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주년 특집-1] ‘미주 땅에서 3.1 운동 100년 빛을 밝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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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땅에서 3.1 운동 100년 빛을 밝히자’

앞으로 두 해만 가면 2019년 3.1 운동 100주년이 된다. 이미 100주년 기념사업을 두고 국내의 여러 단체들이 제마다 사업계획들을 발표하며 한편으로 미주를 포함해 해외지역과도 연계를 맺으려 애쓰고 있다. 미주의 일부 인사들은 이에 편승해 자신들의 명예나 취하려는 행태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미주 한인사회는 자체적으로 미주에서의 3.1 운동 관련 문헌 자료나 유적지 발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내는 물론 미주 동포들도 알지 못하고 있는 미주 내 3.1 운동에 관한 자랑스러운 이민 역사를 발굴하는 것이 또 다른 100년을 위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건국에서 미국의 이민 선조들이 행한 3.1 정신의 계승이 원동력이었음을 미주 이민사는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거품이 되어가는 역사를 다시금 3.1 운동 100주년 기해 새로운 미래를 향한 물줄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성 진 (취재부 기자)

1920년-행진후

▲ 1920년 3.1절 행진후 다뉴바한인교회에서 기념촬영을 한 이민선조들.

미주의 한인 이민사는 3.1 운동으로 새로운 자각을 하는 계기가 됐다. 어떤 면에서는 미주 동포 사회가 역사적인 3.1 운동을 열어주는 이정표 역할도 했다.

3.1 운동의 역사적 전기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기억하게 된다. 그는 1918년 1월 8일 연방의회 연설을 통해 ‘모든 민족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정부를 가질 수 있다’라는 소위 ‘민족자결주의의 원칙’(The Self-Determination of small nations)을 선포했다. 이는 당시 약소민족들에게는 복음이나 같았다. 당시 일제 강압을 받던 한국도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이미 미주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08년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명운, 장인환 두 애국 청년이 일제를 두둔한 미국인 고문 스티븐슨을 저격해 독립운동의 효시를 알렸다. 이 의거는 나중 1910년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3_1절-1주년-기념행진

▲ 1920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미주한인들이 3.1절 1주년 기념행진을 하고 있다.

조국에서의 3.1 운동 시발점은 특히 3.1 운동 1년 전인 1918년 11월 25일 뉴욕에서 조직된 김헌식의 ‘신한회’가 정치력으로 미국 정계에 문을 두드렸다. 신한회는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 회의에 참가해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는데 이 소식이 그해 12월 18일에 일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도산 안창호가 주축이 된 국민회가 1918년 11월 25일에 독립 청원운동을 벌여 당시 파리 평화회의에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등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소식들이 일본에 보도되자 동경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크게 자극받아 YMCA에서 토론회가 열리고 끝내 3.1 운동의 도화선인 ‘2.8 독립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당시 뉴욕 한인교회의 신자인 김 마리아는 동경에서 한인 유학생이었는데 이 ‘2.8 선언문’을 몰래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크게 옥고를 치렀다. 당시 유관순과 함께 복역했다.

김 마리아는 나중 복역을 끝내고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돌아와 ‘근화회’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이끌어 동포사회에서는 그녀를 “살아있는 잔다크”로 불렀다.

조국에서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서재필 박사와 이승만 박사 등이 주동이 되어 그해 4월 14일-16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한인 대표자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려 본격적인 외교적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동기가 되었다.

미주는 3.1 운동의 전초지

3.1 운동 이듬해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은 조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독립운동 기념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캘리포니아 중가주 지역 리들리(Reedly)와 다뉴바(Danuba)에서 3.1 운동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들리 인근 다뉴바에서 1920년 3월 1일 정오 이 지역 한인 선조들이 세계 최초로 3.1 운동 1주년 기념 퍼레이드를 벌여 미국 사회에 ‘대한민국이 독립국’ 임을 만방에 알렸다.

당시 이 지역 신문인 Dinuba Sentinel은 “한인들이 아침 10시부터 밤까지 독립운동 행사를 벌였는데 시가 행열에 350명 이상이 참가했다”면서 시가행진 사진을 게재하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당시 이 지역의 모든 한인 여성들은 흰옷으로 정장하고 남자들도 정장하여 도열한 가운데 대한 제국 군인 복장을 한 대표가 말을 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십 대의 자동차와 도보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시내 중심가에서 시가행진을 하여 미 주류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렸다.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한 한인들이 500명 내외로 당시 미 인구 센서스 통계로 볼 때 350여 명이 시가 행렬에 참가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거의 모두 참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북가주의 윌로스의 한인 비행학교 조종사가 당시 시가행진에 축하 비행하려고 비행하여 오다가 기상 악화로 프레스노까지 상공에서 다시 회항해 다뉴바 상공에는 이르지 못했다.

무엇보다 당시의 3.1 운동 기념 시가행진은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했던 한인들의 만세 행렬이었다. 그 이후로도 3.1 운동 시가행렬은 해마다 개최되다가 한인 인구가 줄어들면서 중단됐다가 최근 들어 매 2년에 한 번씩 재현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더 이상 개최되지 못했다.

한편 리들리에서는 1921년에 리들리 타운 퍼레이드(Reedley Town Parade)에서 한미수교(1882)를 축하하는 한인 꽃차를 출품해 한국이 1882년에 미국과 수교 조약을 맺은 독립국가임을 과시하였다. 이처럼 중가주 지역은 미주 이민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독립운동 성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3.1 운동을 기억한 중가주

이곳은 1903년부터 시작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한인 이민들이 하와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샌프란시스코와 LA 중간에 있는 중가주 지역 과일 농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옮겨왔던 곳이다.

중가주 지역에 한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905년으로 추산되며 1906년에 프레즈노의 한인 노동자 22인이 공립협회 지회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에는 대한인국민회(KNA) 지방회가 조직되었다.

1920년대 중가주 리들리와 다뉴바 지역은 대한인국민회 이외 대한여자애국단을 포함해 대한 여성 구제회 등을 포함한 애국단체들이 활동하던 유서 깊은 지역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과일 단지로 유명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민했던

대한여자애국단

▲ 대한여자애국단과 적십자단 여성 회원들이 대형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던 1920년 당시 모습.

선조들이 대륙으로 오면서 이 지역에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 지역에서 한인 김호, 김형순이 설립한 ‘김 브라더스’(Kim Brothers) 가 큰 사업체로 등장하면서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고국에서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 중가주 지역은 독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자금의 중요한 공급처가 되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와 안창호 선생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지역을 방문하였다.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많은 선조 이민들은 주로 총각이나 홀아비들이 많았으며, 과일농장에서 일한 돈으로 의식주 이외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기부하다가 쓸쓸하게 죽어 이곳 리들리와 다뉴바 공동묘지에 잠들었다. 이곳에 안장된 선열들의 묘들이 나란히 묻혀 있다. 이는 ‘김 브라더스’의 대표인 김호 선생이 쓸쓸히 죽어간 선열들을 위해 미리 묘지를 사두었기 때문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조국이 독립되었으나 이곳 선열들의 묘역은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이 성역을 1992년부터 중가주해병전우회의 김명수 회장을 포함한 각 지역 해병전우들과 지방 유지들이 묘역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최근에는 조경사업까지 완성시켰다.

그리고는 1992년부터 매년 메모리얼데이와 광복절에 리들리 묘역과 다뉴바 묘역에 잠든 선조 들의 혼을 달래주었던 것이다. 2014년 1월 9일 대한민국 국회는 당시 묘역을 방문한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인 김을동 국회의원을 통해 김명수 회장에게 그의 공적을 기려 국회의장 공로장을 수여했다.

김-마리아-킴벌랜드

▲ ‘2.8 선언문’을 몰래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간 “살아있는 잔다르크”로 불렸던 김 마리아(좌)와 1921년 뉴욕 3.1 운동 2주년 기념주최하고 진행한 킴벌랜드.

한편 뉴욕에서의 1921년 당시 3.1 운동 2주년 기념식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날 뉴욕 맨하탄 43가에 있는 타운홀에는 비가 내리는 중에도 무려 1,300명의 인파가 몰려 3.1 운동 2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당시 뉴욕에는 한인들이 1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이처럼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를 반대하는 미국인 친구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날의 3.1 운동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진행한 주인공은 한인이 아니고 미국 여성 킴벌랜드였다. 이 같은 미국인 친구들이 3.1 운동 기념행사에 참가한 것은 다름 아닌 서재필 박사의 역량이었다.

오늘날 3.1절 기념식에는 100명도 모이기가 힘들다. 100년 전 뉴욕에서 1,300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던 그 영광의 날을 100주년에는 다시 볼 수 있을지….

100주년을 맞는 미주사회가 그날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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