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인간승리’를 이룩한 새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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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2관왕의 일생은 ‘불사조’였다

미국 수영 영웅인 새미 리가 타계하자 AP통신, AFP통신 등을 위시해 미국의 언론들이 중요 뉴스로 일제히 보도했다. 향년 96세. 외신들은 새미 리가 지난 2일 오후 8시께 뉴포트의 한 병원에서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로즈(Roz) 여사와 딸 파멜라와 아들 새미 주니어 그리고 3명의 손자녀들이 있다. 1920년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태어난 그는 5피트(157㎝)의 단신으로 1948년 런던올림픽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우승,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인물이다. 당시 같은 대회 3m 스프링보드에서 동메달을 딴 그는 4년 뒤 헬싱키 올림픽에선 10m 플랫폼 다이빙에서 다시 금메달을 획득해 2연패 를 이뤘다. 새미 리의 금메달 2관왕은 당시 백인들이 휩쓸었던 다이빙 종목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새미 리는 한인 사회에서 “살아있는 이민 영웅”으로, 미국 사회에서는 “스포츠 영웅”으로 추앙받아왔다.
성 진 (취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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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미 리

새미 리에게는 많은 기록이 따른다. USC 출신 최고령(96세) 금메달리스트 , 최고령(32세)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1990년 미국 ‘올림픽 명성의 홀’에 헌정, 국제 수영 ‘명성의 전당’에 헌정, LA 통합교육구의 ‘고교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정. 1979년에 ‘다이빙’(Diving)이라는 책도 펴냈다.

미국에서 동양계 중에서 아마추어 스포츠 분야의 최고상으로 알려진 ‘제임스 셜리반상’(James E. Sullivan Memorial Award)을 수상했다. 닉슨 대통령과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국민보건 스포츠 대통령 위원회’ 15인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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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코리아 타운에 있는 ‘새미 리 박사 매그닛 초등학교’.

LA 코리아타운 올림픽 불러버드와 놀만디 애비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광장’이, 또 웨스트 모어랜드 애비뉴에는 ‘새미 리 박사 매그닛 초등학교’도 있다.

100년에서 4년 모자란 1세기를 미국에서 살아온 그는 ‘한국인’이라는 유색인종 때문에 엄청난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이를 극복해 ‘미국인 보다 더 훌륭한 미국인’으로 존경과 추앙을 받아 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05년에 타계한 또 다른 “이민 영웅”인 김영옥 대령과는 생전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지난 2006년 Orange County Register 지와 인터뷰에서 그는 “인종차별을 당할 때마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면서 “ 나는 한국인의 우수성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미국 사회가 나를 100% 미국인으로 받아 주도록 내 능력을 보여 주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유색인종 어린이들에게 “너희들 능력으로 실력을 보여 주어라”면서 “결코 말로 다할 줄 안다고 떠벌리지 말라”라고 말했다.

새미 리는 스포츠 스타를 지내고 군의관 생활을 마친 후 1950년 중반에 USC 출신 이비인후과 의사로 개업하고, 오렌지 카운티에서 집을 사려고 했는데 부동산 업자들이 한국계인 새미 리에게 요리조리 핑계를 대어 주택 매매를 해주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이 사실을 안 뉴질랜드의 스포츠 전문기자가 “미국에게 올림픽 금메달 2개를 안겨준 스포츠 영웅이 집을 사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면서 “이래도 미국이 평등 국가냐?”고 칼럼을 게재했다. 이 칼럼을 본 리처드 닉슨 부통령(나중 37대 대통령)이 화를 내면서 당장 새미 리가 집을 살 수 있도록 조치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의사로 활동하면서 여러 다이빙 선수를 지도했는데, 그중에서 1984년과 1988년 하계 올림픽 다이빙 부문에서 2회 연속 2관왕에 오른 그레그 루가니스가 특히 유명하다.

그는 모국 한국과 자주 인연을 맺어 여러 차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격려했으며, 1953년~1955년에는 미 8군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이필중, 조창제, 송재웅 등 다이빙 선수를 지도하고, 1964년 동경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평창의 2010년과 2014년 동계 올림픽 유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새미 리가 미국 대표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면서 착용한 운동복, 모자와 수영복은 지금 한국의 문화재로 보전 중이다.

그는 2010년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활동상을 알리기 위해 독립기념관에 직접 수영복을 기증했다. 수영복은 2012년 8월 13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0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의 체육발전을 위해 헌신한 새미 리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는 유물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

새미 리는 프랭클린 고교 시절 풋볼 선수로 날렸다. 비록 조그만 체구지만 당찼다. 그런 그가 수영 다이빙에 관심을 가지면서 풋볼을 그만두었다. 1930년대 그가 다이빙을 하면서 받은 차별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다. 백인 수영 코치들도 유색인종을 처다 보지도 안았다. 그래서 새미 리는 고등학교 흑인 수영 코치 로부터 간신히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유색 인종들은 백인과 같은 풀장에서 함께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백인 아이들이 연습하고 새로 물을 갈기 전 몇 시간만 유색인종들에게 풀 장을 개방했다. 백인 이외 유색 인종들은 일주일 1번 수영장 물을 새 물로 갈기 전인 수요일에만 수영장에 들어가 다이빙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수영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에는 집 뒤 야드에 모래 구멍을 파고 다이빙 연습을 했다.

새미 리는 다이빙에서 물로 뛰어들 때 부딪히는 물 표면의 압박감을 이기기 위해 모래더미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훈련을 강도 높게 했다. 물이 두렵지 않게 된 새미 리는 다이빙을 할 때 새처럼 날랐다. 전국 고등학교 수영부문 다이빙에서 최고점을 따냈다.

학교 공부에도 우등생인 그는 수영 특기생으로 USC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그는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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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미 리의 성공 스토리를 다룬 그림책(왼쪽)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는 모습.

1942년 당시 22세인 새미 리는 전국 다이빙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유색 인종으로는 최초였다. 당시 올림픽대회 출전할 수 있었으나 2차 세계대전으로 1940년 올림픽대회와 1944년 올림픽 대회가 취소되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48년 런던 올림픽이 다가왔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수영에서 28세 나이면 은퇴하고도 한참 되는 나이였다. 그가 또 미전국 다이빙 대회에서 챔피언이 된 것이다. 올림픽대회 출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올림픽 선수단의 일원으로 런던으로 향했다.

당시 미국 올림픽 수행 기자단 어느 누구도 유색인종인 새미 리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선수가 있다는 것조차 아는 기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수영에서 메달을 딴 유색 인종은 없었으며, 당시까지 수영 다이빙에서 미국 선수는 메달을 딴 선수가 없었다.

당시 올림픽 대회는 지금처럼 통신이나 기록 계산이 디지털화가 아니라 수작업이 대부분이었다. 매일매일 저녁에 그날 성적이 선수단 사무실 칠판에 기록되곤 했다. 어느날 기록판에 ‘수영 다이빙 플랫폼 금메달, 미국 새미 리 선수’가 올랐다.

이를 본 기자 한명은 “저거 잘못된 것 아냐. 미국 선수가 어떻게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따냐?”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실로 판명이 나자 취재단은 흥분에 싸였다. 바로 이 다이빙 금메달이 미국 역사상 최초 남자 다이빙 금메달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회에서 새미 리는 금메달뿐만 아니라 스프링보드 부문에서 동메달을 획득해 더욱 이름을 날렸다.
이 소식은 1948년에 건국한 신생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도 큰 소식으로 몰아왔다. 특히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새미 리는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그를 열렬하게 지지했던 동지회 회원 이순기 씨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새미 리가 1953년 한국 방문 때 서울 운동장에서 다이빙 시범을 요청한 적도 있다. (박스 기사 참조)

새미 리가 또 한 번 미국을 놀라게 한 것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대회에서 또다시 다이빙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올림픽 2관왕에 올랐을 때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로 코치나 할 나이였는데, 다이빙 부문 최고령자 금메달리스트로 기록에 올랐다. 그가 2관왕이 되는 영광의 그 날 8월 1일은 바로 그의 32세 생일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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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글]

새미 리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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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시절의 새미 리

“작은 거인”이라 불렸던 올림픽 다이빙 2관왕 새미 리 박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Korean American’ 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했다. “내 아버지의 나라 Korea를 잊어 본적이 없고, 나 자신이 Korean American임을 잊은 적도 없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앞으로 나와 같은 스포츠 분야에서 뛰어난 Korean American 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라고 했다.

자녀의 됨됨이를 보려면 부모를 보라는 말이 있다. 새미 리의 아버지 이순기 씨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동지회 회원으로서 활동했다. 일찍이 외국 문물에 눈 뜬 이순기 씨는 배재학당에서 선교사인 아펜셀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그의 나이 22세 때 미국에서 기계공학에 관련한 공부를 하고 싶어 우선 1905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민하는 한인 이민자들의 이민선 통역관으로 배에 올랐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잠시 머무른 다음 LA로 이주하여 옥시덴탈 컬리지에 진학했다. 나중 다시 북가주로 가서 스탠포드 대와 버클리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조국에 돌아가려 했으나 일본의식민지가 되어 귀국을 포기하고 미국에 남기로 하고 농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 때는 북가주 우드랜드 지역에서 600 에이커가 넘는 논밭을 경작하기도 했다. 그는 1924년에 북가주에서 LA로 이주하여 지금의 선셑 불러버드와 템플 스트릿 근처에다 식품점 (그로서리 마켓)을 열었다.

그에게는 두 딸(돌리, 매리)과 아들 새미 리(Samuel “Sammy” Lee)를 두었다. 아들 새미 리가 프레즈노에서 태어났을 때(1920년 8월 1일) 신심이 두터운 아버지 이순기 씨는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사무엘처럼 용맹하고 지혜가 있으라며 ‘Samuel’로 정했다고 한다.

예전 한국의 아버지들이 항상 아들이나 남자들에게 하는 말은 “대한 남아의 기질을 잊지 말라”였다. 이순기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린 새미 리에게 ‘대한의 남자는 결코 약점을 보이지 않는다’고 일렀고, ‘대한의 남자는 기죽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대한의 남자는 부끄러운 일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당부했다.

특히 이순기 씨는 자녀들에게 1910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3.1 운동 선열들의 정신이 바로 새미 리에게 인생철학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아버지의 강한 교육열로 새미 리는 ‘대한의 남자’로 다듬어져 갔다.

새미 리는 버뱅크 중학교와 프랭클린 고교를 다녔는데, 주위 학생들의 인종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친구들에게 웃음으로 대했고, 공부를 억척스럽게 하여 1등을 하는 바람에 동양인으로서는 처음 학생회장에 선출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아버지 이순기 씨의 바람은 아들이 나중에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1932년 7월 LA에서 처음 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오늘의 메모리엄 콜리세움 경기장은 그 올림픽을 위해서 건축된 것이다. 당시 올림픽 대회 개막을 앞두고 LA는 축제 분위기였다.

평소 때처럼 아버지는 아들 새미 리를 데리고 헌 차로 다운타운 채소 시장을 들러 USC근처로 운전 해 갔는데 올림픽 경기장이 보이고 많은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12살 새미 리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 깃발들이 뭐예요?”
“올림픽대회가 열리는 것이란다”
“코리아에서도 선수가 와요?”
“아니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라 올 수가 없단다”
새미 리는 잠시 후 “아버지! 내가 나중 올림픽 챔피언이 되는 대한 남아(Korean)가 될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 소원대로 의사도 될 거예요.” 아버지 이순기 씨 귀에는 꿈같이 들렸다. 그리고 16년이 흘렀다.

1948년 영국 런던 올림픽 대회로부터 ‘꿈같은 소식’이 미국과 한국에 날라 들었다. <미국 올림픽 선수단의 수영 부문 다이빙에서 미국이 최초로 다이빙 프랫홈의 금메달을 획득>, <주인공은 한국계 미국인 새미 리 선수( first American of Korean descent, Sammy Lee) 나이 28세>.

당시 런던 올림픽 수영 금메달 수상식에 오른 5피트 작은 체구의 새미 리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미국 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성조기가 휘날리는 것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성조기에 아버지의 얼굴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날을 보지 못하고 이미 1943년에 별세했다. ‘아버지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의사도 되었고, 이제 16년 전 콜리세움 경기장 앞에서 약속한 올림픽 챔피언이 되었어요’

새미 리 박사에 대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다.
수년 전 어떤 겨울날, 코리아타운에 열리는 행사에 초청을 받은 새미 리는 한 여교사가 운전한 차에 동승하게 되었다. 마침 비가 내려 앞 유리창에 김이 많이 서려 운전하던 여교사가 운전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됐다.

나중 행사장에서 새미 리는 테이블 위에 있는 냅킨 종이를 열심히 줍고 있어, 그 여교사가 “박사님, 뭘 하세요?”라고 하자, 새미 리는 “나중에 돌아갈 때 차창 문에 서린 김을 닦으려고…”라며 미소를 지었다.

헌팅턴 비치 자택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 정말로 새미 리는 차창 유리에 낀 김을 행사장에서 거둔 냅킨으로 열심히 닦고 있었다. 새미 리의 따뜻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자상한 면모였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성 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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