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남-북에서 배척당하고 있는 100세 통일시인 한무학의 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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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어느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을 염원하는 가지지 못한자들의 것

한무학한무학 옹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 시절부터 작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교실 벽마다 장식됐다. 그래서 부지런히 글을 썼다. 보여지는 사물을 글로 표현했고, 머리 속의 그려지는 형상을 글로 나타냈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유학 생활에서도 부지런히 시를 썼다.
그리고 수 십년이 지난 이제도 미국 땅에서 그의 시작품이 그의 LA작은 아파트 방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던 때, 한무학 시인은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당시 조병화 시인도 함께 근무 했다. 그는 “당시 북쪽에 가담해서 일을 했다”며 “저쪽(북한)에 유리하게 활동했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북한 측을 옹호하는 활동을 했다는 의미다. “당시 적극적으로 철없이 활동했다”라고 덧붙인 말은 그 당시는 열성적인 친북 좌파였었다는 설명이다.

자진 인민군 입대 후 체포 포로생활

그는 6.25 전쟁 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전쟁이 발발 직후 자진 월북하여 황해도 사리원에서 북한 인민군에 입대한다.  입대하는데 간단한 시험이 치러졌다. 그는 인민군에 배속된  정치장교들을  보좌하는 사병으로 뽑혔다. 하루는 그들 장교들의 시중을 들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됐다.
한 정치장교는 자신은 ‘훌륭한 부호집의 식모로 있는 사람의 자식’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다. 또 한 중공군 정치장교는 자신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새우고 있었다.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은 한무학은 속으로 ‘내가 이곳 사회에 잘못 들어왔구나’라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입대한 그로서는 달리 선택이 없었다. 당시 인천상륙 작전 (9.15)으로 전세가 역전된 상태 에서 그의 부대는 소위 ‘신계전투’ (1950년 10월 14일-16일)에서 유엔군에게 박살이 나버렸다. 그는 유엔군의 포로가 되었다. 어느날 석양이 지던 때였다. 유엔군 부대가 30여명 정도의 인민군 포로를 끌고 가다가 어느 산기슭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난사했다. 끝줄에 서있었던 그는 총소리에 놀라 기절했다.
며칠이 지난지 모르지만 깨어보니 주위에 동료 인민군들의 시체들이 늘비했다. 살아서 정신을 차린 그는 ‘북쪽으로 가야하나?’ ‘남쪽으로 가야하나?’로 고민했다. 북쪽으로 가면 이미 북진하는 유엔군을 만나게 될 것 이란 생각에 남쪽으로 향했다.

1956년에 발간된 그의 한무학 제2시집 <지진에 떠는 기상대>에 수록된 <젊은 전사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의 모순>이라는 시는, 그가 ‘신계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다. 당시 전투와 총살현장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려웠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무학 시인은 ‘신계전투’에서 자신과 포로를 집단 처형하고 북진한 유엔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 하는가 대한 그의 대답은 놀라울 정도로 표현도 간결했다.
“전쟁 중인데 어떻하겠어. 북진하는데 포로로 잡은 인민군을 데리고 가는 것이…불편했겠지?”
이처럼 한무학 시인이 아무렇지 않게 처럼 툭 던진 대답이었다. 그것이 ‘망각’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전쟁이란 상황을 받아들여지는 것인지….인간의 잔인성이 아니겠는가로 되묻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오히려 질문 자체가 우스웠다.
그는 ‘자진 월북해서 인민군이 되고, 또 포로가 되어 사선을 넘게 되었는데 그 동기가 무엇이었나’에 대한 질문에도 답변도 간단했다. “애초 소련으로 가려고 했지, 인민군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니 어쩔 수 없이 징집이 되 버렸다”
애초 공산주의의 대국인 소련으로 가려고 월북한 것인데 황해도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당하면서 그이 인생은 모진 인생 풍상을 겪게 됐다.

조국은 너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

한무학작품

▲ 한무한 시인 아파트 방에 시가 걸려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남쪽에 살게 된 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그는 <조국은 너의 것이 아니다>라는 시로 쫒기는 몸이 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킨 강토를 총칼로 지배하고 있던 군부독재자에게 ‘조국은 너의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을 서슴치 않고 시로 읊은 것이다.
한무학 시인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조국근대화 캠페인과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통일 논리에 맞서, ‘조국은 박정희 너의 것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을 염원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땅이라고 설파했다. 그리고 남과 북이 진정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조국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시구절에서 <나는 너를, 너는 또한 나를/서로 이렇게 길게 미워해야 한다는 이 부자유를/ 언제까지 나 견디어가야 하는가>라고 지적했다.
당연히 그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쫓기는 그는 당시 S 경찰서장의 도움을 받았다. S서장은 ‘내 관할서 안에서 꼼짝 말고 숨어 지내라’는 말을 듣고 숨어 지냈다. 나중 연세대 데모 진압에 나서는 S서장을 만났는데 그에게 봉투를 주면서 ‘이 나라를 떠나라’고 했다.
계속 숨어 살 수가 없어 연줄연줄로 연결된 최모씨가 나타나 ‘도와주겠다’고 하여 그가 시키는 데로 하루는 모 다방에 나갔다. 그런데 썬글라스를 낀 두 명의 남자에게 이끌려 차량에 테워졌다. 차 안에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다. 정보부 특별 고문실로 보내졌다.
고문실 책상위에는 그의 시집들이 놓여져 있었다. 고문실에서 거의 죽을 정도로 혹독하게 당해 시체가 되기 전에 밖으로 내동댕이쳐젔다. (그를 밀고한 최 모씨는 나중 미국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들은 한무학 시인은 “나를 팔아넘긴 자”라며 “사람의 가죽을 쓴 악마”라고 말했다. 최 모씨는 수년전 북가주에서 사망했다)
1974년에 한무학 시인은 한국을 떠나 워싱턴DC의 한 친지의 도움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10여년 간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시만 썼다. 일부 시는 한국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그는 시인 회원 명단에 이름만 올릴 뿐 그의 주소는 빈자리로 나두었다. 그래서 한국에 있는 많은 문인들은 그가 어디 있는지를 몰랐다.

40여년을 망명 아닌 망명의 미국 삶

92년 LA로 이주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86년 대사면으로 영주권을 받고 지금은 미국 시민이다.
지금도 새벽마다 집근처 놀만디 공원에 한 시간 이상 산책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잔병 이외 큰 병 을 알아본 적이 없다.
매일 시를 써야한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나간다. 누어서도 생각하고, 일어나서도 생각한다. 잊어 버릴가봐 수시로 종이에 적어 논는다.
그래서 월 258달러의 단칸방 시민 아파트 벽에는 온통 시구절을 담은 종이들이 빼곡히 붙여있다.
그가 시를 적어 나가는 삶은 그 자체가 인생살이이다. 코리아타운 인근에 홀로 살면서 철저하게 외부와는 거의 단절한 채 살아가고 있다. 다만 최근 극작가인 이자경(이민역사연구가)씨와 가끔 만나 문학을 토론하고 있다. 이자경 씨는 한무학 시인의 미국 삶을 조명하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는 “한무학 선생님이야말로 이민사회에서 한글로 삶을 조명하고 역사를 만들어 가는 아주 중요한 시인이다”라고 말했다.

한무학 시인은 지난 2007년 재미시인들의 시모음집 시집 ‘물 건너에도 시인이 살고 있었네’ (창조문학사)에 미주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시인 51명과 함께 참여했다. 당시 출간은 시와 시론 전문지 ‘미주 시인’ (대표 배정웅)에서 기획한 것인데, 시집에는 시인들이 스스로 추천한 3편씩의 대표작이 수록 모두 150여편의 작품이 담겨있다. 시집 발간을 주도한 배정웅 씨와 박영호씨는 시집 안에 재미 문인들의 숨결이 담겨 있다며 보람 있어 한다.
미국에서 40여년을 망명 아닌 망명의 삶을 살아온 한무학 시인은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물론 시인의 일본 유학 학창 시절, 그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익사상에 심취 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증언, 또 그의 이후 활동을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좌익 문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대부분의 좌파문학인들은 반미사상 고취와 반대한민국과 북한 찬향인 반면, 한무학 시인은 남북에 대해  서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며 남과 북에 대한 지적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무엇보다 그는 북한의 세습독재에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더군다나 3대째 계속되는 세습독재는 그가 지난날 기대한 북한과는 너무나 다른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예로 금강산 아름다운 바위에 김일성 찬양 글을 새겨 놓는 그런 정권엔 결코 희망이 없다고 했다.
남쪽에 대해선 너무나 외세의존에 실망을 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유 의식 을 지니고 미국에 너무 의존하는 것을 조심하기를 바라고 있다.

한무학 시인은…

1922년 8월 27일 함북 성진(城津)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47년 졸업후 일본 도쿄에서 International Times(국제타임스) 외신부기자, 도쿄 ‘신시풍’서 시작 활동 을 하다가 1948년 귀국해 경기여대-성균관대학교 등 강사, 한국문협회원,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 위원 등을 지냈다. 나중 인천 제물포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제직 중 6.25전쟁으로 북한 인민군에 징집 당해 죽을 고비에서 살아남는다.
박정희 정권 시절 군부독재를 비판한다는 시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죽기 직전 풀려나 친지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1974년에 와서 워싱턴 DC에 거주하다가 1992년에 LA로 이주했다. LA에서 한때 신한민보 주필 겸 고문을 잠시 지내고는 일체 어느 단체와도 관계를 끊고 홀로 시작에만 몰두 해왔다.
1953년 첫 번째 시집 《새로운 초(秒)의 속도》를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초기에는 주로 현실적 인 소재를 채취하여 직관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주력했으나, 세 번째 시집《市民은 목하 入院中 (입원중)》을 발간하면서 부터는 점차 과거의 경향에서 벗어나 사물의 존재성과 그  사물이 처한 입지적 상황을 관념적으로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주요 작품으로 <별이 뜨지 않는 강물> <파고다 공원> <너와 나의 의미> <새로운 초의 속도> <‘지진에 떠는 기상대> <시민은 목하 입원중> <북남서동> <강 없는 가교> <역사도 울고 넘는 아리랑 고개> <조국은 너의 것이 아니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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