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특별발굴비화 1] 뉴델리 3자회담 월남억류외교관석방협상 ‘시작과 끝’

■ ‘한국, 의도적으로 北 협상결렬지시’ 첫 확인

■ 1979년 5월 자력구출 확신-테이블 뒤 엎어

■ 특별훈령 ‘북한에 책임통보하고 결렬시켜라’

이 뉴스를 공유하기

박정희 특별 비밀명령하달 [79년 8월]
자력구출 판단 협상 의도적으로 뒤 엎다

박정희베트남 억류 외교관 석방을 위한 뉴델리 3자회담은 북한과의 협상없이 자력구축이 가능하다는 우리정부의 판단에 따라 우리정부가 협상을 의도적으로 결렬시켰다는 사실이 사상 처음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우리정부는 협상을 결렬시킨 지 약 11개월 만에 월맹과 북한에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우리외교관들을 무사히 구출시킨 것이다.
또 뉴델리 3자회담은 프랑스를 통한 우리정부의 제안을 월맹정부가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됐고 이병호 현 국가정보원원장도 한때 우리측 협상대표로 참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보가 입수한 베트남 억류외교관 석방교섭 문서철을 중심으로 협상의 전말을 짚어 보았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베트남 억류외교관 석방과 관련, 과연 우리정부가 북한에 인도한 21명을 누구로 선정하느냐를 두고 지루한 줄다리기가 6개월째 계속되던 시점, 우리 협상대표단에게 뜻밖의 훈령이 하달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훈령의 골자는 ‘의도적 회담결렬’지시였다.
1979년 4월 26일 북한측은 남한출신 독신자인 신영복, 이재학 등은 북한에 인도돼도 비인도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요청할 정도로 이들의 송환에 집착했다. 그리고 북한측이 요구하는 인원은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던 주장에서 탈피, 우리가 제시한 인원 중 10명을 수용하겠다는 제의까지 한다. 이처럼 인도대상자 선정이 막 타결되려던 시점에서 우리대표단은 특별훈령을 받게 된다.

특별훈령 대표단에 하달

특별훈령이 협상대표단에게 하달된 시점은 1979년 5월 20일이었다. 발신자는 박동진 외무부장관, 수신자는 이범석 인도주재 한국대사였다. 특이한 것은 이 훈령은 타이프라이터로 타이핑된 것이 아니라 손을 쓴 훈령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특별한 훈령이었다.

이 훈령의 제목은 ‘3자회담 특별훈령’이며 ‘타전용’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즉 외무부에서 전신을 통해 타전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내용은 이랬다. (1) 본부는 현재 진행 중인 뉴델리 3자회담에 관한 특별훈령을 휴대한 인사를 파견할 것임 (2) 향후 훈령 도착 시까지 북측으로 부터의 어떠한 회담제의에도 일체 응하지 말것 (3) 훈령지참자의 인적사항 및 도착항공편 별도 하달할 것임, 끝’이었다.
즉 훈령은 인편으로 전달할 것이니 그동안 일체 회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회담을 말라는 내용 외에는 다른 중요한 내용은 일체 없었던 것이다.

▲ (왼쪽)3자회담 특별훈령 타전용 ▲ 3자회담 특별훈령 휴대용 -즉시 결렬시키고 북한 책임을 전가하고 최후통첩할 것.

▲ (왼쪽)3자회담 특별훈령 타전용 ▲ 3자회담 특별훈령 휴대용 -즉시 결렬시키고 북한 책임을 전가하고 최후통첩할 것.

그리고는 또 한통의 훈령이 외교사료 속에서 발견됐다. ‘외교부장관 훈령 –휴대용’이었다. 역시 한자 한자 손으로 쓴 훈령이었다. 훈령의 제목은 ‘3자회담 대표단에 대한 훈령’으로 이것이 바로 타전용에서 말한 특별훈령을 휴대한 인사가 소지한 훈령인 것이다. 이 휴대용 훈령은 놀랄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 문장은 훈령의 배경을 담고 있다. ‘뉴델리3자회담 타결을 위한 아[우리정부] 대표단장을 비롯한 전대표단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괴의 무성의한 태도로 말미암아 11개월이 경과한 현재까지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시간낭비이므로 아래와 같이 훈령을 하달하니 극도의 보안을 유지, 실시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회담결렬 북한에 책임전가

훈령내용은 모두 5가지였다. 첫째, 현재 진행 중인 회담은 적절한 명분을 내세워 모양 좋게 즉시 결렬시킬 것. 결렬이유는 억류 중인 우리외교관에 대한 구제책을 다른 방법으로 강구할 수 있는 전망이 있기 때문임이었다. 다른 구출 계획이 있으니 결렬시키라는 것이다.

▲ 중앙정보부, 뉴델리 3자회담현황보고 - 최초대표명단

▲ 중앙정보부, 뉴델리 3자회담현황보고 – 최초대표명단

‘둘째, 향후 북괴 측에서 회담계속을 종용하는 태도로 나오더라도 북괴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명분을 내세워 회담을 결렬시키고 이를 정식으로 북괴 측에 최후 통첩할 것. 셋째, 회담결렬직후, 월남 측에 대해 북괴의 무성의한 태도 및 비인간적 처사로 인하여 북괴와의 화담의 지속은 무의미하며 시간낭비이므로 부득이 회담이 결렬됐음을 정식으로 통고할 것. 넷째, 동 회담결렬사실을 인도정부측에도 적절히 통보하되, 결렬책임을 북한 측에 있다는 점을 설명해 둘 것, 다섯째 회담대표단은 상지조치 완료 후 철수할 것,’ 이었다.

즉 회담을 결렬시키되 북한 측에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북한 측과 월남, 인도 측에 이를 통보하고 철수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정부가 자신있게 회담을 결렬시킨 것은 북한과 협상 없이 자력구출이 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같은 훈령에 따라 우리대표단은 북한이 비협조로 더 이상 회담을 지속할 수 없다고 통보하고 관련국에도 이를 알린 뒤 5월 27일 뉴델리를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외교사료를 살펴보면 그 같은 판단의 배경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국제정세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1979년 1월 12일 AP, UPI, 로이터등 외신들이 일제히 북한 노동신문의 1월 12일자 사설을 보도했다. 북한은 이날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월남이 캄푸차[캄보디아]의 독립과 주권을 유린했다’며 ‘월남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월남의 무력침공은 국제법위반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신용추락’이라고 맹비난했다. 즉 월맹이 자신들의 우방으로 생각했던 북한으로 부터 맹비난을 받은 것이다. 우리 측은 이 같은 사실을 월맹 측에 넌지시 설명하고 외신기사 사본 등을 모두 전달했다.

월맹측, 대표단에 우호적 입장취해

월맹측은 비슷한 내용의 방송만 봤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월맹은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노발대발했음이 분명하다. 특히 북한이 월맹과 중국과의 대립에서도 중국을 적극 지지한다는 사실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월맹측은 한국외교관과 북한 간첩과의 교환비율협상에서 우리 측에 무조건 1대7을 받아들여라, 외교관문제는 북한의 동의하에 처리가 가능하다는 등 북한에 유리한 발언을 거듭했으나 이 사건이후 자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월맹측은 간헐적으로 우리 측과 접촉하면서 비공식적으로 북한의 주장이 비합리적이라는 등 우리 측에 우호적 입장으로 변한 것이다.

또 같은 시기 스웨덴정부를 통한 석방교섭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스웨덴 정부가 마치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정보부는 무기상 아이젠버그를 통한 협상라인을 가동하고 있었다. 이같은 기류에 따라 우리정부는 마침내 자력구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외무부장관 특별훈령이 하달된 날 중앙정보부도 ‘뉴델리 3자회담 현황’이라는 대통령 보고자료를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77년 4월 28일 우리정부가 프랑스정부를 통해 월남 측에 3자 협상의사를 전달했고 이듬해인 1978년 6월 12일 월남측이 공식적으로 우리정부와 북한에 3자회담을 제의함으로써 뉴델리회담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자력구출 확신 극적인 모멘텀

이에 따라 3자 예비회담이 1978년 7월7일부터 15일까지 6차례, 3자본회담이 1978년 7월 29일부터 10월 11일까지 14차례, 남북한간 비공식회담이 1978년 10월 13일부터 11월 9일까지 14차례, 남북한간 비공식접촉이 1978년 11월 11일부터 1979년 5월 17일까지 37차례, 한국-월남간 비공식접촉이 1978년 10월 27일부터 1978년 5월2일까지 11차례가 열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월맹측은 1978년 10월11일 제14차 3자본회담까지 참석한 뒤 남북한 합의 때까지 회담에 불참하겠다고 밝혀, 그 이후에는 계속 남북한간의 비공식회담과 접촉만 열렸던 것이다.

▲ 1979년 1월 8일 이병호 현 국정원장, 뉴델리3자회담 투입

▲ 1979년 1월 8일 이병호 현 국정원장, 뉴델리3자회담 투입

특히 박대통령은 1979년 4월 30일 인도정부가 월남을 설득해 3자회담 타결에 영향력을 행사토록 하라고 지시. 서울에서는 박동진장관이 주한인도대사를, 인도에서는 주인한국대사과 인도외무차관등에게 이를 요청했다. 그러는 와중에 5월1일부터 5월 20일 사이에 우리정부로서는 자력구출을 확신할 수 있는 극적인 모멘텀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78년 7월21일 우리측 수석대표는 윤하정 주 스웨덴대사, 북한측 수석대표는 조명일 조국평화통일위 부위원장이었으며 우리측 교체 수석대표는 이범석 주 인도대사였다. 그 이하 우리 측 대표는 하태준 중정 1차장보, 공노명 외무부 아주국장, 송한호 중정 아주과장이었으며 북한측 대표는 박영수 조평통 참사, 한영국 조평통 참사, 김완수 외교부과장등이었다. 회담결렬직전인 1979년 5월 17일 현재 대표단은 우리측은 수석대표는 공석인 반면 북한은 조명일이었으며 교체 수석대표는 이범석 주인도대사, 북측은 유태섭 주인도대사였다. 우리측 대표단은 주동운 주인도대사관 공사, 송한호 중정 회담사무국대표, 조광식 중정 인도파견관이었으며 북한측은 김혁철 조평통과장, 김찬식 조평통과장으로 확인됐다.

이순홍 교민회장 석방에 지대한 공로

1979년 1월 8일 당시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던 이병호 현 국가정보원장도 하태준 중정 1차장보와 교체돼 뉴델리 3자회담에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병호원장은 당시 공사라는 직책으로 대표로 참가했고 약 한달 뒤인 2월 5일 송한호 아주과장이 공사로 승진, 이원장의 자리를 이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원장은 아주 잠깐 뉴델리협상에 참여했던 것이다.

한편 베트남 치하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대용공사 등 3명의 외교관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이순홍 당시 베트남한인교민자치회 회장은 1979년 5월 15일부터 18일까지 잠시 베트남 경찰에 억류됐다가 풀려났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회장은 억류공관원 건강이 이상이 없으며 불원간 귀국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고 1979년 6월 16일 억류공관원이 가족앞으로 보내는 안부편지 3통을 프랑스대사관을 통해서 접수했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슷한 시기인 1979년 6월4일에서 9일사이 스웨덴 정부는 콜롬보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 참석한 월남외무상이 태국방콕에 도착했을때 스웨덴대사를 통해 외교관 조속석방은 물론 스웨덴정부가 외교관 송환지원용의가 있다고 밝혔고 월남외무상이 귀국을 위해 방콕에 도착했을때 다시 석방을 요구하는등 본격적인 석방노력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회담결렬 11개월만인 1980년 4월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우리 외교관들은 모두 석방된 것이다. 결국 회담결렬이라는 판단이 정확했던 셈이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