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단독공개]안치용 기자 발굴비사 외무부 외교문서 공개…월남패망 41년 그리고 한국외교관 철수실패 뒷이야기

■ 혼자 탈출 비판받은 김영관대사의 외교부 보고전문 최초 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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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패망 당일…처절한 사이공탈출

‘미국인들만 헬기19대에 분산 탈출시켜라’

지난 4월 30일은 베트남이 패망한지 41년째 되는 날이며 바로 그날 새벽 미국은 한국인들을 내버려두고 철수했다. 대한민국 외교관 억류를 낳은 베트남 패망당일 상황이 외교부가 공개한 외교문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패망당일 한국외교관들은 미군헬기에 탑승, 공산화 직전의 사이공을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결국 버려지고 말았다. 본보는 패망전날 미군헬기편으로 탈출한 김영관 주월한국대사가 탈출당일의 절망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고한 전문을 입수했다. 또 자결을 결심하고 패망 2일 만에 배를 구해서 탈출한 김창근 참사관의 비장한 전문역시 공개됐다. 본보는 지난해 7월 21일 958호에서 미국외교전문을 통해 베트남 억류 외교관 3명중 1명이 북한으로의 전향서로의 서명했다는 사실을 밝힌데 이어 이번 호에서는 1600여건의 외교문서 속에서 본보가 최초로 찾아낸 김영관 당시대사, 김창근 당시참사관의 보고전문을 통해 베트남 철수작전 당일의 그 처절하고 비통한 밤을 되짚어본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탈출1964년 비둘기부대를 시작으로 한국이 월남에 파병한지 11년째 되던 1975년, 월남에 앞서 캄보디아가 먼저 공산화의 운명을 맞았다. ‘킬링필드’라는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캄보디아.
그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크메르 루즈에 의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1975년 4월 12일 프놈펜 탈출 작전을 감행했다. 작전명은 이글풀 오퍼레이션[OPERATION EAGLE PULL]. 미국 항공모함과 순양함 등 대형함정으로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던 것이다. 그로 부터 닷새 뒤인 4월 17일 프놈펜은 함락됐다. 이때 이미 베트남의 패망은 불 보듯 뻔했다.

미국은 프놈펜탈출작전을 교과서 삼아 4단계 베트남 탈출 작전을 세웠다. 첫 번째는 상업용 항공기를 통한 탈출, 두 번째는 사이공의 탄손누트공항과 월남지역의 다른 민간공항에서 군용 수송기를 통한 탈출, 세 번째는 탄손누트공항에서 군용수송기를 통한 탈출, 네 번째는 국방연락사무소와 대사관에서 헬리콥터를 통한 탈출이었다. 결국 미국은 최후의 탈출수단인 헬리콥터 탈출 작전을 감행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말았다. 이른바 제4탈출작전, 암호명 프리퀸트 윈드 [OPERATION FREQUENT WIND]. 프리퀸드 윈드는 ‘바람이 잦다’는 뜻이다. 미국에 의존해 탈출할 수 밖에 없는 한국 외교관등은 미국이 최후의 탈출수단까지 강구해야 하는 판이었으니, 혈맹의 대접을 받겠다는 기대 자체가 무리였지만 그래도 기댈 때는 미국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짝사랑’은 결국 비극을 연출하고 만다.

김영관 대사의 외무부 비밀전문 공개

당시 주월한국대사는 김영관 전 해군참모총장이었다. 김 대사는 한국외교관과 교민들을 이끌고 미국대사관을 찾았다가, 이들이 탈출한 것으로 판단하고 미군헬기에 올랐다가, 외교관을 버리고 혼자 탈출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김대사가 베트남 패망 사흘 뒤인 5월 3일 필리핀에 도착한 뒤 당일 밤 7시30분 외무부장관에게 보냈던 외교전문이 본보에 의해 입수됐다. 외교무는 외교문서 해제정책에 따라 지난달 중순 1602건의 각종 문서철을 공개했고 본보가 이를 뒤져 김영관대사의 비밀전문을 찾아낸 것이다. 김영관대사의 비밀전문은 본보를 통해 사상 처음 공개되는 것으로, 월남패망당일 긴박하고 처절한 상황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왼쪽) 김영관 주월대사 탈출뒤 상황보고 전문, ▲ 김영관주월대사, 억류공관원 탈출위한 극비작전 허가요청 전문

▲(왼쪽) 김영관 주월대사 탈출뒤 상황보고 전문, ▲ 김영관주월대사, 억류공관원 탈출위한 극비작전 허가요청 전문

김 대사는 이 전문에서 5월 3일 오후 1시20분 주필리핀한국대사관저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4월 29일 오후 미국대사관옥상에서 미군헬기로 사이공을 탈출한 뒤 미 항공모함 ‘핸콕’으로 이동했다가 나흘 만에 필리핀 수빅만 미군기지에 입항, 필리핀 대사관으로 달려간 것이다. 김 대사는 4월 28일 공관원 전원이 대사관저에서 함께 모여서 밤을 지새웠으며 다음날인 4월 29일 오전 10시30분, 미 대사관에서 긴급철수를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긴급철수가 시작되니 즉시 대사관저에서 가까운 어셈블리 포인트 3번이나 미 대사관저로 집합하라는 통보였다. 프리퀸트 윈드, 즉 제4탈출작전의 신호는 미군방송을 통해서 빙 크로스비의 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내보내는 것이었다. 화씨 105도의 날씨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노래가 나오는 진풍경, 이는 즉각 미국대사관에 집합, 철수하라는 신호였다. 이 노래가 방송된 시간이 4월 29일 오전 11시, 즉 한국대사관은 공식철수시그널을 일반인들에게 알리기 30분전에 통보를 받은 것이다.

김 대사는 공관원과 함께 어셈블리포인트 3로 갔으나, 문이 잠겨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미 대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 대사관 도착 시점이 오전 10시 50분, 긴급철수 통보를 받은 지 불과 20분 만에 어셈블리포인트3에 갔다가 미 대사관까지 내달린 것이다. 김 대사는 이상훈 참사관을 대동, 대사관 본관 3층의 마틴대사실 옆방으로, 다른 공관원들은 대사관 본관 마당에 마련된 헬리패드 근처로 안내됐다. 김 대사는 마틴대사에게 교민 완전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한국인들을 미 대사관 등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교통수단 지원을 요구했다. 마틴대사는 즉석에서 이를 수용했고 레만부대사는 미군버스를 배정했다. 김대사는 직접 내려가 헬리패드근처에 대기하던 공관원들이 레크리에이션센터쪽으로 자리를 옮긴 사실을 확인했다.

20명씩 나눠 철수 구조헬기에 탑승

사실 레크리에이션센터와 본관은 대사관 콤파운드내에 있지만 엄연히 다른 건물이고 두 건물 사이에 차단문이 설치돼 있다. 이때 공관원등은 레크리에이션센터로 밀려남으로써 실제 구조헬기를 탈 수 있는 본관으로 진입하기 위해 거의 10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이때 미 대사관에서는 본관옥상의 VIP용 헬리패드와 마당 등 두 개소에서 헬기철수가 시작됐으며 마당에서는 40명, 옥상에서는 20명씩 헬리콥터에 탑승했다는 것이다. 김 대사는 오후 4시쯤 헬리패드와 레크리에이션센터간의 작은 문이 차단돼 나머지 공관원 상황파악이 불가능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감안, 공관원들이 짐을 가지고 이미 철수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최종확인을 위해 이참사관과 함께 직접 마당에 내려가겠다고 해병경비병에게 요구했으나 이미 본관문이 닫혔다는 대답만 들었다.

결국 김 대사는 같은 방에 대기하던 이란대사, 국제적십자사 멤버들과 함께 오후 6시25분 본관옥상에서 헬리콥터로 탈출하게 된다. 김 대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관원 철수를 확인하려 했으나 이마저 좌절됐고 결국 헬기에 탑승, 1시간 뒤 미 항공모함 핸콕에 안착했다고 밝혔다. 즉 김대사는 4월 29일 오전 10시 50분 미 대사관에 도착, 오후 6시 25분 탈출한 것이다.

이달화 소령도 항공모함 핸콕에서 김 대사를 만나 이대용공사가 오후 2시 반쯤 레만 부대사를 만나 철수확약을 받았고 그 뒤 현장지휘관인 해병대 중령도 이를 공식 확약했다고 설명함으로써 김 대사는 교민철수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공관원들은 자신들이 줄을 서 있다 교민들이 도착하면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듭, 항상 대기하는 줄의 맨 뒤에서 의연한 자세로 탈출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 소령은 또 오끼나와에서 현장지휘관이던 중령을 만나서 확인했을 때 해병중령은 자신은 전원철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워싱턴에 시간 연장을 긴급 요청했으나 4월 30일 새벽 4시 45분 미국대사일행이 사전통보 없이 철수했고 그 뒤 해병대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 대사도 해병중령을 마닐라에서 만났으며 당시 상황을 미국정부에 항의했다고 하면서 전문사본도 받았으므로 귀국해서 이를 보고할 것이라는 말로 전문을 끝맺었다.

월맹군의 대공포공격에 사이공 함락

미 해군 등이 작성한 시간대별 철수작전 상황을 살펴보면 김 대사 전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4월 29일 낮 12시 15분 프리퀀트윈드 작전명령이 내려졌고 곧바로 마틴대사의 부인이 헬기편으로 철수, 오후 1시12분 덴버호에 무사히 도착했다. 오후 2시 25분에는 미 국방부 무관 3백여명을 포함한 2천3백여명이 대피한 국방연락사무소. 이른바 다오컴파운드에 포화가 쏟아졌다.

▲ 김창근서기관, 싱가폴해상탈출뒤 헬기구출작전당시상황 보고전문

▲ 김창근서기관, 싱가폴해상탈출뒤 헬기구출작전당시상황 보고전문

또 30분 뒤인 오후 2시 53분에는 사이공전역에서 월맹군의 대공포공격이 시작됐다. 상황이 시시각각 악화되는 것이다. 오후 3시 12분 탄손누트공항의 다오컴파운드에서 첫 번째 비행기가 149명을 태우고 떠났다. 수송기를 통한 대규모 탈출은 이때가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오후 4시까지 18대의 헬리콥터가 함정 7척에 956명을 대피시킨 것으로 집계됐다. 오후 5시35분, 드디어 본관옥상 VIP 헬리패드에서 헬기탈출이 시작됐다. CH46, 즉 시나이트 헬기 4대가 도착한 것이다. 오후 6시50분 마틴대사는 모든 사람이 대피할 때까지 대사관에 남아있겠다며 전원철수 의지를 불태웠다. 오후 9시7분 대사관에서 항공모함으로 대피시킨 뒤 다시 대사관으로 향하던 시나이트헬기 1대가 바다에 추락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조종사 2명이 실종되고 승무원 2명은 구조됐다.

4월 29일 오후 11시쯤 일시적으로 철수가 중단됐다가 4월 30일 새벽 2시10분에야 철수가 재개됐다. 어이없는 3시간의 공백이 한국인 철수실패의 원인이었다. 이때부터 10분 간격으로 헬리콥터가 대사관을 출발하기 시작했다. 새벽 3시 마틴대사는 해병경비병력 총책임자인 짐 킨 중령에게 대기 중인 모든 인원들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틴대사는 전원철수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 해병대중령이 김 대사의 전문에 명시된 현장책임자 해병중령이었다.

그러나 새벽 3시27분 절망적 명령이 하달된다. 포드대통령의 명령이었다. 4월 30일 수송헬기는 모두 19대이며, 새벽 3시45분이후에는 헬기운행을 불허하며, 마틴대사는 19번째 마지막헬기에 탑승하라고 지시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새벽 4시20분까지 4월 30일에만 18대 헬기에 737명이 탈출한 것으로 집계됐고, 아직 해병대 경비병력 225명과 민간인 850명이 남아있었다. 이 민간인 850명에 한국인들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포드대통령 명령 뒤인 새벽 4시30분 리처드 캐리장군은 대통령이 지시한 19대를 초과했다며 이제부터는 미국인과 해병대 경비병력만 옥상에서 탈출시키라고 명령했다. 4월 30일 새벽 4시30분이 한국인 외교관과 교민들의 탈출이 좌절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포드대통령의 명령에 마틴대사도 탑승

포드대통령의 강력한 명령에 따라 마틴대사도 새벽 4시 58분 헬기에 탑승, 미 항공모함 블루릿지로 향했다. 해병대 경비병력도 이 헬기와 그 뒤 헬기로 철수했지만 새벽 6시45분까지 해병대 병력이 38명 남아있었다. 미 해군은 다시 헬기를 띄워 오전 7시58분, 해병대 경비병력 총책임자인 짐 킨 중령을 포함한 마지막 병력을 탈출시켰고 이들이 오전 8시 52분 미 해군함정에 도착함으로써 프리퀸트 윈드 작전을 종료됐다. 한국공관원과 교민들을 외면한 채 최루탄까지 발사하면서까지 그렇게 미국의 철수작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미국무부 비밀전문을 살펴보면 마틴대사는 백악관과 국방부에 4월 30일 철수에 CH53시스탤런헬기가 30대가 필요하다며 제발 CH46 시나이트헬기가 아닌 시스탤런헬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틴대사가 시스탤리언헬기를 요청한 것은 시나이트헬기보다 약 2배이상 많은 인원을 수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마틴대사가 요구한 대로 CH 53 30대가 투입됐다면 전원철수가 가능했지만, 포트대통령이 19대를 상한선으로 정하고 그나마 CH 46을 대거 투입함으므로써 철수인원이 크게 줄 수 밖에 없었다. 포드대통령이 철수헬기를 19대로 한정한 것은 사이공의 일출시간을 계산한 것으로 새벽 2시부터 10분 간격으로 헬기를 띄울 경우 19대 이상 투입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새벽 4시 30분부터 무조건 미국인만 태운다는 방침이 정해졌고, 한국인에게 버스를 배정하며 적극적 협조의사를 밝혔던 레만부대사조차 해병대 경비병력에게 ‘한국인에서 헬기탈출 우선권을 준 적이 없다’고 명령하면서 한국인 철수는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 (왼쪽) 이대용공사등 억류외교관 체포일시및 수감장소 내역, ▲ 외무부, 이대용공사 억류전문수신뒤, 답신 메시지1호 발송

▲ (왼쪽) 이대용공사등 억류외교관 체포일시및 수감장소 내역, ▲ 외무부, 이대용공사 억류전문수신뒤, 답신 메시지1호 발송

본보가 최초로 확인한 주월대사관 김창근 서기관의 비밀전문도 탈출당일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김서기관은 헬기탈출이 좌절된 뒤 목숨을 걸고 싱가폴로의 해상탈출에 성공, 5월 8일 오후 8시 주 싱가폴 한국총영사관에서 외무부로 당시의 숨 막히는 상황을 타전했다. 싱가폴총영사가 김 서기관의 탈출경위를 파악한 뒤 외무부로 보고를 한 것이다.
김 서기관은 4월 28일 대사관내 무전시설과 관련 ‘외무부 본부가 2시간마다 호출하라, 그때 만약 응답이 없으면 모두 장비를 파기하고 철수한 것으로 간주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4월 29일 오전 10시 미대사관 1등서기관 1명이 이상훈 참사관에게 전화해 한국공관원들은 포인트3로 집결하라고 통보, 포인트3에 갔다가 미국대사관으로 옮겼고 김 대사와 이 참사관은 미 대사실로 들어가고 나머지 공관원과 교포는 대사관 뒷마당에 집합, 전 직원은 대사와 이참사관을 뒷마당에서 오후 5-6시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김 대사가 보낸 전문에서 김 대사가 오후 6시25분 탈출한 것을 감안하면 공관원들은 김 대사 탈출 때까지 김 대사를 애타게 기다린 셈이다.

김 서기관은 기다리다 못한 이대용공사가 미 대사관에 확인한 결과 김 대사와 이참사관은 이미 떠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공사는 대사관직원을 우선적으로 철수시켜줄 것을 요구하자 미대사관측은 미국인을 우선 철수시켜야 하며, 한국인을 월남인에 우선해 철수시키라는 지시가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공관원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군들 뒷걸음치며 최루탄 발사하며 도주

한국교민들과 교민들의 가족인 월남인들을 앞줄에 세우고 공관원들은 맨 뒷줄에 섰다.
4월 29일 밤 11시 철수작전이 잠시 중지됐다가 4월 30일 오전 1시경 다시 헬리패드와의 차단 문이 열리자 미 해병 경비 병력과 타협, 월남인 20명과 한국인 20명씩 40명씩이 헬리패드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대사관직원도 마지막으로 가까스로 헬리패드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대기자가 5백명이 넘었다. 마지막 3대가 와서 옥상에 착륙하는 순간 미 해병대 경비병력이 대사관 본관을 일렬로 에워싸며 뒷걸음질 치며 본관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아버리고는 최루탄을 쏴댔다. 뒷걸음질 치며 최루탄을 쏘는 미군, 바로 이 장면이 월남에서의 미군의 마지막모습이었다.

▲ 포드대통령, 1975년 4월 29일 프리퀸트윈드작전 명령 하달

▲ 포드대통령, 1975년 4월 29일 프리퀸트윈드작전 명령 하달

그렇다면 철수가 좌절된 채 버려졌던 한국공관원들과 교민들은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이 부분도 김 서기관의 전문을 통해 잘 드러난다. 미군의 최루탄세례에다 미 대사관을 폭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공관원들은 새벽 5시께 모든 소지품을 내팽개치고 담을 뛰어넘어 해산했다가 대사관 밖에서 다시 집합했다. 공관원들은 걸어서 프랑스대사관으로 갔다가 거절당하자 우리 대사관저로 향했고 그 뒤 이대용공사, 이규수 참사관, 김창근 서기관 등 3명이 일본대사관저를 거쳐 일본대사관에 들러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간신히 긴급전문만 서울로 타전하는 데 성공했다고 김 서기관의 전문은 전하고 있다.

외무부가 공개한 별도의 전문에 억류외교관의 명단이 그대로 드러난다. 억류외교관은 이대용공사, 이규수참사관, 김창근서기관, 김경준 2등서기관, 안병호 아타세, 안희완 2등서기관, 신상범 3등서기관, 김교량 통신사, 양종렬 통신사보등 9명이었다. 이외에 주월대사관 고용원인 요리사 장행규씨, 운전기사 김만수씨등도 탈출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공사는 일본대사관으로 부터 전문타전이외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이공해군기지를 방문하려다 실패하고 해군참모총장면담도 불발됐다. 그리고는 한 프랑스인을 만났고 이 프랑스인이 초기 몇달간 한국인을 보호하는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한식집 ‘지미의 집’주인인 프랑스인이 흑기사로 나선 것이다. 지미의 집 주인의 안내로 치외법권지역인 프랑스병원인 그랄병원으로 향하게 된다.

프랑스 민간인 도움으로 구사일생 탈출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공관원들은 5월 1일 또 다시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5월 1일 오전 11시경 일본대사관 와다나베참사관이 이 공사를 찾아왔다. 와다나베 참사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공관원들은 베트콩에 발각되면 크게 다칠 것이라고 절망적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사용하던 볼펜을 이 공사에게 마지막 선물로 주고 떠났다. 이때 공관원들은 청산가리나 수면제를 공동구입, 베트콩에 잡히면 자결하자는 결의도 다진 것으로 드러났다. 오후 4시경 병원측 요청으로 또 다시 쫓겨났고 지미의 집 주인은 대사관저에 프랑스기를 달도록 하고 프랑스인 2명을 보내 수위를 서게 함으로써 한국인 보호에 나섰다.

▲주월미국대사관이 미국무부에 타전한 마지막 비밀전문 -‘1975년 4월 29일 새벽 4시30분부로 대사관업무를 종료한다. 통신기기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이 메세지가 사이공에서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다’

▲주월미국대사관이 미국무부에 타전한 마지막 비밀전문 -‘1975년 4월 29일 새벽 4시30분부로 대사관업무를 종료한다. 통신기기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이 메세지가 사이공에서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다’

앉아서 죽으나, 탈출하다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탈출도 모색했다. 관저생활 이틀째인 5월 2일 밤 교포 김영국씨가 자신은 내일, 3일 아침 봉타우북쪽인 로하이로 가서 탈출할 것이라며 공관원에게도 동행탈출을 건의했다. 이 공사는 3일 새벽 직원들에게 탈출을 제안했으나 대부분이 만류함에 따라 결국 포기하고 만다. 반면 김창근 서기관은 이미 그랄병원에서 자결을 결심했으므로 생명을 걸고 탈출한 것을 결심, 5월 3일 11시, 스리쿼터 트럭 1대에 모두 19명이 탑승, 로하이로 향했다. 한국인이 13명, 월남인이 16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6차례의 검문을 가까스로 통과했고, 베트콩이 자신들을 태워달라고 요구, 이들은 20분간 동승시키는 등 가슴 철렁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오후 2시 로하이에 도착한 김 서기관과 교포 김영국씨가 30만피아스타를 주고 4톤급 목선을 가까스로 빌렸고 이날 오후 6시 반 배는 출발했다, 약 1시간 뒤 선장을 불러 돈을 더 주고 태국으로 가자고 했으나 선장이 거부했고 김 서기관과 한국인들은 기관실에서 선원들을 억류하다시피하고 또 다른 교포 최용준씨가 키를 잡아 싱가폴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해 5일 만인 5월8일 오후 2시에 싱가폴에 도착함으로써 탈출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억류공관원은 처음에는 9명이었지만 김 서기관이 탈출함으로써 8명으로 줄어들게 됐다.

억류외교관 치와형무소 수감 2년만에 면담

또 다른 외교문서를 통해 경찰출신 아타세인 서병호총경, 안희완 2등 서기관 2명은 월남철수에 실패한지 약 한달 반 만인 1975년 6월 18일 월맹에 체포돼 치와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대용공사는 월맹의 유엔가입이 실패한 직후인 10월 3일 체포, 수감됐다. 중정출신의 안서기관은 치와형무소 B동 3층 4호, 서총경은 안서기관의 옆방인 B동 3층 5호에 수감됐던 것으로 밝혀졌고 이 공사는 A동에 수감됐지만 호수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한국정부의 적극적 노력으로 수감 1년여만인 1976년 8월 20일 서 총경과의 면회가 이뤄졌고 6개월 뒤인 1977년 2월 15일 안 서기관과 면회, 그다음날인 2월 16일 서 총격과의 면회가 있었다고 외교문서는 밝히고 있다. 이때부터 주기적으로 면회가 이뤄지고 한국 가족들의 편지가 전달된 것이다.

미 대사관에서 극적으로 헬기탈출에 성공한 한국인들의 진술은 많은 화두를 던진다. 이들의 진술을 담은 5월 3일자 전문은 한국공관원들이 미국을 과신, 한국인전체를 우선적으로 탈출시킬 것을 기대하고, 줄이 흐트러져 누구든지 먼저 뛰어가는 사람이 헬기에 탑승할 수 있는 극한 상황에서도 ‘줄을 서시오’하며 줄서기만을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국인 130여명이 탈출에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과연 미국에 대한 신뢰가 잘못 됐을까? 그렇다고 해서 과연 각개행동에 맡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또 각개행동을 허락했다면 더 많은 한국인들이 구조됐을 것인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이 같은 불행한 사태는 한국이 자체적으로 사이공을 탈출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베트남패망에 따른 한국외교관등의 억류사태는 냉엄한 국제현실 속에서 자국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살 길이라는 값비싼 교훈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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