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속 ‘국제시장2’-전설의 미해병1사단의 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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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이 미국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참전용사들을 울렸다고 한다. 지난 11일 미국동부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리걸 극장에서 열린 ‘국제시장’ 상영회에는 한.미 참전노병 50여 명과 한국 파견을 앞둔 미 국무부 등 직원 10여 명, 주미 대사관 무관부 직원, 현지 동포 등 200여명이 관람해 객석을 모두 채웠다. 영화가 끝나자 스크린 앞 단상에 오른 스티븐 옴스테드(85) 미예비역 장군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병 계급으로 참전해 장진호 전투를 치른 뒤 중장까지 승진했던 전직 해병대 장군은 “지금의 자랑스러운 한국은 당시 군인들의 희생과 한국 국민의 노력을 통해 가능했고 그러기에 희생한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단상을 내려온 그는 “흥남 철수 장면에서 아이와 아버지가 헤어지는데 이게 어디 영화 속 주인공 가족만의 이야기 이겠는가. 나도 울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흥남 철수를 지휘한 당시 10군단장이던 에드워드 아몬드(1979년 작고) 소장의 외손자 토머스 퍼거슨(72) 예비역 대령도 참석했다.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미해병대의 ‘장진호 전투’가 없었다면 흥남철수도 없었을 것이다. 흥남철수작전을 있게한 미해병1사단의 투혼을 소개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미국 워싱턴 DC에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있다. 이 기념공원의 동상들은 한국 전쟁 중 장진호 전투의 정찰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명 규모의 7개 사단병력에 의해 사방이 완전히 포위된 채 토끼몰이 식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미8기병연대 3대대가 전멸당한 전투이다. 미군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미해병1사단이 10배가 넘는 12만명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어 중공군의 남진을 2주간이나 막아 결국 20여만명의 군인과 피난민의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케 만들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배경인 ‘국제시장’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잊어버리면 안 될 해병1사단 공로

부산 남포동에서 부평동으로 길게 이어지는 ‘국제시장’은1945 년 광복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들이 모여 만든 자그마한 장터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피난 온 사람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식량, 의약품 등을 팔러 모이면서 커졌다. 1953년 1월 30일 한 주점에서 일어난 불 때문에 시장 전체가 잿더미가 돼 많은 상인들을 아프게 했지만, 이후 시설 재건, 새마을운동 등 여러 차례의 개수공사를 거쳐 지금의 ‘국제시장’이 됐다. 이 ‘국제시장’ 상인들조차 잘 알지 못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은인이 바로 미군, 그 중에서도 미해병 1사단이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1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당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성공한 후퇴 작전이다.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다.

당시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에는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자가 몇 안 된다 하여 영어로 그들을 가리켜 “The Chosin Few”라 하였는데 그 말은 “The Chosen Few” (선택 받은 소수)를 의미하는 일종의  익살이다.
당시 작전에 미해병사단 외에 미국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하였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 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 공격을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 철수는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킨 사건을 말한다. 흥남 철수 의 작전시작한 날은 바로 국군이 평양에서 철수한 날이었다. 또한 흥남 철수 작전이 바로 1.4 후퇴 의 시작이었다.
미 해병1사단의 성공적인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한국군과 미군, 피란민 등 20만명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의 미 8군이 중공군을 방어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공격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동장군과 싸운 해병대

1950년 6.25전쟁 발발한 직후 가장 먼저 한반도로 달려온 부대 가운데 하나인 미해병 1사단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 펠렐리우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 참전했던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미 해병 1사단은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등 굵직굵직한 전투 때마다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미군의 사기를 북돋운 부대였다. 하지만 이들 에게도 기억하기 싫은 전투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장진호 전투’이다.
1950 년 10월 26일 미해병 1사단은 원산에 상륙한다. 하지만 이미 국군 1사단이 원산 후방의 적을 격파하고 북진한 터라 북한 인민군과 별다른 교전은 없었다. 이에 유엔군 지휘부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원산은 후속 부대인 미육군 3사단에게 맡기고 장진호로 진격하라”는 것이었다.
미해병 1사단장 올리버 P.스미스 소장은 그러나 날씨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 진격을 조금씩 미룬다. 함경남도에 있는 장진호 주변에는 10월 말에 이미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미스 소장은 이런 기상에서 성급하게 진격하다가는 보급로가 무너지고 부대가 고립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해병 1사단이 미적거리자  미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은 벼락같이 화를 낸다. 알몬드 중장은 “서부 전선 부대와 사이에 공백을 없애려면 해병 1사단이 장진호 북쪽으로 진격해야 한다”며 스미스 소장을 다그쳤다. 스미스 소장은 어쩔 수 없이 장진호 북쪽으로 다가선다.
알몬드 중장은 이때 중공군 30만 명이 한반도에 진입한 상태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도기 기껏해야 3만여 명 정도가 참전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50년 10 월 하순,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중공군 18만 명의 공격을 받고 황급히 퇴각한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어떤 전력을 갖고 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전선의 부대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1.4 후퇴로 이어지는 대규모 철수의 시작이었다.
한편 1950년 11월 중순, 중공군 가운데 일부가 동부전선으로 숨어들었다. 예하에 7개 사단을 거느린 중공군 제9병단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미해병대를 격파한 뒤 함흥-흥남 축선을 확보해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제9병단에다 병력을 더 보강해 미 해병 1사단의 주력이 모인 지역에 4개 사단, 철수할 도로에 4개 사단, 예비 병력으로 2개 사단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병력 수는 무려 12만 명이 넘었다. 반면 미해병 1사단은 1만 2,000여 명이었다.
양측 간에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 오전 8시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이미 산발적인 전투를 통해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다는 것을 파악한 미해병 1사단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선제공격을 감행 했지만,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부터 미해병 1사단의 전투는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미해병 1사단은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에서 중공군과 북괴 인민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쉬지 않고 전투를 벌였다.
스미스 소장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서도 야전 활주로를 건설했다. 유엔군의 우월한 공군 수송력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미해병 1사단이 중공군과 10대 1의 싸움을 벌이는 동안 알몬드 중장은 미10군단 예하 부들에게 흥남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12월 1일,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부족한 탄약과 식량, 의약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부상자 4,300여 명도 후방으로 보냈다. 남은 이들은 중공군 과 계속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 45,000명 전사

미해병 1사단은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중공군을 물리쳤다.
고토리 전투의 경우 미군 사상자는 300여 명이었던 반면 중공군은 8,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해병 1사단은 역전의 용사답게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투지를 발휘했지만 수적 열세와 ‘동장군’을 극복할 방법은 없었다. 개마고원 지역으로 주변이 해발 1,000m의 고지대인 장진호는 당시 낮 기온 이 영하 20도 내외, 밤에는 영하 28~45도까지 떨어졌다.
일부 지역에는 60cm 이상의 눈이 쌓여 있었고, 눈보라가 칠 때는 가시거리가 15m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미군과 중공군 모두 이런 혹한지에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이런 혹한 때문에 미해병 1사단이 갖고 있던 식량과 연료는 대부분 얼어붙고 땔감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해병대원들 가운데 동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하지만 스미스 소장은 이 와중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중공군 포위망이 약한 부분을 계속 돌파하려 시도한다. 미해병 1사단은 약 2주 동안 이어진 ‘장진호 전투’ 끝에 흥남으로의 철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미해병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처를 입었다.
중공군 12만 명의 공격을 2주 동안 막아내며, 미10군단, 한국군 1군단 등 유엔군 10만여 명, 피란민 10만여 명이190여 척의 군함과 상선으로 탈출할 시간을 벌어낸 미해병 1사단은 부대원 1만 2,000여 명 가운데 7,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중 3,659명은 동상으로 인한 사상이었다.
미해병 1사단을 공격했던 중공군 제9병단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12만 명의 병력 가운데 4만 5,000여 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2,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병력 가운데 30% 이상이 동상을 입었다.
미해병 1사단의 ‘장진호 전투’는 이후 세계 3대 혹한전투로 일컬어지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미해병대 내에는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Chosin Few)’라는 모임도 생겼다. 아주 적은 생존자만이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이후 미군이 혹한지 전투에 대비하게 된 것이 ‘장진호 전투’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실제 과거 우리 군에도 보급됐던 ‘스키 파카’가 이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미 해병대에게는 ‘악몽’이었던 장진호 전투는 한국인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흥남철수’를 있게 해 준 ‘고귀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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