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독립유공자 유해봉환 환송행사

이 뉴스를 공유하기

‘111년 만의 고국 땅 가는 길이 외롭다’

범동포적으로 거족적인 ‘유해봉환’으로 거행해야 할 행사는 너무나 초라했다. 한국 정부도 너무나 성의가 없었다. 이번에 LA독립운동가 유해봉환은 미주 한인 이민사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부부가 함께 조국으로 봉환되는 최초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해봉환의 주인공 강혜원 여사는 “미주 독립운동가 여성 1호”로 존경과 공경의 대상이다. 지난 12일 오전 11시 LA 한인회관에서 <김성권-강혜원 독립유공자 부부 국립묘지 유행 봉환 고별식>이 유족들을 포함해 약 60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그동안 이들 부부는 LA ‘로즈데일 묘지’에 함께 안장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조국의 국립묘지 현충원(대전)으로 안치되어 고국의 동포들의 참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LA 한인사회의 많은 동포들은 이날 유해봉환이 있는지도 몰랐고, 당연히 이들 선구자들의 숭고한 뜻을 지닌 의미도 알지 못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독립유공자-유해봉환미주 한인 여성 독립운동가 강혜원 여사는 나이 20세(1905년)에 처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 와서 나중 중가 주로 이주 1919년 3월 당시 조국에서 3.1 만세 운동이 벌어진 해에 ‘여성들도 나서야 한다’면서 최초로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바로 3.1 운동 1주년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기념하지 않은 3.1 운동 1주년을 중가주 다뉴바 다운 타운에서 3.1 운동 기념 독립 퍼레이드를 주도해 미국 땅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장본인이었다.

당시 동포사회의 남성들 위주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들은- 특히 국민회와 동지회는 견원지간 정도로 싸웠다- 서로 갈등도 빚고 분열 행위도 하였으나 여성들 단체는 그런 분열 행동이 없었다. 애국 성금만도 당시 4만여 달러를 모금했다. 이 같은 단결력은 바로 강혜원 여사의 투철한 애국심과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그녀의 남편 김성권 독립운동가도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해 나중 흥사단 이사장 등으로 포함 대한인국민회 다뉴바 지방회장 등으로 활동해 부부 독립운동가로 동포사회의 존경을 받았다. 이들 부부는 한인 동포 자녀를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하는 등 조국 독립에 일평생을 바쳤다.

이에 한국 정부는 부부의 공훈을 기리고자 강혜원 여사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김성권 애국지사에게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다.

이들이 바로 미주 한인사회의 “뿌리”인 셈이다. 이들이 우리들의 정체성의 모델이다. 오늘날 미주 한인사회의 한인회나 기타 많은 단체들은 이들 선구자들을 시초로 삼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유해 봉환 행사를 보면 한인사회가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주 독립운동사에서 “최고의 여성 독립운동가”로 일컬어지는 강혜원 여사를 111년 만에 그리운 고국땅으로 보내는 고별식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독립유공자-유해봉환2

▲ 김성권, 강혜원 유공자의 손자 브라이언 김이 추모사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 참석자는 고작 60여 명 정도였다. 이중 김성권. 강혜원 독립 유공자 부부의 유족들이 25명 정도 참석했으니 유족을 빼면 35명 정도이다. 이 중에서 주최 측인 국민회 기념 재단(이사장 권영신), 흥사단미주위원회(위원장 정영조), 광복회미서남부지회(회장 배국희) 등 3개 단체 임원들과, 이날 행사를 주관한 LA한인회(회장 로라 전), LA 평통(회장 임태랑), 미주 3.1 여성 동지회(회장 홍순옥), 한인 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 관계자들, 그리고 취재진 5명을 제하면 불과 10여 명 정도가 외부에서 참석한 한인 사회 단체장 및 관계자들이다.

이날 주최 단체와 주관 단체가 아닌 단체장 및 임원으로서는 김시면(전 LA한인회장), 위재국(재향군인회 미서부 지회장), 오은영(KOWIN 회장), 권유나(전 KOWIN회장), 김명헌(월남전 유공 자 협회장), 이병만(LA 한인재단 회장), 박상원(전미주 한인재단 회장), 한광설(통일교육위원장), 최학량(목사), 이종부(백세 노인회 이사장) 정도였다.

지난 1975년부터 해외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행사는 정부가 범정부적으로 추진해왔다. 지난 1994년 LA에서 전명운 의사 유행 봉환 행사 때는 당시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이 ‘봉환위원회’의 위원장이었고, 국가보훈 처장이 ‘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그리고 유해 봉환을 수행하는 봉환단은 보훈처 차장과 국장이 직접 LA로 와서 모셔갔다. 그런데 이번 봉환 수행 관계자는 보훈처 하위직급 직원들이었다. 보훈처 사이트에 들어가 봐도 김성권-강혜원 봉환위원회에 대한 안내가 보이지 않았다.

이날 LA유해봉환 고별식에서 행사에도 문제점이 많았다.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LA이기철 총영사 가 참석치 않고, 대신 류상민 부총영사가 참석했고, 주관단체인 LA 평통의 임태랑 회장도 참석을 하지 않고 마유진 수석부회장이 대신 참석했다. 주최 단체나 주관단체의 임원이나 회원들도 많은데 극소수 임원들의 모습만 보였다.

범동포적으로 거행되어야 할 행사가 3개 주최, 4개 주관 단체로 한정해버렸다. 그리고 행사 준비와 진행도 주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인지, 주관이 무엇을 담당해야 하는지도 헷갈리게 일을 진행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날 고별식에서 국민의례 순서도 잘못 진행했다. 어떻게 보면 국민의례가 단순한 의식에 불과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모든 행사에서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해서 하는 의식이 바로 국민의례인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례 규정[시행 2010년 7월 27일]에 따르면, 1. 국기에 대한 경례 2. 애국가 제창 3.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바른 순서이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서는 2번과 3번을 바꾸어 진행했다.

유해 봉환 품격도 낮아

1946년 민간에서 시작된 국가유공자 유해 봉환 사업은 1975년부터 정부가 맡았고 지금까지 31차례에 걸쳐 131위가 고국 땅을 밟았다.

과거의 유해 봉환은 어떻게 했는지를 보면 이번 행사가 얼마나 초라했는지를 알게 된다. 지난 1994년 4월 3일 LA 한인사회에서 거행된 독립유공자 ‘전명운 의사’와 ‘서재필 박사’의 봉환 절차 당시 조선일보와 서울신문 보도를 소개한다.

<정부는 이영덕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봉환위원회」와 이충길 국가보훈 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집행위원회」를 각각 구성, 두 분의 유해봉환을 범정부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보훈처는 「서재필 선생 유해봉환단」(단장 김시복 보훈처 차장)과 「전명운 의사 유해봉환단」(단장 신동하 보훈처 기념사업국장)을 각각 미국에 보내 현지에서 봉환식을 갖고 로스앤젤레스에서 합류, 유해를 4일 김포 국제공항에 봉영한 후 8일 국립묘지 영현 봉환관에 안치할 예정이다.> (서울신문 기사)

<LA에서 서재필 박사-전명운 의사 유해봉환 추념식은 4월 3일 LA 코리아타운 내 윌셔 연합 감리 교회에서 당시 장성길 LA 한인회장 등을 포함해 많은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범동포적으로 애국지사 두 분에 대한 넋을 기린데 이어 출발에 앞서 LA공항 귀빈실에서도 30분간 간단한 출발 예배도 드렸다.

또 대한항공 측은 두 애국지사의 유해가 탑승한 뒤 기내방송을 통해 “오늘 우리나라의 위대한 독립지사 유해를 모시고 함께 서울로 향하고 있다”며 승객들에게 엄숙을 당부했다.

LA를 출발한 서재필 박사와 전명운 의사의 유해는 4일 오후 2시 25분 대한항공 061편으로 김포 공항에 도착, 국군의장대원 10명이 도열하는 가운데 국제선 2 청사 18번 출구를 통해 고국에 첫발을 디뎠다. 유해를 실은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대한항공 측은 일반 승객들을 먼저 내보냈으며 마지막으로 유해와 유족, 봉환 단원들을 맞았다.

고인들의 영정, 훈장, 유해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차례로 운구병들의 손에 들려 입국장을 빠져나갔으며, 봉환 단장인 김시복 보훈처 차장, 서박사의 종손인 서희원 전이대 교수(70), 전명운 의사의 딸 전경령 씨(71) 등 유족들이 엄숙히 뒤따랐다.

고인들의 유해가 청사 밖을 나서자 귀빈주차장 입구에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이영덕 통일원 장관, 이충길 보훈처장, 김승곤 광복회장, 장기욱 국회 보사위원장 등 출영 인사들이 고개를 숙여 추념의 정 을 표시했다.

또 마침 공항에 있던 여행객들과 출영객들도 “유해봉환단이 지나는 동안 경건하게 추념의 정을 표시해 달라”는 공항공단의 안내방송에 따라 숙연한 모습으로 운구행렬을 지켜보며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환국을 반겼다.

이어 고인들의 영정과 유해는 오후 3시 광복회원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등 2백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각 3대의 운구차에 실려 경찰 기동순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립묘지로 향했다.

이날 오후 4시 국립묘지에서 있은 유해 안치식은 이 부총리, 이 보훈처장, 유족대표 등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종료. 두 분의 유해를 모신 6대의 군용 지프는 국립묘지 영현 봉안관(현충관)에 도착, 두 분의 유해 및 영정, 훈장의 순으로 국립묘지 의장대 20명이 도열한 가운데 현충관에 차례로 모셔졌다.

이어 유해봉환위원회 위원장인 이 부총리, 장 국회 보사위원장, 유족대표 등이 차례로 분향했다.

한편 국립묘지 측은 5일부터 7일까지 참배 기간 동안 각급 기관, 단체는 물론 일반인들의 참배를 안내했다. 두 분의 안장식은 4월 8일 하오 2시 국립묘지 현충문 앞 광장에서 유족 및 친지를 비롯해 각계각층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뒤 애국지사 묘역에 안치됐다.> ( 조선일보 기사)

————————————————————————————————————————————————————

로라전-한인회장

▲ LA한인회 로라 전 회장

LA한인회 로라 전 회장의 추모사

“이분들이  이민 선구자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애국의 마음으로 헌신하여 오신 많은 애국지사 가운데, 오늘 우리의 자랑스러운 독립지사이신 김성권, 강혜원 두 분을 고국으로 보내드리는 자리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하며, 두 분의 유해 앞에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난 5월, 제33대 한인회장으로 당선된 직후, 이민 초기 애국의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 오신 독립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그런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고자 대한인국민회관과 로즈데일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 독립지사들께 헌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러 독립지사 가운데, 여기 김성권, 강(김) 혜원 두 분의 독립지사께서 나란히 잠들어 계신것을 보며, 두 분은 정말로 하늘이 내린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서로를 사랑하시어 결혼하셨을 것이고, 나라와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머나먼 미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 헌신하실 수 있으셨는지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시며, 이런 분이 우리의 독립지사이자 우리 한인들의 이민 선구자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두 분께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대한 여자애 국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에서 행한 독립활동의 발자취는 우리 곁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과 광복회, 흥사단 등 애국단체 들을 중심으로 독립지사들의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 있어, 비록 두 분의 유해는 고국으로 갈 지라도, 평생 나라 사랑으로 사셨던 두 분의 정신과 마음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이 김성권, 강혜원 두 분을 뵙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을 방문할때 두 분께서 새로이 머무실 국립묘지에 꼭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국가보훈처에서 오신 분들도 계신 줄로 압니다. 우리의 위대한 독립지사인 김성권, 강혜원 선생님을 고국까지 무사히 잘 모셔 주시고, 앞으로도 성심을 다해 모셔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독립지사 김성권 , 강혜원 선생님, 평생 고대하던 고국 땅에서 영면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추모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