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 인터뷰] 뇌졸증으로 쓸어져 재활치료 받고 있는 코메디안 쟈니 윤의 화려한 어제와 쓸쓸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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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을 처음으로 웃긴 한국인”, ‘쟈니 윤’의 서글픈 노후

“다시 세상으로 나가 웃기고 싶어요”

쟈니 윤(80, Johnny Yune, 윤종승(尹宗承).
한때 “코미디계의 대부”로 불렸으며 화려한 스포트를 받던 쟈니 윤씨가 국내에서 공직생활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 중 뇌출혈로 병원에서 치료받다 지난 7월 21일에 그의 제2의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와 지금 오렌지 카운티의 한 양로병원에서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기자가 지난 23일 오후 2시 30분 오렌지카운티 터스틴 케어센터(Tustin Care Center)를 방문했을 때 그는 정원 의자에서 오래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보행기(워커)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기자를 보며 “오래만이다. 반갑다”면서 기자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했다. ‘이곳 케어 센터 생활이 어떻냐’는 질문에 “죽을 맛이다”라고 했다. 한때 미국과 한국에서 인기 절정을 구가하며 활동하다가, 지금은 걷기조차 힘들어 남의 부축을 받아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 같았다. 그러면서 그는 “꼭 다시 사회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지도 나타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쟈니윤이날 만난 윤씨의 모습은 TV 스크린이나 과거 타운에서 본 여유 있고 활기찬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흰 눈썹, 흰 머리카락, 주름들이 깊게 파인 얼굴, 환자복 바지 차림은 이 양로병원에 있는 다른 노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기자가 ‘누가 찾아오는가’라고 묻자, 그는 “친구들이 찾아온다”라고 힘 없이 대답했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는가’라고 물었는데, “가고 싶지만 돌아갈 내 집이 없다”라고 탄식하면서 모든 걸 포기한 듯 한 마리 사슴처럼 슬픈 표정을 지었다.

기자가 다시 ‘아니 그 많이 번 돈을 어떻게 하였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하늘만 처다 보며 더 이상 체념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날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화려했던 명성과 달리 80세의 쟈니 윤은 그저 평범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쟈니 윤을 알아보는 양로원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연예인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박근혜 대통령 때문에 정치바람에 물들었던 쟈니 윤은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LA 방문 시 사회를 보는 등 남다른 인연을 과시했지만 결국 2년 동안 월급 4백만 원의 한국관광공사 감사를 지내다 퇴직 후 다시 LA로 돌아와야만 했다.

아직도 꿈을 꾸는 80세 청년의 현재와 미래

이날 기자와 함께 간 우리 병원의 알버트 안 메디칼 닥터는 윤씨의 신체 동작 여러 부문을 직접 검사했다. 닥터 안은 쟈니 윤씨에게 손목 잡기, 팔 들어 올리기, 양손으로 주먹치기, 발 들어 올리기, 발차기 등등을 보고서 “과거에도 운동을 많이 한 경력이 있어 아직도 손과 팔에 힘이 있다”면서 “앞으로 집중적인 재활 운동을 한다면 3-4개월 후면 정상적인 걷기로 회복될 것”으로 전망했다.

윤씨는 이번 뇌출혈로 쓸어지기 전까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생활의 한 과정으로 열심히 해왔다. 그래서 70대 때까지만 해도 배에 왕(王) 자 근육이 보일 정도였다.

과거 한때 LA에서 윤씨의 주치의기도 했던 닥터 안은 “살고 싶다는 본인의 의지가 강해 마음만 먹으면 정상적인 사회활동도 가능하다”면서 “그가 좋아하던 골프도 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닥터의 말에 윤씨는 눈 빛이 달라졌다. 그는 “회복되어 전처럼 사회에서 활동하고 싶다”면서 “닥터 안이 권고 한대로 매일 열심히 팔다리 운동을 하겠다”라고 의지를 보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의 눈은 똘망똘망 슬퍼 보이기만 했다.

기자가 ‘여기서 나갈 때 이곳 환자들을 위해 한바탕 웃기고 세상에 나가라’고 하자, 그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주위에서는 불혹을 지난 나이에도 열정을 불태우는 윤씨에 대해 “감각을 잃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유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의 남은 꿈은 오래전 미국 올 때 지녔던 영화 제작과 ‘쟈니윤 & 줄리아’ 복지재단 설립이다.

이날 윤씨와 만나고 있는데 전부인 줄리아 씨가 방문 했다. 줄리아 씨는 “우리는 이혼했지만, 누가 돌 봐줄 사람이 없어 내가 돕고 있다”면서 “오늘도 새 옷을 갈아 입히려고 옷을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치료받을 때 관광공사에서 도와주지 않아 내가 병원비를 부담했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그녀는 “아니… 내가 이렇게 돕고 있는데 H일보는 ‘홀로 투병’이라니…”면서 “신문사에 항의하고 직접 와보라 했다”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날 저녁 한국일보 기자는 병원을 방문해 윤씨와 줄리아 씨를 만난 후 <쟈니윤“상태 많이 좋아져 나름 행복하게 지내요”여유>라는 제목으로 후속 기사를 내보냈다.

그녀는 윤씨가 한국에서 지난 4월에 뇌출혈로 아산 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아 오다 지난 7월에 24시간 환자를 돌볼 양로병원을 수소문하여 현재의 터스틴 케어센터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생무상 ‘삶의 노후’를 생각하게 만든 윤씨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간이 지고 가야 할 숙명이요, 자연의 섭리다. 인생은 자신도 모르게 훌쩍 지나가 버린다.

오랜만에 만난 쟈니 윤씨의 얼굴에서 새삼스럽게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하게 된다. 예전 그의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뒤늦게 인생무상을 깨닫기도 했다.

요즈음처럼 고령화 사회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축복일까, 아닐까. 우리 이민사회에서도 넘치는 노인들로 가정도 사회도 교회에서도 어느새 새로운 고민거리(?)가 됐다고 논란들이다. 지금의 청춘들도 누구나 종말에는 다 노인으로 가지만, 지금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노인들이 살고 있다. 아들 딸을 잘 키워 크루즈 등 해외여행도 다니며 대접받고 사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자식 키우느라 모든 걸 다 바쳤으나 집도 빼앗기고 치매까지 걸려 가족과 친지들까지 만나지 못하고 쓸쓸히 살아가는 노인네들도 있다. 더구나 이도 저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노숙자 신세가 된 사람도 있다.

쟈니윤2

▲ 예전의 쟈니 윤 씨(왼쪽 위), 과거 윤씨의 주치의였던 알버트 안 닥터와 간단한 검사를 하고 있다.(오은쪽 위) 현제 쟈니윤씨가 있는 터스틴 양로병원.(아래)

노인의 4가지 고통은 빈곤과 질병과 고독, 그리고 무위라고 한다.
진정 노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미국 같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차라리 죄악시될 정도이다. 우리 타운에도 힘겨운 삶을 살아온 공로자들이 많다. 어떤 이들은 독일의 지하갱도 속에서 혹은 간호사로 혹은 월남전에서 중동에서 달러를 모아 온 역군들도 많다.

가난한 유학생으로 와서 입지전의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미국 땅의 코리아 타운을 일구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국에 돌아가 권력의 주변에서 잔머리를 굴리며 재산과 명예를 모은 유명 인사들도 없지 않다.

양로병원에서 윤씨를 만나면서 ‘행복한 노후란 어떤 것일까?’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늙는다는 것은 분명 본인의 죄가 아니다. 늙고 병드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윤씨와 절친한 선후배간인 LA 평통 임태랑 회장은 “선배 윤씨를 방문하고 나도 내 남은 인생에 대하여 새로 생각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윤씨가 거주하고 있는 양로병원을 나서면서 기자는‘가능한 친구들도 더 많이 만냐야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고 허전한 마음으로 씁쓸하게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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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니 윤, 그 화려했던 옛날이여!

“미국인을 처음으로 웃긴 한국인” … 그의 쓸쓸한 노후가 남긴 교훈

1959년 대한민국에서 방송인으로 첫 데뷔 후 1962년 해군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파트타임 가수로 출발, 코미디 클럽 무명 생활 끝에 조니 카슨 쇼에 조니 카슨의 제의로 아시아계 최초로 《투나잇 쇼》에 출연해 총 34번을 출연하고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NBC 방송국에서 ‘쟈니 윤 스페셜 쇼’를 진행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1973년 뉴욕 최고 연예인상을 수상했고, 1982년 영화 《They Call Me Bruce》에 출연해 흥행에 성공했다. 1989년 귀국하여 대한민국의 방송 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 쇼인《쟈니 윤 쇼》를 진행하였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토크쇼 페러다임 열어

KBS ‘쟈니윤 쇼’를 진행하며 국내에 본격적인 1인 퍼스낼러티 토크쇼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당시 쟈니윤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대단했다. ‘쟈니윤 쇼’는 심각한 사회 이슈를 다루면서도 적절한 유머를 구사해 새로운 감각의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았다. 토크쇼가 방송되는 날이면 온 가족이 TV 앞에 모여들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이듬해 SBS의 ‘쟈니윤, 이야기쇼’로 이어져 1992년까지 방송됐다. 당시 국내의 많은 방송국에서 그에게 장기 출연을 요청했지만 미국 코미디 쇼 무대에 복귀하기 위해 1993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한국 토크쇼의 전형이 되어 ‘주병진 쇼’, ‘서세원 쇼’, ‘이홍렬 쇼’, ‘이승연의 세이 세이 세이’, ‘김혜수의 플러스 유’ 등으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

그 후 쟈니윤은 10년 만인 2002년 iTV ‘쟈니윤의 What’s Up’과 KBS ‘코미디 클럽’으로 복귀했고, 또다시 오랜 휴식기를 가졌다.

원래 윤씨는 1962년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오하이오주로 유학을 왔다. 그리고 1965년 진로를 바꿔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자리를 옮겨 세미클래식인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타일로 변화를 시도한다. 정통 클래식으로는 생계유지가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1968년부터 호텔 극장 등에서 가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16개국 언어로 메들리를 만들어 음악 세계 일주를 시도했고, 기립박수를 받는 뜨거운 반응을 얻어냈다.

물론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그중 발음은 더더욱 큰 문제였다. 한 번은 가사에서 ‘R’과 ‘L’ 발음을 제대로 못해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화끈거릴 일이었지만 윤씨는 밴드에게 반주를 중단시킨 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음이 힘들다”며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자 관객들은 큰 박수와 환호로 답했다.

윤씨는 당시의 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진실보다 더 아름답고 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라고 2007년 미주 한국일보 황성락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회고했다.

그는 2시간 정도 이어지는 공연 중간중간에 유머를 적절히 섞어 진행했는데, 반응도 좋았고 인기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뉴욕에 발을 들여놓은 첫 해에만 7만 5,000달러를 벌어들였고, 뉴욕 지역 연예인들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연예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성악가 꿈… 미국 ‘조니 카슨’쇼에 등극

미 연예계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그는 1974년 1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LA로 무대를 옮겼지만, 영화감독의 높은 벽을 실감하곤 ‘코미디언’으로 변신을 꾀한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선셋 블러버드에 자리 잡고 있던 ‘코미디 스토어’란 전문 극장이었다. 오디션을 거쳐 2년간 매일 밤 공연을 했다. 무보수인 데다 처음에는 공연시간도 새벽 1시로 배정됐다.

이 당시 코미디언을 꿈꾸며 동고동락하던 인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영화배우로 성공한 로빈 윌리엄스를 비롯해 토크쇼 제왕으로 자리 잡은 데이빗 레터맨, 제이 레노 등도 역시 무보수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사 20세기 폭스의 부사장 앨런 라이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윤씨의 재치와 노래 솜씨에 반해 무대 뒤까지 찾아와 명함을 건네주며 “한번 찾아오라”는 말을 남겼고, 얼마 뒤 한인들도 잘 아는 한국전을 소재로 한 드라마 ‘M.A.S.H.’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본격적인 주류 연예계 진출의 시동을 걸었다.

이후 1978년까지 한인 영화인의 대부 필립 안과 ‘쿵후’를 비롯해 ‘코작’, ‘러브 보트’ 등에 출연하던 중 중요한 전기를 맞이한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생방송 토크쇼 ‘자니 카슨 쇼’에 출연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첫 방송은 두 명의 프로듀서 앞에서 오디션을 받은 뒤 곧바로 그 날 출연하면서 시작됐다. 일회 출연료가 750달러였지만 돈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얻었다. 전국으로 방송되는 이 쇼에 총 34회나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높이고, 나름대로 노하우를 쌓았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한국에서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라는 유행어를 남긴 ‘쟈니 윤 쇼’를 진행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1970년대 후반부터 그는 라스베가스로 진출, 주급 2만 5,000달러를 받으며 일 년에 26주를 그곳에서 보냈다. 또 미 전역에서 출연 제의가 쇄도해 타주 공연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골프와 테니스 실력이 라스베가스에서 공연할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공연이 밤에 열리다 보니 자연히 낮 시간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호텔 소유 골프장과 테니스장을 자주 찾게 됐다는 것.

윤씨는 1980년대 중반 애틀랜타 골든 너겟에서 만난 미 연예계의 지존 프랭크 시나트라를 잊지 못한다.
윤씨는 “당시 그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한다는 자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고 특히 ‘내가 너를 인정한다’고 말해 줬을 때는 마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장하다’고 격려해 주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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