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노익장의 언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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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LA한인사회에서 현역 언론인으로 뛰고 있는 ‘노익장 3총사’로 불리는 80대인 김운영(84) 뉴시스 LA특파원, 최창준(83)KBC-TV 사장 그리고 또 한사람 70대 언론인 정진철 (75)Glin-TV 인터넷 방송사장이다. 한인사회 단체 인사들은 김운영 특파원이나, 최창준 사장이나 그리고 정진철 사장 이 행사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모습에 감탄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들 세 명의 노익장은 젊은이들도 힘들어 하는 카메라와 TV 영상 취재를 쉼 없이 해내고 있다. 이들의 언론인 생활도 30년에서 50년에 이르고 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김운영(84) 뉴시스 LA 특파원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는 글 자막과 함께 태극기를 든 두 손을 번쩍 쳐든 고상돈(작고)의 에베레스트 한국인 최초 등정 사진의 주인공이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김운영 뉴시스 특파원이다. 에베레스트 등반 사진은 김 특파원의 특종사진 가운데 하나다. 당시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8848m)에서 고상돈이 소리친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의 목소리는 전 국민을 열광시켰고, 유신 말기에 암운을 뚫고 날아든 에베레스트 정복 낭보는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과 열정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 당시 김 특파원은 ’77 에베레스트 등반대’의 한국일보 소속 사진기자였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는 글 자막과 함께 태극기를 든 두 손을 번쩍 쳐든 고상돈(작고)의 에베레스트 한국인 최초 등정 사진의 주인공이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였던 김운영 뉴시스 특파원이다. 에베레스트 등반 사진은 김 특파원의 특종사진 가운데 하나다.

원래부터 산을 좋아 했던 김 특파원은 2001년 미국에 이민한 이후로도 이곳 산악인들과 산을 타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년전부터 한국의 뉴시스(Newsis)통신사의 LA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다시금 그의 사진이 국내 언론사 지면을 화려하게 꾸며주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김 특파원이 화려한 전문 사진 경력의 소유자인지를 모른다.

김 특파원은 요즈음은 LA한인사회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사건 소식 중에서 국내 동포들이 알아야 하는 장면들을 취재해 보내준다. 이를 위해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건을 취재한다. 옛날 젊은 시절 사진 기자처럼 지금도 ‘번개처럼’ 여기저기를 누비며 청춘열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카메라는 사람의 마음을 찍어내는 기계’라며 셔터를 누른 김 특파원의 사진은 다른 기자들의 사진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마치 빛나는 물방울처럼 다이아몬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 사진작가는 평가했다.

김 특파원은 최근 히트를 친 영화 ‘히말라야’를 다른 관객들과는 다른 감회로 감상했다고 한다.

우선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엄홍길 대장을 비롯해 산에서 숨진 박영석 대장 등등 산악인들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산악김운영인들이 원정 갈 때 함께 가기도 했다.

대부분 관객들은 영화 속 장면이 히말라야 인줄 알지만 김 특파원은 히말라야에서 취재기자로 살았던 전문인이라 일부 장면은 프랑스의 몽불랑 등이 나와 “느낌이 달랐다”고 했다.

그는 지난 2007년 4월1일 한국 에베레스트 등정 30년을 맞아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산악인 합동 천도재에 어려운 걸음을 하여  현지에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었다. 그는 1971년 로체 샤르부터 75년에베레스트 정찰, 76년 마나슬루, 77년 에베레스트 정복, 79년 매킨리까지 한국 해외원정 등반 초기, 울고 웃어야 했던 대부분의 현장을 지키며 카메라에 역사의 현장을 담았던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77년 에베레스트 원정 때 김운영 특파원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한국일보 보도대원으로 역사의 현장을 기록했다. 당시 그는 나이로 치면 원정대의 둘째형이었지만 그저 문약한 ‘펜’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김영도 대장은 김운영특파원을 두고 “기자라기보다 대원 이상의 역할을 하는 산악인 이었다”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30년 만에 히말라야를 다시 찾았으니 마음이 어떠했으랴. 등정 30주년 기념식 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트레킹을 다녀온 그는 당시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찬 모습이었다.

“에베레스트의 ‘용안’을 한번 뵙고 싶어서 칼라파타르까지 올라가려는데 너무 날씨가 나빠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만 돌아내려왔습니다. 이제 다시 가 볼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좀 아쉽지요. 77년 당시에는 베이스캠프까지 한 달 여 상행카라반을 했었는데, 이번에 6일 만에 올라가게 되니 세상이 바뀌었음을 실감하겠더군요.”

그리고 김운영 특파원은 “산이야 변한 것이 없는데 동네는 너무 달라져 옛 모습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며 소회에 잠겼다. 농담 섞인 말로 에베레스트를 ‘용안’이라 부르지만 그 속에는 사뭇 한 시대를 가슴으로 오르고 온몸으로 기록해야 했던 젊은 산악인의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었다.

이제 40여년 전 그와 함께 100일간의 장정에 올랐던 젊은 대원들도 이제는 대부분 백발에 주름살이 깊어졌지만, 아직도 그의 가슴에는 주마등처럼 스치는 푸릇한 얼굴 하나가 남아있다. 에베레스트 정복 때 함께 산을 올랐고, 다시 2년 후 79년 그와 함께 앨라스카 디날리(매킨리)를 오르고 하산 길에 추락한 고 고상돈 대원이었다.

“산은 오늘도 변함이 없는데 우리 주위는 변하네요”

최창준(83) KBC TV 사장

최창준 사장은 올해로 TV카메라를 잡은 지 33년이 된다. 30여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KBC 한국어 방송 프로그람을 시작해 오래전 LA로 이주해 방송활동 이외에 커뮤니티 활동에도 정열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16기 LA평통의 활약상 영상은 모두 최 사장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6.25 전쟁참전 유공자로서 전시사관학교인 육군종합학교미주전우회LA(회장 정용봉)에서 6.25사진전시회 분과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올해도 4차로 6.25사진전을 기획하고 있다.

그는 재미남가주이북도민총연합회장 활동 당시에 남북통일 기원 ‘망향제’를 개최해 실향민들의 한을 풀어주기도 했으며, 평소 탈북자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아 탈북자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쉼없이 하여왔다.

최창준

한편 그는 미국 내 실향민들의 이산가족상봉 사업을 위해 남들이 하지 못한 데이타베이스 작업도 진행하고 있으며 현재 일천만 이산가족 위원회 미주홍보국장으로서 미주 한인 이산가족들을 대상으로 20분 분량의 영상편지 제작에도 힘쓰고 있다.

한국의 통일부는 이산가족의 신상정보와 사연, 유언 등을 담은 동영상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 북측 가족에 전달하고 금강산에 설치될 이산가족 면회소에 비치하기로 했는데 미주 한인 이산가족들의 동영상 사연도 통일부 데이터베이스화되도록 제작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영상편지는 이산가족의 신상정보와 헤어진 사연, 가족 편지와 유언 등 20분 분량으로 제작된다. 통일부 이산가족 정보통합시스템에 따르면 이 영상편지는 이산가족의 생전 모습을 영상에 담아 기록, 관리하고 향후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측과 합의 후 북측 가족에게 전달하거나 금강산에 이산가족 면회소가 건설될 경우 면회소에 비치될 예정이다.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제작하는 영상편지 데이터베이스는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라면 제작신청은 누구나 가능하나 이전 제작자는 제외된다.

그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6.25전쟁 당시 고등학생이 그는 군에 입대하여 1951년 2월 10일 육군 소위로 입관해서 전방에서 근무했다. 육군 대위로 6년 근무하고 제대했다.

제대 후 유엔군 산하 ‘자유의 벗’에서 근무하면서 월남 전쟁에 종군기자로 취재차 한 달 동안 전선을 누볐다. 종군 기자로 한 달 동안 전 전투지역을 취재하면서 어느 지역은 가면 그날 밤에 죽을지도 모를 전시상황, 상당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취재하면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미국 이민 오기 전 서울시에서 사진 콘테스트가 있었는데 그가 출품한 작품으로 4가지의 상을 받았다. 월남 전투에서 취재한 경험도 살린 것 같다.

1976년 미국에 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말 TV 방송을 처음하게 됐다. 공중파 TV 방송을 이용했다.

당시 LA에서는 KTE방송이 일주일에 1시간 방송하는데 그는 공중파로 매일 1시간씩 방송했다. 주말에는 2시간 방송으로 당시 미주 지역에서는 제일 많은 시간을 공중파 방송을 했다.

그 당시에는 뉴스를 LA에서 속달로 받아다가 한국 뉴스를 방송했으며, 또 현지 프로그램도  많았다. 대담프로와 행사보도가 중점이었다. 그 당시 본국의 드라마는 전혀 방송하지 못했다. 현지 프로그램 제작이 우선이었다. 기자와 방송 요원이 여러 명 있어서 그래도 제대로 된 방송을 했다. 왜냐하면, 본국 뉴스만 받아서 방영하고, 나머지는 현지 제작이었다.

3년쯤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송하다가 LA로 이주해 인터넷 방송을 계속 했다. 1983년도부터 컴퓨터를 만지기 시작했다. LA에서는 인터넷 방송을 했는데 직접 비디오를 취재해와 편집해서 DVD만들어서 방송국으로 보내 준다. 이렇게  83년도부터 현재까지 케이블 TV, 인터넷 방송 등 33년간 방송에 몸담고 있다.

최창준 사장은 최근 한국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위대한 인물대상 선정위원회가 주는 방송대상 (해외부문)을 수상했다.

정진철(75) Glin TV 사장

정진철 GlinTV사장은 과거 오랜 동안 신문사와 라디오방송사 경험을 살려 인터넷 시대에 부응하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혁신적인 인터넷 방송 매체 Global Internet TV(www.glintv.us)를 운영하고 있다.

GlinTV는 지구촌 식구들의 의견을 영상이나 댓글을 통해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도록 가교를 틀고 세계적인 토론 광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의 본국 정치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종합해 소통하자는 것이다.

정진철

그는 이 매체를 통해 각종 뉴스와 사회적 이슈를  동시에 세계 곳곳에 보내는 재미로 열심히 영상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한 생방송이 가능한 기능을 십분 발휘해 커뮤니티의 각종 행사를 실시간으로 시청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GlinTV 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 프로는 시사저널 프로그램이다. 국내외 다양한 이슈를 주제로 5분 칼럼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평가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지난 40여 년간의 현직 언론 생활의 경륜을 살려 냉철한 비판의식을 불어넣는다.

최근 그가 내보낸 프로그램 중 국내 좌파세력들의 폭력시위의 부당성,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찰 은거에 대한 ‘사찰은 범죄의 성역이 아니다’와 최근 국내 야당 세력들의 당명 바꾸는 행태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비판한 영상 칼럼은 유튜브에서도 인기를 모았다.

정 사장은 한국에서 중앙고등학교 졸업 하고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외과 졸업 후 1962년에  민국일보 사회부기자로 출발했다. 그 후 1964년에 문화방송(mbc) 보도국 및 보도제작국에 스카웃 되어 활동하다 1970년 괌으로 가서 건축업에 종사하다가 다시 1975년 하와이서 사업을 했다.

그 후 LA로 이주하여 1977년 LA중앙일보 편집국에 입사해 타운 취재 활동을 하면서 편집국장 대리로 근무하다 1983년 에Golden Media-TV PD로 활동했으며 1986년에는 미주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이어 1992년 KCB라디오 근무하다 1993년 미주한국일보 라디오서울 보도담당 부사장과 2008년 한국일보 동부지역 지국장을 지내다 2009년 한국일보 미주본사 몽골지사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저서로는 ‘미국, 그 속 좀 보자구요’ 이 있으며 수상 경력으로는 L.A.시의회의장 시민봉사상 / 연방상원의원 커뮤니티 봉사, 청소년 봉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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