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비사> 월남패망 40년 그리고 월남억류 한국외교관석방 뒷이야기

이 뉴스를 공유하기
     

월남 패망직전 사이공을 탈출하려던 수많은 난민들이 미국대사관 담장을 넘고, 옥색으로 반짝이는 미국대사관 레크리에이션센터의 넓디넓은 수영장주위를 가득 메운 근심가득한 표정의 피난민들, 그리고 미국인 숙소인 사이공 다운타운의 주상복합건물 옥상 헬리포트를 향해 한발 한발 계단을 올라가는 피난민들, 바로 40년전인 1975년 4월 30일 월남패망 전날의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그래햄 마틴 미국대사가 강아지 한 마리를 가슴에 안고 무장경호원을 대동한 채 마치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한가롭게 자신의 관저로 향하는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 가정부를 탈출시키기 위해 이미 수많은 난민들로 가득찬 대사관 마당을 가로질러 그녀를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마틴 대사는 이튿날 아침 동트기 직전 새벽 4시를 조금 넘긴 시간, 대사관 마당에서 시누크헬기를 타고 사이공을 탈출했다. 그가 탑승하자 헬기 조종사는 ‘타이거, 타이거, 타이거’ 라며 타이거를 3번 외쳤다. 미국대사가 탈출했다는 암호였다. 이 탈출장면은 고스란히 동영상으로 남겨져 지금도 유투브에 올려져 있다. 미국의 탈출이었다. <선데이저널>이 단독으로 입수한 1978년 미국무부 비밀전문(서울9861) 베트남 억류 ‘한국외교관-뉴델리협상’ 요약본을 공개한다.
박우진(취재부기자)

ⓒ2015 Sundayjournalusa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래함 마틴 미국대사는 너무나 침착하고 태연하게 탈출했지만 월남패망 때 미국의 탈출 작전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심지어 주미대사관 담장을 지키던 미 해병대 40여명의 존재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탈출할 정도였다. 뒤늦게 이들을 구출할 마지막헬기가 출동, 해병대는 탈출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적지에 버려졌다. 살아남은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 미 해병대조차 사지에 남겨둘 정도로 허둥댔기에 한국외교관들의 무사탈출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미국 측은 4월 30일 아침, 이른바 비상탈출장소 3, 즉 어셈블리포인트에서 한국외교관을 헬기편으로 구출하겠다고 통보했지만 어셈블리포인트에 미군헬기는 없었다. 그래서 한국외교관 9명이 월남을 탈출하지 못했고 패망 3일 뒤 외교관1명이 어선을 타고 싱가폴로 탈출, 8명이 베트남에 남게 됐고, 5명은 단계적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이대용 월남공사 등 한국외교관 3명이 적지에 남겨져 결국 베트남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살아남은 자, 떠나려는 자

당시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베트남 패망순간을 함께 했던 안병찬 당시 한국일보기자는 ‘처참한 밤이었다. 5월 1일 새벽 마틴대사가 떠나기 직전, 거의 마지막 구출헬기에 탔을 때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절규했고 헬기에서 내려다본 사이공시내는 가로등이 깜빡 깜빡 졸고 있었다. 도시의 창백한 아름다움, 이게 패망당일 새벽 사이공의 역설적인 모습이었다’고 밝혔었다.

월남 패망 때 억류됐던 한국외교관들의 석방을 위한 노력들은 숨이 막힐 듯한 긴박함의 연속이었다.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검토한 결과 1975년 월남패망 때 월맹정부에 억류됐던 한국외교관 3명중 1명이 북한으로 데려가겠다는 북한 측 협박을 이기지 못해 북한 전향서에 서명했음을 한국정부가 1978년 미국 측에 통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누구도 그 외교관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적진 한복판,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해협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 이 전문에서 월맹의 교도소, 즉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는 외교관 3명이 1976년 9월 15일, 즉 월남패망 1년 4개월 보름만에 베트남 교민회장인 이순흥씨를 통해 한국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했다고 적혀 있다.
ⓒ2015 Sundayjournalusa

억류외교관 석방협상 때 북한이 1명당 한국 내 체포간첩 150명을 교환하자고 최초 제의했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북한은 당초 외교관 1명당 70명을 제안했던 것으로 밝혀졌고 우리 외교관들은 억류 1년 4개월여만에 한국의 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했고 월남패망 22개월여만에 처음으로 한국교민대표가 한국정부를 대신해 이들 외교관중 주니어 외교관 2명을 만나 생사를 확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할 때 당시 주베트남 한국대사관 외교관 9명이 미처 탈출하지 못했고 그 뒤 이대용공사와 서병호총경, 안희완영사 등 3명은 5년간 억류됐다가 1980년 4월 11일 기적적으로 귀환했었다. 이공사가 김영관 베트남대사에 이어 2인자였고, 억류외교관3명중 시니어였으며 나머지 2명은 30대 초반의 주니어급 외교관이었다.

한국외교관과 가족과의 편지교환이 언급된 미국무부 비밀전문은 1977년 12월 21일자 전문이다. 이 전문은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국무부와 프랑스주재 미국대사관등으로 타전한 전문이다. 프랑스주재 미국대사관으로 전문을 타전한 것은 프랑스에서 미국과 베트남간의 회담이 열렸기 때문이다.

밀고 당기는 억류외교관 석방협상

이 전문에서 월맹의 교도소, 즉 치화형무소에 갇혀 있는 외교관 3명이 1976년 9월 15일, 즉 월남패망 1년 4개월 보름만에 베트남 교민회장인 이순흥씨를 통해 한국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했다고 적혀 있다. 이순홍교민회장은 교도소에서 극비리에 외교관으로 부터 편지를 받아다가 프랑스대사관이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난민을 통하는 방식으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달한 것으로 이 전문은 기록하고 있다. 3-4단계 극비작전을 통해 가족들에게 외교관들의 생존사실이 전달된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전문에 언급된 이순홍씨는 월남에서 성공한 기업인으로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외교관구출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생사를 건 구출활동이 미 국무부 외교전문에도 기록된 것이다. 이씨는 후일 이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정부로 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 1977년 2월 10일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미 국무부로 비밀전문을 타전했다. 오는 2월 15일, 즉 ‘닷새뒤 베트남에 체류중인 한국인 대표가 교도소에 수감중인 외교관 3명중 주니어 2명을 만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한국정부가 미국에 통보해 준 것으로 돼 있다. ⓒ2015 Sundayjournalusa

이 전문에 따르면 억류외교관들과 가족들은 이 전문타전때까지, 즉 1977년 12월까지 모두 17차례 편지를 교환했다. 억류외교관들이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낸 때는 1977년 7월이며, 한국가족들이 보낸 마지막 편지는 1977년 10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족들은 식료품등을 억류외교관들에게 전했고, 전달여부도 확인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순홍회장은 먼저 편지 교환 작전을 성공시킨 뒤 억류외교관들과의 직접 면담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77년 2월 10일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는 미 국무부로 비밀전문을 타전했다. 오는 2월 15일, 즉 ‘닷새 뒤 베트남에 체류 중인 한국인 대표가 교도소에 수감 중인 외교관 3명중 주니어 2명을 만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한국정부가 미국에 통보해 준 것으로 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인 대표는 이순홍 베트남 교민회장을 말한다. 1977년 12월 미국무부 비밀전문에는 ‘이순홍’이라는 이름이 명시돼 있지만 이보다 10개월 앞선 같은 해 2월에는 교민대표로만 기록된 것이다. 월맹정부는 이씨가 교도소에서 주니어 2명을 만나는 것은 허용했지만 이대용공사와의 면담허용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것으로 돼 있다. 즉 억류외교관이 월남패망 22개월만에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표한 인사와 직접 면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지교환이 성사된 지 5개월만이었다. 월맹정부는 한국측과 이대용공사와의 면담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공사는 한국정부에 자신들의 상황을 전달했음을 이 전문을 통해 할 수 있다. 편지는 프랑스정부를 통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공사는 한국정부에 보낸 전문에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이 한국 외무부관계자가 미국 측에 알린 내용이다.

종전 3년 뒤 뉴델리 협상에서 거론

미국무부 비밀정부를 살펴보면 한국정부는 미국 측에 한국외교관 석방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한 것으로 돼 있다. 1978년 3월 8일자 전문에서 미국 측은 한국정부가 일본을 통해서 월맹정부와 교섭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 전문에는 박동진 외무장관이 홀부르크 미 국무부 차관등에게 한국외교관 석방을 통한 미국지원에 감사를 표했고 프랑스를 통한 석방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나지 못했다. 즉 실패했다고 알렸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없는 시점이라고 설명한 것으로 돼 있다. 미국 측이 월맹의 적국임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다. 특히 하비브 차관보는 일부정부를 통한 교섭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충고한 것으로 돼 있다.

그 뒤 1978년 7월이 되면서 뉴델리에서 남북한과 월맹정부가 참여하는 3자협상이 시작된다, 이에 앞서 한국은 미국측에 뉴델리협상개최에 대해 사전에 통보한 것으로 돼 있다. 1978년 7월 19일자 미국무부 비밀전문에 따르면 한국측은 같은 날인 19일 뉴델리협상이 7월22일 인도주재 북한대표부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알렸다. 특히 한국정부는 월맹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고 한국과 북한의 직접 협상에 모든 것을 맡겨 매우 놀랐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또 북한측 대표는 조명일로 차관급이며 월맹정부도 외교차관을 파견한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북한입장에서는 외교관 교환협상도 중요하지만 남북간 대화채널확보에 더욱 관심이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1978년 9월 24일자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보면 홀브루크 차관보가 9월 22일 베트남외교차관과 가진 회담내용을 한국 측에 설명한 것으로 돼 있고 한국정부는 이 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외교관 석방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베트남에게 알려달라고 사전에 요청했던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그 이후 외교관 1명의 전향사실과 이들의 구출을 위한 뉴델리 협상의 줄다리기 등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은 전문 2건이 주목을 끈다.

공로명 회고전에도 비밀전문 언급없어

지난 1978년 11월 2일 오후, 공로명 당시 외교부 아주국장은 베트남억류외교관 3명중 시니어급 외교관 2명이 북한의 전향서에 서명을 거부했으나 주니어외교관 1명이 이같은 전향서에 서명한 것이 명백하다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전화로 통보했었다는 사실이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밝혀졌다. 외무장관까지 역임한 공전장관은 지난해 12월 출판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월남억류외교관 석방과정을 자세히 언급하면서도 이 같은 사실은 밝히지 않았지만 미 국무부 비밀전문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 1978년 3월 8일자 전문에서 미국측은 한국정부가 일본을 통해서 월맹정부와 교섭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2015 Sundayjournalusa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1978년 11월 2일 미국무부에 보고한 ‘베트남억류 한국외교관-뉴델리협상’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서울9861]에 따르면 ‘공로명 외교부 아주국장은 북한측 인사 2명이 최근 1주일동안 억류외교관 3명을 개별적으로 심문했으며 북한측은 외교관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북한으로 데려가겠다고 협박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공국장은 ‘북한측의 심문목적은 외교관 3명으로 부터 전향서를 받으려는 것이 명백하며 외교관들에게 남한내 애국세력들의 혁명과업수행을 방해하지 말 것,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 등을 명시한 서류에 서명을 강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상의 전향서인 셈이다.
특히 공국장은 ‘협조하지 않으면 북한으로 송환하겠다는 협박이 가해졌고 시니어급 외교관 2명은 전향서 서명에 거부했지만 주니어급 외교관 1명은 그 같은 종류의 전향서에 서명했음이 명백하다’고 주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에게 말한 것으로 돼 있다. 한국외교관이 평양에서 열리는 대규모 군중집회에 참석, 김일성만세를 외치며 한국을 비난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것, 한국정부가 가장 우려하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북한이 착착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국장은 또 ‘북한이 심문하는 이유는 2가지로 첫째 뉴델리협상에 임하는 한국에 대한 압력, 둘째는 전향서에 서명하도록 해 북한이 외교적인 승리를 이루려는 것으로 분석하고 자신은 외교관의 전향서 서명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이들 외교관중 1명이 북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전향서에 서명했다고 미국측에 통보했음은 사상 처음 밝혀지는 것으로 적지 않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2015 Sundayjournalusa

공교롭게도 이대용공사가 지난 2010년 5월 출판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라는 자서전에는 공국장이 외교관 1명의 전향을 미국 측에 통보한 날인 1978년 11월 2일 치화형무소 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정부의 훈령을 받았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정부가 외교관들의 북한 전향을 우려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공사는 이책에서 ‘놀랍게도 1978년 11월 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리 외무부장관 훈령이 나에게 하달되었다. 옥중에서 처음 받는 본국훈령이었다. 1. 현재 한국대표단, 월공대표단, 북괴대표단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이공사, 서영사, 안영사의 석방을 위해 3자회담을 하고 있음. 2. 억류되어 있는 한국외교관 세명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 3. 북괴요원들의 어떠한 협박, 공갈에도 겁내지 말고 북한에 가겠다고 동의하지 말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공사는 또 ‘1978년 9월 25일부터 약1주일간 ‘남한 불바다발언’으로 유명한 박영수등 3명으로 부터 외교관 3명이 분리심문을 받고 전향서를 쓰고 북한으로 가자는 협박을 받았다’고 밝혔다.

북, 어처구니없는 1대150 교환석방 제안

공국장이 미국에 외교관 1명의 전향사실을 통보한 날, 옥중의 이공사에게 외교관 석방을 위한 3자회담 개최사실을 알리고 북한에 강제납치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훈령이 전달된 것은 억류외교관들을 안심 시키려는 것으로서 미 국무부 비밀전문에서 한국 측이 미국 측에 전향사실을 설명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1978년 7월 19일자 미국무부 비밀전문에 따르면 한국측은 같은 날인 19일 뉴델리협상이 7월22일 인도주재 북한대표부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알렸다. ⓒ2015 Sundayjournalusa

또 이 비밀전문과 이에 앞선1976년 9월 26일자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살펴보면 억류외교관석방을 위한 뉴델리협상 전모를 알 수 있으며 이 협상은 11월2일전까지 공식회담만 모두 15차례, 비공식접촉은 최소 14차례이상 진행됐고 당초 북한은 외교관 1명당 한국내 북한간첩 70명의 비율로 교환을 제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1978년 9월 26일 미국무부에 보고한 ‘베트남억류 한국외교관-뉴델리협상’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서울 8578]에 따르면 공로명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은 같은 날 아침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뉴델리협상전반에 대해 설명하고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명시돼 있다.

이 전문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1978년 6월 뉴델리협상 제안을 처음 받았으며 이 전문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이 협상은 프랑스정부가 중재에 나선데 따른 것이다. 이 전문에서 공국장은 회담의제만을 정하는 예비회담에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며 북한측은 회담명칭을 ‘베트남의 한국인과 한국에 억류중인 남조선 혁명전사에 관한 토론’으로 정하자고 주장했으나 공국장은 외교관을 마치 간첩으로 보는 듯한 이같은 명칭에 반대했다고 전하고 있다. 공국장은 이 예비회담에서 남북한과 베트남등 3자는 회담의제로 교환비율, 대상자이름, 교환절차등 3가지로 정했다고 밝혔다.

공국장은 현재까지, 즉 주한미국대사관에 협상내용을 설명한 시점인 9월 26일까지, 7월 24일을 시작으로 공식회담13차례, 비공식접촉 14차례등 27번의 접촉이 있었고 북한과 베트남이 한국대표단 대표가 차관급이어야 한다고 주장, 외교부차관을 역임한 뒤 스웨덴 대사에 임명된 윤하정 차관이 대표가 된뒤에야 회담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 한국정부가 이들 외교관중 1명이 북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전향서에 서명했다고 미국측에 통보했음은 사상 처음 밝혀지는 것으로 적지 않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2015 Sundayjournalusa

공국장은 윤차관은 4차회담 때까지 대표를 맡았고 그 뒤에는 이범석 주인도한국대사가 대표를 맡았다고 밝혔다. 다른 미국무부 비밀전문에 따르면 북한측 대표는 이른바 한국의 국정원격인 통일전선부 부부장 조명일로, 조가 차관급임은 한국정부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은 한국대표의 격을 자신들과 동급인 차관급으로 요구했고 5차회담 때부터 이범석 인도대사로 양해가 된 것이다.

국제관례 교환비율 적용 북 간첩 교환 요구

이 회담에서 북한과 베트남이 교환비율은 국제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한국도 동의하자 북한은 1970년 브라질의 선례를 따르자며 외교관 1명당 한국에 체포된 북한 간첩 70명꼴로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브라질의 선례란 브라질 게릴라에게 납치됐던 주요국 대사와 공사등의 석방교섭때 브라질정부와 게릴라간 맞교환 비율을 말하며 스웨덴 공사 납치 때는 1:70, 독일대사 납치 때는 1:40, 미국대사 납치 때는 1:15, 또 다른 외교관 납치 때는 1:4등의 비율이 적용됐다.  1970년 사례란 스위스공사 석방 때 비율 1:70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정부는 북한이 브라질의 선례를 언급함에 따라 북한의 요구가 70명에서 40명, 15명, 4명등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협상에 임한 것으로 추측된다. 즉 70명이 안되면 몇 명을 주장할 것인지가 그 선례를 통해 예견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대용공사나 이종찬 전 국정원장등을 인용, 북한이 억류외교관 석방대가로 북한 간첩 5백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외교관 1명당 150명의 석방을 요구했다는  보도나 다큐멘터리가 잇따랐으나 실제 북한의 첫 제의는 이처럼 브라질의 선례를 따라 외교관 1명당 70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이다.
북한의 1대70의 맞교환을 요구한 반면 한국은 1대1 맞교환을 주장했고 양측은 9차회담까지 한치의 양보도 없이 각자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 같은 교착상태에서 먼저 손을 든 것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8월 24일, 한국이 1대1 교환비율을 양보한다면 드라마틱한 제안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고 8월 30일 열린 10차회담에서 한국이 1대1교환을 철회하자 북한은 1대40을 제안했다. 이미 브라질의 선례에서 보았듯 1대70제안이 거부되면 독일대사 석방때 적용됐던 1대40을 주장할 것이란 한국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제안을 거부하고 역으로 1대2 교환을 제의하자 북한이 회담을 중단하고 평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

1대7 합의 됐으나 베트남 북한 갈등으로 무산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9월 13일 베트남이 전면에 나섰다. 이날 비공식접촉 때 베트남측은 ‘한국이 9월17일까지 전향적인 새 제안을 하지 않으면 북한대표단은 평양으로 돌아갈 것이며 한국외교관 석방은 북한동의하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현 회담체제를 통해서만 외교관 석방이 가능하다’고 한국측을 압박했다.
한국측은 이때 제안을 사실상 최후통첩으로 판단하고 대표단을 소환, 회의를 거듭한 끝에 베트남이 정한 회담시한을 넘긴 9월22일 회담을 제안했고 이날 회담 때 1대2에서 다소 양보한 1대4를 제안하며 마지막 오퍼라며 북한을 압박했다.

여기까지가 9월 26일까지의 상황이며 그 이후 11월2일까지의 상황은 다시 11월 2일자 전문에 설명돼 있다.
9월 22일 한국 측이 최종제안을 한 뒤 다음 회의는 10월 11일에 열렸으며 북한은 한국이 획기적 제안을 하지 않는다고 항의한 뒤 이번에는 느닷없이 브라질 선례가 아닌 1973년 멕시코에서 미국외교관 석방 때 적용한 1대 30 비율을 따르자고 주장했다. 5차회담 때부터 윤하정 외무부차관을 대신해 대표를 맡았던 이범석인도대사는 브라질의 선례에 따라 북한측이 1대15를 제안할 것으로 예상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북한은 갑자기 멕시코 선례를 내세우며 1대30을 주장한 것이다. 이대사는 멕시코선례를 따르자는 제안에 놀라움을 표하며 1대4에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다시 전달했고, 그후 수차례 비공식접촉이 있었고 만약 한국이 1대5를 제안하면 북한이 1대15로 비율을 내릴 것인지에 대한 탐색이 계속됐습니다.

▲ 이 회담에서 북한과 베트남이 교환비율은 국제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한국도 동의하자 북한은 1970년 브라질의 선례를 따르자며 외교관 1명당 한국에 체포된 북한 간첩 70명꼴로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2015 Sundayjournalusa

그뒤 회담은 약 열흘뒤인 10월 31일에 열렸다. 이때 북한은 한국이 1대4를 철회하면 북한은 1대15를 제안할 것이며 만약 한국이 1대5를 제안하면 북한은 더 낮은 비율을 제안하겠다고 밝혔다. 이 전문에서 공국장은 한국이 1대5를 제안할 경우 북한은 1대11을 제안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미국측에 설명한 것으로 돼 있다.
공국장은 밀고 당기는 협상끝에 교환비율은 1대7 또는 1대8로 종결될 것이라는 예상을 미국측에 전했고 11월2일까지 결국 공식협상이 15차례 진행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교환비율은 이 전문이후인 1979년초 결국 1대7에 최종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79년이후 베트남과 중국과의 갈등에서 북한이 중국편을 들자 베트남이 진노하고 북측을 불신하게 되면서 이 합의는 교환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스웨덴정부의 중재노력 등에 힘입어 이대용공사 등은 1980년 4월 11일 극적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