대휘장’을 받았고, 우석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8년 2월에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미 국무부의 요청을 받아 미군 실종자 유해발굴 작업을 위해 북한을 방문 하기도 했다.
러니씨는 2004년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 소감에서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 이었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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