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에 나지 않은 숨은 1인치 기사] 새누리당 피의 보복숙청 공천 대학살 막전막후

■ 김무성-유승민-이재오, 朴과 대립각 인사들 절체절명 위기

■ 朴 눈과 귀까지 막은 문고리 3인방, 드러내놓고 비박 배제

■ 새누리당 공천, 유신 때와 같이 청와대에서 공천 좌지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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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과 십상시에 찍힌 인사들
죽음을 못 면했다’

4월 13일 벌어지는 본국 총선의 대진표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두 거대 정당의 공천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당내 경선을 통해 선출된 대표가 하나 같이 힘을 쓰지 못하고 사실상 제 3자에 의해 공천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의 경우 김무성 대표는 거의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청와대와 교감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공천을 주도하고 있다. 민주당의 경우 아예 문재인 대표가 사퇴했고, 그 자리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꿰차고 공천권을 휘두르고 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 공천이야말로 사실상 청와대에 의한 공천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 공천의 특징은 박근혜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 그 중에서도 문고리 3인방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인물들이 대거 탈락했다는 점이다. 문고리 3인방으로 대표되는 박근혜 대통령 측근들은 박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한 이후 그의 주변을 지키며 인의 장막을 쳐왔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주군을 위해서 때로는 국회의원이나 당내 실력자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충성을 해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무성 대표나 유승민 의원 등이다. 이들은 박 대통령 보좌진에 의해 박 대통령과 멀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공천이 단순히 박 대통령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지만 그 배후에는 오히려 문고리 보좌진들이 관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박근혜이번 공천의 최대 관심사항은 비박계 의원들, 즉 김무성계, 이재오계, 유승민계 의원들의 공천여부였다. 한국시간으로 3월 16일 자정까지 유승민 의원의 공천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유 의원의 단독 공천여부와 상관없이, 그와 가까운 의원들이 대부분 낙천됐기 때문에 사실상 수족을 잘라놓은 공천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번 새누리당 공천은 한마디로 대통령 눈 밖에 난 사람들이 거의 모두 축출당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승민 의원은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으로 대구에서만 3선을 한 사람이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러나 친박이라는 사람들은 그런 유 의원에게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상한 이유를 걸어 집요하게 탈락시키려 했다. 작년 5~6월 국회 운영 과정에서 대통령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역풍을 걱정한 때문인지 결국 공천을 줄 가능성도 있다고 하나 유 의원은 살아남는다 해도 사실상 외톨이로 남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도덕성이나 경쟁력에 문제가 없는데도 그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명이 탈락한 것도 정치 보복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진영 의원 또한 대통령직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냈을 정도로 박 대통령과 가까웠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복지정책을 놓고 대통령 뜻에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밀려났다. 새누리당은 대통령에게 밉보인 사람을 잘라내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남기고 말았다.

박근혜 눈과 귀 막은 십상시들

하지만 본국 언론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대통령뿐만 아니라 문고리 권력과 사이가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물론 대통령과 사이가 좋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측근들과도 사이가 나빠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문고리들이 대통령을 선동해 사이가 멀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오히려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

대표적인 인사가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의원이다. 여권내 친박계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있으며 ‘비박계의 상징’처럼 돼버린 유 의원은 처음에는 ‘원조 친박(친박근혜)’으로 분류됐다.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누구보다 박 대통령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며 특수관계를 유지했으나 지금은 여당 의원임에도 박 대통령과 정치적 대척점에 서 있다. 유 의원은 애초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경제교사’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다가 ‘차떼기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역풍으로 존립을 위협 받던 시기에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 때 박 대통령이 구원투수로 등장, 당을 기사회생 시킨 뒤 재건작업에 나서면서 유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중용했다. 또 유 의원이 비례대표 의원직을 내려놓고 2005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동을로 출마해 지역구 배지를 거머쥘 때도 박 대통령의 지원사격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런 인연으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유 의원이 박근혜 캠프의 정책메시지 단장을 맡아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돈독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2011년을 전후해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의원들
특히 비서실장이면서도 박근혜 당시 의원에게 연락하기 위해서는 십상시로 일컬어지는 보좌진들을 거치는 것에 대해 유 의원은 상당한 불만을 나타냈다. 세세한 일정까지 박 의원이 아닌 십상시들과 상의해야 하는 것이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 후문이다. 이런 유 의원의 불만을 눈치 챈 보좌진들과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박근혜 대통령도 유 의원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유 의원 역시 보좌진들이 중간에 끼어있어서 박 대통령이 변했다는 의심을 갖게 된다. 2014년 나온 ‘얼라들’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 의원은 2015년 초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취지로 박근혜 정부의 복지 정책을 정면 비판했다. 또 2014년 국정감사에서 박 대통령의 뉴욕 유엔총회 방문 당시 발생한 ‘중국 경도론’ 발언자료 배포 소동과 관련, 외교부와 청와대 안보라인을 질책하며 “이거 누가 하는 거냐. 청와대 얼라(어린아이라는 의미의 방언)들이 하는 것이냐”라고 말했다. 보좌진에 대한 유 의원의 뿌리깊은 불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무성, 문고리 향해 막말도 서슴지 않아

김무성 대표도 문고리 권력과 비슷하게 마찰을 빚은 케이스다. 김 대표는 한 때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첫 인연은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였던 2005년 1월이다. 스스로도 ‘측근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연이 없던 김 대표가 사무총장으로 깜짝 발탁됐다. 함께 기용된 유승민 의원(비서실장), 전여옥 전 의원(대변인)과 ‘측근 3인방’으로 불렸다. 자연스레 ‘친박 좌장’ 꼬리표도 따라왔다. 대선 경선 캠프 구성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지만, 2007년 박근혜 후보 대선캠프 조직총괄본부장으로 선거전을 지휘했다. 일명 ‘친박 학살’로 불리는 2008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뒤엔, 친박무소속연대를 이끌며 당선돼 복당했다. ‘친박 좌장’ 입지를 굳힌 때다. 2009년부터 두 사람은 미묘하게 갈라졌다. 그해 2월 김 대표가 “이제 (이명박 정부에) 할 말을 하겠다”고 하자, 박 대통령이 “개인 의견일 뿐”이라며 잘랐다. 5월쯤 대세를 형성한 원내대표 추대는 박 대통령 반대로 무산됐다. 친박 ‘수장’과 ‘좌장’의 갈등설이 떠돌았다.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갈등은 결정적이었다. 김 대표가 “세종시는 엉터리 법”이라며 절충안을 내놓자, 박 대통령이 “가치 없는 얘기”라고 단칼에 잘랐다. “친박에는 좌장이 없다”며 사실상 ‘퇴출’을 선언하기도 했다.
정가에서는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 중심에 박 대통령의 보좌진이 있다고 본다. 사실 김 대표가 사무총

장이 되었을 때 김 대표는 이미 다선 중진 의원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에게는 보좌진이 그림같이 따라다니며 접근을 막았다. 당 대표와 사무총장이 허물없이 대화하던 그림을 그리던 김 대표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보좌진이 자신을 하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자 김 대표가 크게 화를 낸 적도 있었다. 다선 의원이 일개 보좌관에게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한 김 대표는 보좌진을 어린아이 다루듯 하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이재오와의 오랜 악연

이재오 의원이 낙천한 것은 케이스가 다르긴 하지만 역시 박 대통령과 사이가 상극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 의원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지난 19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새누리당의 전신)으로 영입돼 입당한 뒤 현재 지역구인 서울 은평을에서 내리 5선에 성공했다. 제18대(2008년) 총선에서는 창조한국당 문국현 의원에게 패배한 적은 있으나 공천을 받지 못한 일은 없었다. 2010년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재입성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 의원은 2007년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경쟁했던 한나라당 대선 경선 때 이명박 캠프 좌장으로서 선거전을 진두지휘해 당시 이 후보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거머쥔 데 이어 그 해 대선에서 승리,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이후 이명박정부에서 특임장관을 지내는 등 핵심 실세로 권력을 누렸다. 이때가 바로 박 대통령과 관계가 틀어지는 결정적 시기였지만, 양측의 악연은 37년 전인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의원은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자격으로 경북 안동댐을 방문했다가 현장에 당시 새마을봉사단 총재였던 박 대통령의 방생기념탑이 크게 서 있는 반면에 안동댐 건설공사로 숨진 근로자들의 위령탑은 초라하게 건립돼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구속됐다고 한다. 이 의원은 공개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옥살이 5번 중 3번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겪었다며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계에 입문해서도 박 대통령과 이 의원의 사이는 상극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제17대(2004년) 총선에서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로서 이 의원의 당선을 적극 지원했으나 그해 8월 의원연찬회에서 이 의원은 박 대통령의 당 운영을 비판하면서 “독재자의 딸”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던 것. 그러자 박 대통령은 “당의 뿌리가 3공, 5공인줄 몰랐느냐. 총선에서는 왜 (나에게) 지원 유세를 요청했느냐”고 반박하며 대립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직후인 2007년 10월에는 최고위원이던 이 의원이 “당내에 아직 이명박 후보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는데,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오만의 극치”라고 받아쳐 결국 최고위원을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갈등은 계속 됐다. 현정부가 전임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된 4대강 사업이나 해외자원개발 사업 등에 대한 감사원 감사 등 진상규명에 나서자 이 의원이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등 이 의원은 여당 의원임에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방식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번 선거는 새누리당이라는 한 공당의 선거가 아닌,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그를 둘러싼 보좌진에 의해 좌우되는 선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국가라고 불리는 2016년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유신 때와 같이 청와대에서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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