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성녀 반열에 오른 ‘마더 테레사’ 수녀의 존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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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현대판 죄악’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The poorest of poor)을 위해 한평생을 살고 20년 전 선종한 마더 테레사 수녀( Mother Teresa,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가 타계한 지 20년이 되는 지난 4일 성인 반열에 올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과 그녀를 추앙해 온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됐다. 4일 로마 바티칸 대성당 광장에서 거행된 시성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추대해 달라는 요청을 라틴어로 3차례 받았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시 라틴어로 “마더 테레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인으로 선포하고, 성인 명단에 올림으로써 마더 테레사는 교회 전체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라고 선포 함으로써 테레사 수녀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이로써 20세기를 걸쳐 우리와 거의 동시대를 산 ‘가톨릭의 두 개의 큰 별’, 즉 요한 바오로 2세 교황(2014년 시성)과 마더 테레사 수녀가 모두 성인 반열에 올랐다.
성 진 (취재부 기자)%eb%a7%88%eb%8d%94%eb%8d%b0%eb%a0%88%ec%82%ac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강론에서 “테레사 수녀는 지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서 신의 존귀함을 보고 몸을 낮췄다”며 “가장 가난한 이들을 돌본 테레사 수녀는 오늘날 크리스찬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테레사 수녀는 세계의 권력자들에게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빈곤이라는 범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냈다”며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질타했다. 교황은 특히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빈곤의 범죄”라는 표현을 되풀이해 강조했다.

교황은 전날에도 “굶주림과 질병, 착취로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엄중한 현대판 죄악”이라고 경고했다. 4일 시성식 뒤에 열린 오찬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초대받은 노숙자 1500여 명이 ‘사랑의 선교회’ 수녀 및 성직자들과 함께 앉아 피자를 먹었다.

시성식을 전후해 바티칸에서는 테레사 수녀를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다.
시성식 전 2일 밤에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테레사 수녀의 봉사 정신을 기억하고, 전 세계 빈자와 약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철야 기도가 열였고, 3일 오전에는 테레사 수녀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전 세계 자원봉사자들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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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더 테레사의 초상화가 있는 신도들 사이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입장하고 있다.

하느님 사랑과 자비 전하는 실천의 표양

3일 밤부터는 로마의 한 성당에서 테레사 수녀의 삶과 신앙생활, 그가 남긴 메시지 등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회가 이어졌으며 테레사 수녀가 선종한 날인 5일을 비롯한 금 주 내내 미사 등 종교 행사를 비롯한 다양한 축하 의식이 계속됐다.
그리고 7∼8일에는 테레사 수녀가 로마 체류 시 머물렀던 콜로세움 인근의 산그레고리오 마뇨 성당의 수녀원의 방도 일반인에게 개방된다. 이 성당은 테레사 수녀가 1950년 설립한 ‘사랑의 선교회’ 로마 본부 역할을 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 시성은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고, 그 실천의 표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마더 테레사는 살아생전 50여 년 동안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거리를 떠도는 가난한 아이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피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 한 사람이다. 그가 말과 행동으로 전한 사랑의 메시지는 종교와 이념을 초월해 퍼져나가면서 개인 이기주의와 물질만능 주의에 빠져드는 인류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hero)과 명성 (celebrity)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유명 스포츠맨, 연예인 또는 정치인이나 부자들은 명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영웅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으로 돈을 벌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들이다.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테레사 수녀가 선종한 지 불과 2년 만에 성인보다 한 단계 낮은 ‘복자’ 로 추대하는 시복 절차를 개시해, 2003년 그를 복자 품위에 올렸다. 시복의 필수 조건인 ‘기적’으로는 1998년 위 종양을 앓던 인도 여성 모니카 베스라(49)가 테레사 수녀의 기도와 돌봄으로 치유된 사례가 인정됐다. 앞서 1986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콜카타를 직접 방문해 테레사 수녀의 활동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교황청은 이어 지난해 12월 다발성 뇌종양을 앓던 브라질 남성 마르실리우 아다드 안드리누(43)가 2008년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한 뒤 완치된 것을 두 번째 기적으로 인정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소 ‘청빈’을 강조해온 데다, 지난해 12월 선포해 올해 11월 막을 내리는 ‘자비의 희년’에 맞춰 테레사 수녀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했다.

마더 테레사와 같은 영웅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인도 여성의 전통 복장인 줄무늬 사리 수녀복을 입고, 깊게 주름 팬 얼굴로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그녀 모습을 ‘소중한 흑백 사진’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번 시성식을 통해 다시 한번 마더 테레사가 남긴 사랑의 메시지와 영적 유산을 되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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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더 테레사 시성식이 개최된 바티칸 광장

사랑의 선교 수녀회(Missionaries of Charity)는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수도회로, 현재 약 150개국 에서 4000여 명이 거리와 빈민가에서 사랑의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일평생 가난한자와 믿음과 희망의 동반

마더 테레사는 평소 “당신이 크리스천이 된다면 우리는 당신을 도울 거예요”(I’ll care for you if you become a Christian.)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무조건 사랑(Unconditional Love)이 그녀의 삶이었다.

행동하는 사랑 마더 테레사, 그가 걸어온 길, 그리고 그 길의 단순함에 대하여 아주 명쾌하게 답 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는 “내가 걸어온 길은 단순합니다. 믿음을 갖고,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버려진 아이들, 병든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세상에 등불을 밝힌 마더 테레사는, 120개 이상의 국가에서 희망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에 평생을 헌신했다.

허물어진 나병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악취 나는 몸을 씻겨주고 죽어가는 에이즈(AIDS) 환자를 끌어안는,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내어주는 자기희생과 그칠 줄 모르는 그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어떻게 한 여성이 그렇게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이 겸손한 수녀가 지구상의 수백만의 삶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근본 철학 은 무엇일까?

“옷 두 벌, 샌들 한 켤레, 물통 하나, 접시 한, 그리고 빈약한 침구가 내가 가진 전부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은폐된 가난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마더 테레사의 염원이다. 그 은폐된 가난은 겉으로는 가난하지 않아도 사랑의 허기로 가득 차 있는, 지금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마더 테레사를 <살아 있는 성인>으로 부르는 것은 <균형>이라는 개념과 관계 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기도하고 관상하는 삶과, 행동하는 사랑의 실천적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 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이것이 마더 테레사가 말하는 단순함이다. 그에게 산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이 <단순함>과 <자기희생>이었다.

성녀 마더 데레사 ‘그녀의 발자취’

그녀는 “매일매일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나는 죽음 앞에서도 가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1996년 11월 23일, 테레사 수녀는 심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그는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병원 구경도 못하고 죽어가는데, 왜 나는 이토록 극진한 간호를 받아야 합니까?” 그는 죽음 앞에서 가난하지 못한 자신을 꾸짖고 안락한 병원 침대 위의 자신을 자책했다. 그는 그렇게 가난한 삶을 통해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의 고통을 평생 함께 나누고자 했다.

1910년 8월 26일 알바니아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마더 테레사는 열여덟 살 때 가톨릭 선교 수녀로 최초 부름을 받았다. 1931년 자신의 수도명으로 테레사(Teresa)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이는 예수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29년부터 20여 년 동안 인도 콜카타의 성 마리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결핵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대가 없이 봉사하라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1950년 인도 콜카타에 사람의 선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임종자를 위한 집, 나환자를 위한 집, 어린이들을 위한 집, 에이즈 환자를 위한 집 등을 마련하여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한 이들에게 평범하지 않은 사랑을 베풀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97년 9월 5일 심장 질환으로 8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2003년 10월 19일 테레사 수녀에 대한 성인 전 단계인 시복식이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20세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테레사 수녀는 이로써 사후 불과 6년이라는 최단기간에 복자 반열에 오르게 도는 기록을 낳았다. 가톨릭 품계에서 복자는 성인 다음이다.

마더 테레사는 생전에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면서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마더 테레사가 걸어온 길, 그것이 우리가 걸어갈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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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테레사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했다”

마더 테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네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도 다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생활은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네스는 소녀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수도단체) 신부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열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데레사는 먼저 아일랜드로 가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한 아네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 외의 테레사(Teresa)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테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테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테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 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마더 테레사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연민에 찬 활동만은 아니다.
마더 테레사가 리지 외의 성녀 테레사를 수도 명으로 택한 것을 보면 그분의 선교 활동이 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더 테레사가 이름을 따온 성녀 테레사는 프랑스 리지 외에서 보석상의 막내딸로 태어나 1888년 열다섯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소명은 <사랑>이며 가장 큰 의무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몸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순성, 희생정신, 관용으로 가득한 영성, 즉 복음의 근본 진리로 향하는 건강한 영성의 길을 따랐다.

마더 테레사는 <나의 작은 길은 영적인 어린이 됨의 길, 절대적인 신뢰와 자기 포기의 길이다>라고 했다.
리지 외의 테레사는 자신을 <아기 예수의 손에 있는 공>으로 비유한 반면 마더 테레사는 신뢰와 자기 포기라는 단순한 길을 좀 더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있는 연필>이라고 불렀다.

마더 테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는 식량은 아주 적고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데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마더 테레사가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 테레사가 교사에서 종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에서 예외적인 신앙과 뛰어난 비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옮겨가는 허락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성 마리아 학교에서 19년 동안 마더 테레사와 함께 일한 수녀님들 중에는 그 시절 마더 테레사는 몸이 허약하고 아주 평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마더 테레사에게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하늘과 땅>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얻었다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 수 있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테레사는 자신의 성덕의 진보에 대해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진보를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에게 거룩함이나 성스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거룩함은 필수품입니다. 그것은 수도자 등 소수에게 맡겨진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출처 : 사랑의 선교 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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