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성공한인스토리5] 윌리엄 박의 ‘모든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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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인가. 한 때 이 말은 무일푼으로 미국에 건너와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의미했다. 지금도 그런가? 물론 어느 정도의 경제적 성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하기에는 한인들도 어느 정도 풍족한 삶을 미국에서 살고 있다. 즉 더 이상 경제적 성공만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2015년을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인가. 칼로 무를 베듯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는 몇몇 한인들을 통해 이 시대의 아메리칸 드림을 어렴풋이나마 정의해 볼 수 있겠다.
미국 금융권에서 모기지 업계의 제왕으로 불리는 윌리엄 박(58) PMAC 회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한인사회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사이긴 하지만 그는 미국 금융권에서는 이미 유명인사다. 달랑 5불을 들고 미국에 건너와 30년 만에 사회적,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경제적 성공이라는 수식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박 회장에게 있다. 그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시대의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가를 그려 볼 수 있다. 박 회장은 그동안 언론노출에 인색했다. 간혹 취재원으로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가 오랜 시간 기자와 마주 앉아 인터뷰 한 전례는 없었다. 그런 그가 <선데이저널> 창간 33주년과 지령 1000호를 기념 기획보도 (성공 10인) 인터뷰 요청을 어렵사리 받아들였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윌리엄 박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 위해서 그가 어떻게 거부(巨富)가 되었는지를 빼놓는 것은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일이다. 그의 떳떳한 성공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현재 박 회장이 대표로 있는 PMAC은 미국 전체에서 10대 모기지 서비스 업체로 평가받고 있다. 연 대출 규모만도 70억 달러에 이른다. PMAC는 한인을 비롯, 아시안과 히스패닉, 백인 등을 상대로 주택융자를 전문으로 하고 있으며, 프레디맥과 패니매와의 라이선스 체결로 인한 모기지 서비스를 하고 있다. 한인이 운영하는 회사지만 사실상 미국 주류 회사와 같은 인정을 받고 있다. 윌리엄 박 PMAC회장은 최근 시애틀에 있는 한인은행 유니뱅크에 2600만 달러를 투자해 한인 금융권의 관심을 받았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듯, 박 회장이 이런 성공을 거두는 데도 다른 성공 한인들과 특별하게 다른 특이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했던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창의성과 발상의 대전환

박 회장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84년의 일이다. 그는 1957년 12월 25일에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 회장의 삶은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또래들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대학에 다니고 싶어, 대구상고 졸업 후 공군하사관으로 곧바로 입대해 돈을 벌었다. 그는 사령관상을 받아 그 보직으로 대구로 발령받을 수 있었고, 대구 발령 후 야간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다. 대구대학에서 야간 과정 3년을 수료한 그는 1984년에 달랑 5불짜리 한 장을 주머니에 넣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는 미국에 처음 넘어와 상고 출신이라는 자신만의 장기를 살려 CPA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야간대학에 등록했다. 뿐만 아니라 스왓밋에서도 막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또한 밤에는 CPA 시험 준비를 했고 20년 전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CPA 취득 후 곧바로 회계사 사무실을 오픈했는데, 어떻게 하면 당시 회계사들의 업무와 차별화 된 업무를 할 수 있을까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고민 끝에 박 회장은 어카운팅 업무를 하기보다 어카운팅 회사를 운영해주는 풀타임 마케팅 매니저를 영입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단 눈을 히스패닉 커뮤니티로 향했다. 히스패닉이 밀집된 6가와 알바라도 지역에다 사무실을 차렸다. 사무실을 개업한 후에는 박회장은 직업이 회계사가 아니라 회계업을 하는 비즈니스맨이라고 생각했으며, CPA사무실로는 유례없는 풀타임 마케팅 매니저를 고용했는데 개업 후 2년 만에 200개가 넘는 비즈니스를 유치했다. 이처럼 비즈니스 영역을 코리아타운을 넘어 히스패닉 지역으로도 2개의 Income Tax센터를 개설했다. 그는 매니저에게 ‘한 달에 500 달러짜리 고객을 확보하라’하라며 훈련을 시켰다. 무턱대고 고객을 몰고 오라고 다그친 것이 아니라 매주 수~금에 2~3시간 단위로 교육을 시키며 선순화 구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일부 히스패닉들에게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한 것도 많았다.
CPA로서 자리 잡은 후에는 좀 더 창의성 있는 비즈니스를 구상했다. 그 때 시작한 것이 부동산이었다. 다만 그 고객이 달랐을 뿐이다. 박 회장은 주위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10만 달러로 부동산 회사 설립해, 12027 Paramount Downy에 빌딩을 구입했다. 1만 스퀘어 피트의 5개 유닛을 리모델링하여 30개 방을 만들었다. 그는 에이전트를 대상으로 세일즈를 했다. 에이전트가 고객이라는 발상이었다. 이곳에 전국 최고 세일즈 에이전트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만 해도 일반적 브로커는 에이전트가 100명이라도 방은 2개로 공동 쓰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박 회장은 우수 에이전트에게 1인 사무실을 제공하는 한편, 능력 있는 에이전트를 키우고 훈련시켰다. 신용을 쌓기 위해 톱 에이전트라도 약속을 안 지키면 해고했다. 이렇게 하자 능력 있는 에이전트들이 몰려들었다.

 

마닐라에서 찾아온 기회

 

 

 그 후 모기지 서비스 회사를 하면서 2007년에 필리핀 마닐라에 오퍼레이션 오피스를 설립했다. 이 마닐라 사무실이 대박을 터뜨리는 효자가 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당시 미국 모기지 업체는 ‘홀 세일 렌더’ 들에게는 시간과 서비스 경쟁이 핵심이었다. 당시 웰스 파고 은행 등에서 융자 결정은 적어도 한 달 정도 소요됐다. 서류 작성에만도 많은 시일이 걸렸다. 하지만 박 회장의 사무실은 48시간 내에 모든 절차를 끝냈다. 이를 위해 박 회장은  4년간이나 마닐라 사무실 요원들을 훈련 시켰다.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가장 영어를 잘 사용하는 나라였다. 대졸 학력들을 잘 활용하면 미국의 대학 졸업자 비슷한 능력을 발휘했다. 반면 인건비는 미국에 비해 훨씬 저렴했다. 초창기 마닐라 사무실의 인건비는 월 200달러에 불과했다. 현재는 1000달러 가까이 인상됐지만, 같은 업무를 하는 미국 현지 인력에 비해 1/4 정도로 인건비가 저렴했다. 그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해서 발생하는 비용을 고객에게 돌려줬다. 박 회장의 고객에 대한 모기지 서비스는 비슷한 회사와의 경쟁에서 훨씬 탁월했다. 이같은 박 회장의 전략에 홀세일 렌더들이나 미국인들도 놀랐다. 이렇게 회사를 키운 박 회장은 2012년 월스트릿에서 펀드 레이싱을 하기 위해 프리젠테이션을 했는데 오히려 골드만삭스 등 10여개 기업에서 인수 제의를 받게 될 정도로 튼실한 회사로 성장했다.

이처럼 박 회장은 같은 일을 하는 경쟁자가 많은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만들었다. 비슷한 경쟁자들이 많은 상황에서 약간의 차별화만 시킬 수 있어도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을 활용했다.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하고, 비용을 절감하고, 직원들을 잘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관심사였다. 그가 미국 주류 사회에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들이다.
아메리칸 드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얘기할 때 경제적인 부분에 치중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가정을 가지고 있다면 꿈을 이뤘다고 할 수 없다. 박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 당시 박 회장에게도 큰 위기가 찾아왔다. 회사 문을 닫을 생각도 있었다. 이 때 용기를 준 것이 가족이다. 박 회장의 아내 박수미 씨는 박 회장에게는 가정을 지켜주는 정신적 지주이자 비즈니스 동반자다. 박 회장의 아내는 서브프라임 사태 때 ‘당신은 해낼 수 있다’면서 자녀들의 적금까지 취소하면서 자금을 모아 주었다. 특히 위기에 빠진 새한은행 증자 시 예상과는 달리 투자자가 한 명도 없이 박 회장이 혼자 감당 했을 때도 아내를 그를 위로하고 힘을 줬다.
물론 그의 아내 역시 박 회장의 결정에 찬성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 회장이 마닐라에 사무실을 설립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말린 것이 그의 아내였다. 하지만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닐라 사무실이 성공하자, 이후로는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현재 박 회장의 아들 박현욱 씨는 코넬 대학 졸업 후 현재 MBA 과정을 준비하면서, 박 회장을 돕고 있다. 딸 박현조 양은 현재 10 학년 재학 중이다. 박 회장은 기업을 일궈나가면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의 위대한 힘

 

 

 박 회장이 최근 한인사회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시애틀 유니뱅크 지분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는 새한은행과 태평양은행, 한미은행 등 여러 한인은행에 투자해왔다. 여기에 더해 유니뱅크 지분까지 확보하자 그 배경에 대해 한인사회가 궁금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선데이저널>과 인터뷰에서 그 이유에 대해 “미국의 웰스 파고 은행을 뛰어넘는 한인계 은행을 창출하기 위해서 유니뱅크에 투자했다”며 “은행을 통해서 모기지 융자를 본격적으로 할 계획이다”이라고 밝혔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로 모기지만을 위한 은행을 설립하는 것보다 기존 은행 내에서 모기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박 회장의 판단이다. 박 회장은 “은행의 포트폴리오를 커머셜론에만 집중하지 않고 더 큰 마켓이라고 할 수 있는 모기지로 확대할 만한 탄탄한 은행을 지난 몇 년 간 계속 물색하여 왔다”면서 “이번에 그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에 과감한 변신을 꾀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유니뱅크가 현재는 워싱턴주에 있는 조그마한 은행이지만, 은행이 성장하기 위한 두 가지 요소를 갖췄다고 보고 있다. 하나는 성장을 위해 기득권마저 내려놓겠다는 이사들의 결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만한 규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최근 한 한인언론에서 ‘박 회장이 유니뱅크 투자와 별개로 자산규모 2억 달러 정도의 비한인 은행을 인수할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 박 회장은 한마디로 “금시초문” 이라고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박 회장은 오는 21일로 예정된 유니뱅크의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참여 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사로서 참여할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향후 합의에 따라 유니은행의 가치를 높이고 균형 있는 발전을 할 수 있도록 이사로서의 책임을 다할 생각”이라며 “향후 은행투자나 인수합병(M&A)등은 유니뱅크를 통해서만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실 박 회장이 모기지 상품을 키우기 위해 은행에 투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새한은행 위기 때 680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태평양 은행에도 210만 달러를 투자한 바 있다.  한미은행 이사도 같은 이유로 역임했다. 하지만 한인은행이 주택 시장에 대해 크게 치중하지 않는 점에 실망감을 느껴왔다. 하지만 모기지 상품을 늘려야 한다는 그의 소신에는 변함이 없었고, 유니은행이 여기에 적합한 은행이라고 생각해 과감하게 투자를 한 것이다.
박 회장은 웰스 파고 뱅크 같은 은행을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 투자와 유능한 인재 영입 그리고 효율적 인수합병이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사들이 주주들에게 이익을 안겨다주는 방향으로만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행장에 대한 평가 역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이뤄지는 양심적인 이사들의 자세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두루 고려할 때 그는 새한은행이나 태평양은행 한미은행 등에서 이사회를 컨트롤 하는 것보다 적합한 은행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다.
억대의 거부인 박 회장은 남들처럼 변변한 부동산 하나 소유하고 있지 않다. ‘편히 잠잘 곳 하나면 족하다’는 생활철학만큼이나 소박하다. 현재 살고 있는 다이아몬드 바의 5백만 달러 상당의 주택과 팜스프링스의 골프장과 다우니 소재 회사 건물이 전부다.
‘부동산 투자는 죽은 돈’이라며 ‘투자와 투기는 다르다’라고 강조하는 박 회장의 모습에서 미래에 대한 대담하고 독창적인 금융문화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 본다.

윌리엄 박 회장이 대표로 있는 PMAC은 지난 7월 대형 글로벌 사모펀드 운영사인 블랙스톤(Blackstone) 그룹 계열 Finance of America Holdings에게 약 2억 달러(업계추산) 정도의 가격으로 매각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PMAC와 블랙스톤은 지난 7월 16일 블랙스톤의 모기지 업체 계열사인 ‘파이낸스 오브 아메리카 모기지’(FAM)가 PMAC의 일부 자산과 직원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양사 합의에 따라 인수가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2억 달러 규모 내외로 추정하고 있다. 계약은 현재 진행되고 있으며 인수가에는 현금 외에 블랙스톤의 주식과 노트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매각은 PMAC의 대출 포트폴리오와 지사, 직원 등을 포함하지만 PMAC 이름과 ‘모기지 서비스 라이선스’(MSR)는 윌리엄 박 회장이 계속 소유하는데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박 회장 이 추후 모기지 대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 놓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같은 매각규모는 한인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매각규모로는 역대 최대 규모 중 하나다. 한인이 운영하는 전통적 비즈니스 가운데 이 정도 거액의 매각을 추진하는 것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인금융업체 중에는 박 회장의 PMAC가 처음이다. 과거 의류업의 포에버 21, 부동산의 제미슨 프로퍼티 서비스 에 이어 전통적 비즈니스 분야에서도 한인 기업의 파워를 과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그만큼 미국 주류 업계에서 박 회장의 PMAC의 기업적 가치와 역량에 대해 전폭적으로 인정 했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같은 박 회장의 PMAC가 매각되면서 같은 모기기 업체들은 이번 매각 진행과정에 깊은 관심을 보내고 있다. PMAC의 매각이 예정대로 잘 마무리된다면 모기지 업체에 좋은 선례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인들이 운영하는 타 모기지 업체들도 비슷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현재 한인이 운영하는 모기지 업체는 홀세일 기준으로 15개 정도(중소 모기지 업체까지 포함)로 알려지고 있다.
한인 모기지 업체의 한 대표는 “동종업계에 일하는 사람으로서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충분한 동기부여가 된다”며 “PMAC의 매각은 한인 운영업체라도 주류 업체들과 당당히 경쟁하면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인 업체가 좋은 가격으로 매각된 예는 지난해에  LA에 본사를 둔 색조전문 화장품 기업 ‘닉스 코스메틱’을 설립한 한인 1.5세 여성 토니 고 씨가 프랑스의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인 로레알에 5억 달러에 매각된 것이다. 또한 2000년대 초 닷컴 붐이 한창일 때 한인이 설립한 마이사이먼 닷컴 이 7억 달러에 매각되고, 자일랜, 유리 시스템 스 등 IT업체들이 거액에 매각되기도 했지만 전통적 비즈니스가 1억 달러가 넘는 가격에 매각된 사례는 드물었다. 의류업체 가운데 아메리칸 어패럴 (창업주 샘 임)이 2억4000만 달러에 매각됐었다.

윌리엄 박 PMAC 회장은 지난 2010년 9월 PMAC 렌딩서비스라는 모기지 회사의 CEO를 맡은 이래, 이 회사를 미국에서 가장 큰 주택모기지 홀세일업체의 하나로 성장시켰다. 이 모기지업체의 전체 자산은 무려 53억 달러에 달한다. 자산으로만 따진다면 은행을 포함한 한인금융기관 중에서는 2, 3위에 달하는 규모다. 그는 또 숙박업계, 부동산업계, 은행업계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남부 캘리포니아지역에서 히스패닉계 부동산회사로는 가장 성공한 것으로 알려진 ‘포스트 패밀리 홈’, 즉 예전에는 ‘센트리21’로 잘 알려진 부동산중개회사를 1997년에 설립,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등 부동산과 모기지업계의 신화다. 그는 또 2014년 4월부터 12월 31일까지 한미은행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지난 2001년 PMC BANCORP라는 금융기관을 직접 설립, 2010년까지 행장을 맡기도 했었다. 2013년 2월 21일 리버사이드카운티의 골프장을 인수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골프장은 ‘인디언 팜스 컨트리 클럽’으로 리버사이드 인디오에 위치해 있다. 또한 박 회장은 현재 팜스프링스 인디오 소재 인디언 팜스 컨트리클럽과 멕시코  관광지 마자르탄에 호텔 등도 운영하고 있다. 앞으로 운송계의 전망을 고려해 트러킹 회사도 운영하고 있다. 박 회장은 <선데이저널> 기자와 만나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는데,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중 일부다.

▲ 맡은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한인들이 이같은 기업들을 만들기 위해서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비즈니스 성공과 글로벌 기업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보다 열정과 창의성이 가장 중요하다.  열정은 사명을 가졌을 때까지 하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성공하기에 부족하며, 여기에 독특한 것이 필요한데 바로 창의성이다. 사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선택은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선택을 넘어서는 또 다른 방법이 반드시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창의력과 그것을 아이디어로만 묶어두지 않는 행동과 열정이 있다면 누구라도 가능하다. 만약 어떤 것이 좋으냐고 물어 온다면 어떤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부터라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다. 그래서 매일 매일 생활에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 박 회장이 강조하고픈 ‘아메리칸 드림’은 어떤 것인가?

– 제가 생각하는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 되었든 한국이 되었든 나름대로 보람된 삶의 모양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그것이 ‘드림’이 아닐까.  그 삶의 가치는 자신의 매일 매일 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결국은 제 자신의 삶의 꿈을 제가 정하고 그 것을 어떤 형식으로든 만들고 발견하는 가운데 ‘아메리칸 드림’ 또는 자신의 드림을 이루는 것이다.

▲ 박 회장의 롤 모델이 있다면?

– 어린 시절에는 큰 형님이었고 살아가면서는 아버님이다. 어릴 때 힘든 시절에 어떤 일에 부딪쳐서 한계가 왔다고 생각돼도 걱정을 별로 안 했다. 그럴 때면 저는 항상 ‘만약 큰형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큰 형님이 그 일을 해내는 과정을 상상해봤다.  나이가 들고 아버지가 되면서 그 시절 혼자서 노동으로 우리 열 식구를 양육하기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한다. 주말 없이 일하시다가 일 년에 명절 때 두 번 시골에 가셔서 하루 종일 잠만 주무시는 아버지가 그때는 원망스러웠는데, 나중에 이를 이해하게 됐다. 지금은 평생 넘어설 수 없는 거인이다.

▲ 가정에 대한 애착이 많은 것 같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즈니스를 핑계로 가족이 등한시 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나는 일을 핑계로 가족들과의 시간과 관심을 놓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저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다만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더 큰 가족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회사를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이 한 가족이며, 또 사회라는 큰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

▲ 남은 인생에서 도전하고픈 목표나 사명은 무엇인가?

– 인생의 목표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온전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며 그 기업이 은행이든 다른 분야의 기업이든 돌아봤을 때 ‘반듯하다’는 평가를 받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민 1세로서 후세에 남을 기업을 물려줘서 후세들이 더 키울 수 있는 기업이나 사업을  이 나라에 하나 남기는 것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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