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BBCN은행 떠나는 설립자 김상훈 이사의 ‘삶과 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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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 입구까지오는 것이
우리 1세들의 역할이였다면…
강을 건너 미 주류사회로
가는 것은 바로 2세들의 몫이다”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수많은 한인들은 저마다 꿈이 있다. 무지개 빛처럼 꿈에도 여러 색깔이 있다. 미주 한인사회의 최대은행 BBCN뱅크 이사회에서 최대지분을 지니고 있는 김상훈 이사는 지난 17일 30년을 몸담았던 이사직을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김상훈 전 이사는 자타가 인정하는 매우 독특한 꿈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뱅커로서 미주한인사회의 최대은행 BBCN뱅크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이제 BBCN은행을 다시 도약시켜 미국내 아시아 뱅크 중에서 이스트 웨스트 뱅크, 케세이 뱅크 다음으로 3위 은행인 130억 달러의 리저널 뱅크인 ‘뱅크 오브 호프’(가칭)의 출범을 마련한 주인공이다. 본 기자는 미국생활 반세기 중 30여년을 뱅커로 활동한 김상훈 전 이사와 최근 코리아타운에서 장장 3시간에 걸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아메리칸 드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명해 보았다. 그가1967년 미국 이민 이후 계속 추구해온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서, 한인 올드 타이머로서 2-3세대에게 거는 기대, 그리고 한인 경제의 새로운 도약 130억 달러의 한인 최대은행 ‘Bank of Hope’ 창출의 꿈의 토대를 구축한 당사자로서의 내일의 한인 커뮤니티의 도약을 위한 꿈과 희망을 들어 보았다.   성 진 (취재부 기자)

김상훈 전 이사는 지난 17일 캘리포니아 클럽에서 개최된 BBCN 이사 은퇴식에서 “지금 우리는 윌셔뱅크와 합병하여 커뮤니티 뱅크 차원을 넘어 리저널 뱅크로 성장하게 되었다”면서 “앞으로 어려운 과제를 남겨놓고 떠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저는 몸은 떠나도 나머지 인생을 이 조직이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는 BBCN의 전신인 중앙은행 창립 이사로 30년 가까이 한인 은행계에 몸담아 오며 한인은행의 발전에 기여한 1세대이자 터줏대감이다.

그는 지난해 한인 언론들과 인터뷰에서 “나도 내년이면 은퇴를 한다. 은퇴를 앞둔 나의 바람은 100억 달러대 은행을 이끌어 갈 수 있고, 또 한인 커뮤니티의 발전에 기여하는 애국심을 가진 젊은 경영진과 이사진이 구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후배들에게 물려줄 때가 왔다. 젊고 한인커뮤니티의 발전을 생각하는 전도유망한 후배들이 은행을 잘 이끌어 가길 바란다”며 “한인은행이 살아야 한인 커뮤니티가 사는 것이다. 커뮤니티와 한인은행은 공동체”라고 강조했다.

김상훈 전 이사의 은퇴와 관련하여 BBCN 은행의 케빈 김 행장은 “지난 30년간 수 많은 역경 속에서도 오늘의 BBCN이 있기까지 중추적인 역할을 하시고 명예롭게 은퇴하시는 김상훈 회장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며 “김상훈 회장님은 그 분의 꿈과 비젼을 통하여 미국의 교포은행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내가 뱅커로서 눈을 뜨고 사명감을 가지고 높은 목표를 향해 매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분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상훈 회장님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향이 그 분의 개인적인 성공에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우리 후배들도 그 분의 꿈과 사명감을 잘 이해하고 그 정신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많은 경제인들이 평소 잘 밝히지 않았던 코리안 커뮤니티 공동체 사명을 그의 ‘꿈’의 한 축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미 주류사회의 ‘메조리티’가 되어야

김상훈 전 이사는 기자와 마주 대하자 요즈음 미국 대선의 화제 인물인 드널드 트럼프에 대해 언급했다. “그가 한국에 대한 언급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면서 “한마디로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한 김 전 이사는 “우리 한인들이 강했다면 그가 절대로 우리를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국내 정치에 한 두명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보다, 지금 우리가 국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면서 “유대인이 영향력을 발휘하듯이 우리도 한다면 트럼프가 한국에 대해 절대로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내가 지난날 동포들을 만나면서 뿌듯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면서 “한 고객이 ‘BBCN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며 BBCN 덕분으로 비즈니스를 키워 갈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라고 말했을 때였다”고 말했다.

1967년에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온 후 20여년을 지내면서 그는 “그동안 내가 무엇을 했나”를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많은 자괴감과 허무감에 시달렸다. 또 “내가 ‘동네부자’로 만족해야 하나”로 고민에 싸였다.(실제로 한인사회에서 거부이지만 그는 스스로 ‘동네부자’라 했다.) 새삼 미국 이민 올 당시의 꿈을 생각했다. “나 혼자 잘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1980년대 당시로서는 거대한 꿈을 구상했다.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은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젊은 세대들을 한국에 데려가 얼을 심어주고 뿌리의식을 지니게 한 다음, 다시 미국에 데리고 와서 커뮤니티를 위해 봉사와 공헌을 하게 만드는 것. 한국의 얼을 심은 훌륭한 미국시민으로 키워 한국과 미국을 동시에 공헌하는 인물로 키우자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또 다른 한국인의 ‘영토확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구상은 여러가지 이유로 실현이 되지 못했다. 한국에서의 극기훈련 과정을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점이 당시로서는, 한국 사정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꿈을 지금부터라도 미국에서 실현시켜 보려고 한다.

미국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지닌 훌륭한 젊은이들이 10년-50년후에 비록 숫자는 적지만, 유대인 들이 이 나라에서 한 것처럼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이 지난날 빈곤한 나라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그 힘으로 미주 동포사회도 다가 올 미래에 미 주류사회에서 영향력면에서 유태인처럼 ‘매조리티’가 되어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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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이정현 이사를 비롯해 자신의 사업 동료들과 400만달러를 모아‘중앙은행’(Center Bank)을 설립했다. (왼쪽 두번째가 김상훈 이사)

400만 달러 모아 ‘중앙은행’(Center Bank) 설립

그는 1980년대 후반 젊은 세대 육성 이외에 한국에 미주동포들이 세운 은행을 설립하는 꿈을 구상 했다. 당시 정계 인사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한국에는 일본 동포들이 세운 신한은행이 있었다.

지난날 한국정부가 재일 동포사회에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신한은행 설립이었다. 그런데 재일동포 2세들이 과연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이런 면에서 그는 한국정부에 대해 미주 동포들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건의했다. 미국 동포들이 힘을 모아 한국에 은행을 설립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래서 신한은행 라응찬 전 회장과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그는 미주 동포들이 신청하면 은행이 허가가 나오는 줄 알았다. 당시 그가 국내서 교분을 지닌 정치인들 중에는 정권의 실력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청와대 행정수석이었던 이상백씨, 김종인 전 경제수석, 안기부 안무혁부장 등과는 형제처럼 지냈다.

그런데 당시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이북 5도민의 표를 의식해서 그들이 주축 이 된 동화은행에 설립허가가 나버리고, 미주동포들이 원하는 은행은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미주 동포들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대신 그는 그 꿈을 미국에다 심기로 했다. 그래서 1984년 LA에 올림픽대회 붐이 일어날 때 본격적으로 ‘뱅커’로 변신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 동료들을 포함해 한인 비즈니스맨들 150여명을 동원해 400만달러를 모아 ‘중앙은행’(Center Bank)을 설립했다.

당시 의류와 무역업체를 하던 그에게 사업자금을 구할 수 있는 창구가 너무 부족했다. 동포사회에서 담보가 없으면 설사 아무리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어도 돈을 구할 길이 없어 비즈니스를 시작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주위에서 한인은행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한다는 인식들이 커저 중앙은행이 생겨났다.

당시 김 전 이사의 야망은 은행을 세워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한인은행이 한인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이어서 그가 지닌 꿈의 성취감을 느꼈다. 이런 중앙은행은 2002년 나스닥에 상장됐다. ‘나스닥 상장’이란 미국 자본주의 금융권의 상징인 미국 증시에 한인들이 세운 은행이 상장했다는 점에서 김 전 이사는 그가 오래 전 부터 꿈꾸어 온 구상에 도전했다. 최고최대 은행의 설립이었다.

특히 2007년부터 몰아 닥친 세계적 금융위기에서 그는 한인타운의 은행들의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합병을 구상했으며, 2011년 11월 중앙은행은 한인사회 제 2위 은행인 나라은행과 합병해 오늘의 BBCN으로 미주한인사회에서 명실공히 제1위의 은행으로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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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사회 발전에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으로 중앙은행을 창립한 직후 임직원들과의 기념촬영. (뒷줄 왼편에서 세번째가 김상훈 이사)

경쟁력있는 인재육성이 한인은행의 과제

이제 ‘뱅크 오프 호프’(Bank of Hope)로 새로 130억대의 거대 은행을 출범을 앞둔 한인사회 금융권에게 그는 또다른 꿈을 꾸고 있다.

미국의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가 이태리 동포들을 위해서 생겨나면서 나중 미국 주류사회에서 정상에 올라가듯이, 우리의 새 은행이 한인 커뮤니티의 뿌리를 심고서 미 주류사회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경제 문화면에서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뱅크 오브 호프’가 종국적으로는 미국 은행이 될 것이다”면서 “현재도 80-90%가 기간 투자자인 현실에서 커뮤니티 뱅크 차원을 넘어 커뮤니티 발전에 제도적 장치 없이 미국 은행이 되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한인은행이라는 뿌리정신으로 미국 사회를 돕는다는 가치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젊고 능력있는 세대에게 우리 세대의 꿈을 넘겨주어 주류사회와 경쟁하도록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130억달러의 리저널 뱅크 ‘뱅크 오브 호프’를 운영하려면 현재보다 더 열심히 모든 임직원들이 도전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제는 ‘우리 커뮤니티가 과연 이 거대한 조직을 키워나갈 인재와 시스템이 되어 있는가?’하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보다, 능력과 꿈이 있는 코리안 아메리칸에게 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역량있는 일꾼들이 ‘자, 여기 코리안 아메리칸이 미국에 있다’라는 사실을 주류사회에 보여주자는 것”이라며 “미국 경제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꿈을 펼치도록 하는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아메리칸 드림이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바램은 이런 젊은이들이 우리의 은행을 주류사회에서 잘 키워나갈 때, 이를 소나무 밑에 앉아 보며 “저것이 흐믓한 기업이구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꿈은 당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그는 “허드슨강 항구까지 오는 것이 우리의 1세들의 역할이고, 강을 건너 주류 사회로 진출하는 것은 바로 2세 젊은 세대들이 해야할 과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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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나스닥에 상장 되어 기뻐하는 김상훈 이사 (맨 오른쪽)

한국 대기업들을 끌어 들이는 노력 기울여야

그에게는 근심꺼리가 있다. 한국에서 들어오는 많은 기업들은 우리 커뮤니티와 상대를 안하려고 한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또 다른 걱정은 우리의2세들이 한인 커뮤니티에서 발전을 도모하지 않고, 커뮤니티에서 이탈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중국계로 아시아권 최대의 이스트 웨스트 뱅크에는 중국 본토에서 돈이 몰려들고 있는데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현상을 보기가 힘들다. 삼성이나 현대같은 대기업들이 이곳의 한인 은행들을 상대 안한다는 것이다. 그가 젊은 세대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시대감각이고 한국인의 얼이 합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것이다.

우리 1세대는 ‘2+2=4’라는 고정관념에 묶여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생각하는 컨셉이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2+2=4’가 아니고 100이나 200, 그 이상으로 계산법이 나오게 만드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 세대는 부모와 세대차이가 있다고 여겨 왔는데, 우리와 자식 세대간에도 세대차이가 클 줄을 몰랐다. 하루는 그가 아들과 세대차이에 대해서 대화를 가졌는데 아들이 하는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 저와 동생이 불과 3살 차이인데도 세대차이를 느끼는것이 요즘 젊은 세대랍니다.” 이처럼 젊은세대와의 세대차이는 비즈니스면에서도 확연히 다르다고 했다. 우리 세대는 제품을 만들어 팔러 다녔다. 즉 바이어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요즘 젊은세대는 팔러 나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마케팅을 한다는 것이다. 한 예로 의류나 신발류를 팔 때, 그 의류나 신발을 춤추는 모델에게 입히고 싣게 만들어 그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홍보하여 구매욕구를 충족시킨다. 이같은 동영상을 본 틴에이저들이나 젊은 세대들은 가격을 따지지 않고 그 제품들을 사게된다.

비즈니스 컨셉이 다르다. 돈을 버는 방법이 우리세대와는 다르다. 마케팅을 하는 방법 자체가 틀리다는 것이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옷장사 역사를 보면 제이 크루, 리바이스, 바나나 리퍼블릭도 이제 유행에서 지나갔다”면서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명품’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마케팅으로 명품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뜨는기업은 비행기 이륙현상처럼 뜰때는 수직상승곡선으로 대박을 터뜨린다”면서 “예전에는 재벌이 되려면 2대나 3대를 가면서 이뤄 졌지만 요즘에는 당대에 재벌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물론 당대에 망하는 기업도 수두룩하지만, 내가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마케팅의 새로운 기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경험을 들려 주었다. 그는 TMECCA, Inc라는 회사로 돈을 벌려고 했는데 비즈니스의 가장 중요한 요인을 몰랐다는 것이다. 우선 IT에대한 지식이 없었고, 바이어에 대한 마케팅을 몰랐고, 또한 엔터테인 등 3가지를 몰랐기에 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쉬지 않고 시대변화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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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뿌리정신으로
미국 사회와 동반관계 형성해야

한국의 얼을 심은 훌륭한 미국시민으로 키우는 것이 바로 ‘영토확장’

지난 세월에서 미래의 발전적 기반 찾아내야

1990년대 부동산 시장에 대폭락이 왔다. 젊은 세대들은 그 이유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때 왜 그런 현상이 일어 났는가를 알아보는 지혜가 아쉽다는 것이다.

최근 에릭 가세티 시장이 최저임금 인상안을 발표했을때 나는 은행에 물었다. “이렇게 되면 영세 기업이나 노동집약적기업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연구해봐라”고 또 부동산 경기가 전국적 위기 중에서도 유독 LA에 불어 닥친 특이한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물었다.

“당시 미국의 대기업들이 500명 종업원들을 거느리고 오피스 빌딩에서 운영하다가 90년 부동산 위기 전에 코리아타운을 빠져 나갔다”면서 “그 자리를 한인들이 채웠다. 그러나 미국 기업 500명 자리를 채운 한인 회사들의 고용인원은 겨우 5-10명 정도였다. 그래서 미드 윌셔 근처 아파트 경기는 다 죽었던 것”이라고 했다. “고용창출이 없어졌다. 그나마 있던것도 빠져 나갔다. 타주로도 이주했다”면서 “이런 현상들을 분석 연구해야 타운이 살아나갈 방도를 찾는것이 아닌가”

그는 또 “LA에 최저임금이 크게 오르면 우선 봉제공장을 운영하기가 힘들어졌다”면서 “ 전세계적 으로 임금이 올라 가면 경쟁이 되지만 LA만 최저임금을 올리면 외부에서 오는 물량과 경쟁이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봉제공장에서 야기된 실업자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코리아타운을 포함해 주변에 아파트를 어마하게 짓는다. 모두가 큰 회사들이 건설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10,000유닛이 건설 중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우리 커뮤니티에 다운타운에 땅값이 스케어당 200-300불이다. 과거에는 50불때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 때보다 지금은 더 잘 짓는다. 그러면 렌트비를 얼마를 받어야 하는가. 적어도 2000불이상 받아야 한다.

여기에 인건비 등이 상승되어 렌트비가 2500불이면 누가 이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을가. 한달 수입 10,000짜리도 힘들다. 예전에는 코리아타운에는 이민을 막 온 사람들이 살았다. 이제는 힘들다. 그런데 계속 아파트 건설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런면을 연구를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자, 프리웨이가 73번이 새로 건설된다. 왜 들어서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면서 “시티플랜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바로 대답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 커뮤니티는 공부를 안한다”며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한인 커뮤니티를 성장시키려면 우선 한인 금융권이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양인지술·견인지술·용인지술’은 리더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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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캘리포니아 클럽에서 있었던 은퇴식에서 직원들의 축하와 감사 인사를 받고있다.

그는 “경영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이다”면서 “사람을 볼 줄 알고 키울줄 알고 제대로 쓸줄 알야 한다는 것. 바로 ‘양인지술∙견인지술∙용인지술’은 모두 리더가 잘해야 한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인재등용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비즈니스 경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것은 자만심이다”라고 말하면서 “자만심이 커지면 주위의 충고도 듣지 못하고 무리수를 두게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때로는 위기가 닥치겠지만 현명한 판단을하면 위기를 이겨낼 수 있다”고 덧붙히며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비지니스에서 가장 중한 기본임을 잊지 말아야함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업이 성장하려면 눈을 크게 떠서 인재를 찾아야 한다”면서 “인재는 돈을 투자 해서라도 찾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커뮤니티가 돈을 절약해서 갑부가 되는 것 보다, 이제는 10만불 투자해서 20만불, 50만불 수익을 내는 것이 기업가 정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거대 기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직원들이 죽기 아니면 일을하는 풍토조성이다”면서 “복지와 교육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꿈을 심어 주어야 한다”면서 “대리가 되겠다는 것보다 행장이 되겠다는 꿈을 꾸어야 한다. 전 직원이 행장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이 중요하다. 그리고 다음이 복지다”고 밝혔다. 또 “이 조직에 들어오니 내가 꿈을 펼치면 높은 직책으로 저렇게 되는구나라고 해야된다”면서 “퇴직을 하면 저 사람처럼 도태 되는구나를 실감해야 한다”면 “누구나 왜 열심히 해야하는 꿈을 꾸게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예로 “고객을 한사람을 친구로 만드는 것보다 내 세일즈맨으로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면서 “세일즈맨으로 만들어 100시간 일하면 백명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설명했다. 그리고는 “은행을 위하는 것보다 고객의 입장에서 일해라. 그러면 고객이 너의 세일즈맨이 될것 이다”면서 “때로는 기지를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정치 기웃거리는 한인회에도 일침

김 전 이사는 은퇴를 하면서 새삼 자신을 둘러보게 된다고 했다.

그는 “나이와 건강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무엇보다 오늘을 정확히 모르는데 어떻게 내일의 감을 잡을 수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가정을 더 생각하게 된다며 “지금까지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가족들과의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고 남은시간 부인과 가족들과도 더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부인과 손잡고 여행 다니고 싶다고도 말하며 소년처럼 수줍어 하기도 했다. 또 평소 소홀히 했던 친구들도 더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커뮤니티 이슈로 대화가 이어졌다. “우리 커뮤니티는 한인회를 구심점으로 뭉쳐야 한다”며 “국내 정치에 비례대표나 하려는 그런 한인회 참여는 사라져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인회 위상이 제대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 커뮤니티를 언급했다. “과거 유대인과 비즈니스로 친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는데 조화도 안받고 해서 너무 섭섭해 나중에 어떻게 하면 되는가라고 물었다”면서 “그쪽에서 나온 두가지 옵션이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나는 ‘시티 오브 호프’ 라는기관이나 또는 유대인협회에 고인의 이름으로 도네이션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처럼 우리 커뮤니티에도 도네이션을 하고싶은 기관이나 단체가 있어야 한다”면서 “우리 언론도 커뮤니티의 어두운면만 부각시키기 보다 때로는 이런 훌륭한 단체도 있다고 소개해 한인들이 도네이션을 할 마음이 생기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돈만 주면 싸움박질 하는 풍토에 누가 내놓을 것인가.”

“지난 911사태당시 내 아들이 미국이 어려운 상황인데 무언가 미국을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면서 “120만 달러를 적십자에 기부하는 운동을 벌인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아들은 자기와 친구들이 100만불을 모금 할 터이니 아버지 친구들이 20만불을 모금해 달라고 했는데 부끄럽게도 해주지 못했다”면서 “그 다음에 안타까운 것은 이들 2세들이 한인타운을 기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날 능력있는 한인 2세, 3세가 많은데, 왜 우리 커뮤니티에서 발을 못 붙이는가” 라며 “우리 세대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한인사회 미래는 암담하다”고 말했다.

“LA시와도 한인 커뮤니티가 무언가 해야 한다”면서 “LA시가 요구하는 사항과 주는 사항은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이스트 웨스트 뱅크는 LA시의 어카운트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 한인은행은 그런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미국 전체 인구의 1% 정도지만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평가는 더 높을 것이라며 훌륭한 지도자들이 나와 조사를해서 한국에서 진출한 기업들과 동포 기업들이 합해 경제적 정치력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우리의 경제력을 제대로 평가하여 목표를 정하고 한인 커뮤니티를 이끌고 나갈 바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꿈과 소망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70대 청년

그에겐 많은 꿈이 있다. 한국에서 진출한 여러 대기업들과 함께 BBCN등이 합작으로 한국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제안했다. 그래서 자랑스런 한국을 홍보하면서, 미국인에게 코리아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우리의 2세에게는 자랑스런 얼을 심게 하자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많은 2세, 3세들은 한국의 진면목을 모르고 있다”면서 “지금 5천년 역사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남을 돕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다. 역사 이래 우리가 언제 남을 도왔는가. 세계 각국에서 우리 젊은 세대들이 많이 돕고 있다”

인터뷰가 끝나는 마당에도 그는 또 꿈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 뿌리를 둔 정체성으로 이익을 커뮤니티에 환원시키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면서 “커뮤니티 활성화 기금을 만드는 일에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참여를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한인 커뮤니티를 키우는 운동, 공동체 이익을 위하는 운동, 그것이 그가 남은 생애에 걸어보는 ‘꿈’이라 했다.

76세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이상과 생각 그리고 사업감각, 남다른 톡특한 패션 스타일은 30대에 뒤지 않을 만큼 변화무쌍하다. 새로운 도전과 삶을 꿈꾸고 있는 김상훈 전 이사의 긴세월 파란만장한 생 만큼이나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아름다운 야망과 도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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