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아야 할 영화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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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시인, 윤동주’

cgv한국인이 가장 사랑했고, 사랑하며, 사랑할 시인, 윤동주. 죽는 날 까지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던, 그러나 자신은 끊임없이 괴로워했던 시인. ‘영원한 청춘’ 윤동주가 스크린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최근 위안부의 아픔을 담은 영화 ‘귀향’에 이어 우리 모두가 보아야 할 또 다른 영화 ‘동주’가 오는 4월1일 LA코리아타운 CGV 극장에서 개봉된다. ‘동주’는 한국에서는 윤동주의 71주기 기일인 2월16일 다음날, 17일 개봉했다. 이번  영화 ‘동주’에서 우리는 또 다른 문인 송몽규를 만나게 된다. 생전에 송몽규는 언제나 윤동주 보다 앞선 문인이고 독립운동가였다. 영화 ‘동주’에서는 조연이다. 맑은 물에  눈과 귀를 행군 듯 한국영화에 내린 한줄기 빛 ‘동주’를 보러가자.

<성 진  취재부 기자>

이 시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서사시’이다. 윤동주가 죽어서 시인으로 우리 앞에 나설 수 있던 것은 ‘향수’라는 시로 유명한 정지용 시인의 덕분이다.
그 정지용은 1955년 윤동주의  유고전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에서 서문을 썼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 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1945년)하고 정지용은 평양 교도소에서 미국의 폭격에 폭사 (1950년, 또는 행방불명)한다. 이들은 또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과 선후배사이이다. 정지용이 19년 먼저 입학하여 6년 동안의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많은 작품 남긴다.
정지용은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쓰면서 윤동주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었다.
일본 도시샤대학에 유학 중이던 1945년, 조선말로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몰려 옥중 에서 생을 마감한 한국의 시인 윤동주. 동교 졸업생들이 평화와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담아 1995년에 동 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에 그를 추모하는 시비를 세웠다.
또 2005년에는 동 대학에 재학했던(1923년~1929년) 한국의 현대 대표 시인 정지용의 시비도 건립 되었다.
윤동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시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길이 남은 전설적인 문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 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추앙받는다. 더불어 북한에서도 인정받는 추세다.

 ‘북한에서도 추앙받는 윤동주’

이번에 이준익 감독이 윤동주를 영화화했다. 그는 “잘못 찍으면 죽을 때까지 비난을 짊어지고 가야하니 겁나고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의외로 철이 없어 깊이 생각 못하고 단세포적으로 산다. 너무 잘하려고 하면 자기 발목을 잡을 수 있어서 힘 빼고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준익은 영화 ‘동주’가 “70%가 사실이고 30%가 픽션”이라며 “사실을 픽션화시킨 것”이라고 해명 하면서 ‘순수 창작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영화에서는 ‘일부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안내문이 뜬다.
이 영화에서 같은 해(1917년) 북간도 같은 집에서 태어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나란히 죽음을 맞기까지 평생을 함께한 고종사촌 송몽규를 함께 하면서 영화는 만들어진다. 윤동주는 알아도 많은 한국인들은 송몽규를 모른다. 이 영화로 송몽규가 우리 앞에 완성된다.

그리고 시인 정지용(문성근)과 나중에 신문기자가 되는 동문 강처중(민진웅)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윤동주 사후 시집 발간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각각 월북하고 납북되면서 해금 전까지는 이름도 불리지 못했다. 배우 문성근은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북간도 명동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민주투사 고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다. 영화 속에서 문익환은 학생잡지를 등사하는 친구로 잠시 등장한다.
타이틀 롤을 맡은 강하늘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준익이 은퇴선언을 했던 영화 ‘평양성’(2010)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순제작비 5억 원으로 흑백영화 ‘동주’를 한 달 만에 해외 로케이션 없이 국내에서만 촬영된 이 영화 역시 인물에 주 포커스를 맞춰 배우의 연기력에 온전히 기댔다고 한다. 흑백사진 몇 장으로 남아 있는 윤동주의 얼굴을 흑백필름으로 그대로 살려내며 실재감을 부여한다.
생전에 송몽규는 윤동주를 앞섰다. 시인을 갈망하는 윤동주 대신 열여덟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열아홉에는 겁도 없이 남경의 독립운동단체를 찾아간다. 함께 진학한 연희전문학교도 우등상장을 받고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가서도 혼자만 교토제국대학에 합격한다.
윤동주는 영화 속 대사처럼 ‘그림자’처럼 살았지만, 송몽규를 자극제로 내면의 삶을 더욱 키웠다. 결국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문인이 된 것은 윤동주 였고, 영화 속에서는 송몽규가 조연이 된다.

죽음의 길도 함께

윤동주와 송몽규는 석 달을 차이 두고 중국 만주 땅 용정에서 1917년 각각 세상에 태어났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동갑내기 고종 사촌 간으로 몽규가 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이런 혈연 때문이였던지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 같았던 두 사람이다.
송몽규는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성정미의 윤동주와는 대조적이였다. 어릴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했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시절이였다. 4학년 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생활》을 구독하였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여 고향 간도사람들을 놀라웠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진입 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 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서울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두 사람은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 윤동주는 이케부쿠로에 있는 릿교대학에 들어시고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입학한다.
그 후 윤동주는 학교를 바꾸어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 다시 송몽규와 재회한다.
늘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시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 하에서 민족독립의 내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일본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교도에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교도 시모가모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다.
1944년 봄, 두 사람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재판시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 (조선독립 운동)》 으로 그 죄목이 정해졌다. 징역은 각각 2년이었다. 형이 확정된 그들은 후꾸오까형무소로 이송 되었다. 머리를 깎고 또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색 죄수복을 입었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 치고 있었다. 마구 잡아들인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생체실험 이었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옥중에서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 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었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집에서 태어났고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었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었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 그의 문학적 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 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어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 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까지 사랑받고 있는 친구 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 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 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 점 부끄럼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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