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3] 김치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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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규제속에 유기농 천국된 쿠바’

이자경 이민 연구가

이자경(이민 연구가)

쿠바 아바나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동상과 흉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쿠바는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인가, 북한의 김 씨 세습제만 보아온 시각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쿠바 시민 누군가는 자기는 살아있는 인물은 진정 경배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시가지 혁명의 광장의 철조 실루엣 구조물에도 카스트로는 없고, 혁명동지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엔고스만 있다. 한 세기 전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던 독립의 영웅 호세 마르티 동상은 광장 위쪽 그의 기념관 앞에 있다. 이제 미국과도 국교를 회복한 쿠바에서 김치 시연회는 1시기전 이민 선조의 체취를 오늘의 역사로 연결시켜주는 잔치였다.

지난해 6월 9일 멕시코 메리다 공항 검색대에 가방 깊이 넣어둔 고춧가루, 구운 김, 참기름 등 쿠바 한인들과 함께 먹을 귀중한 식품들을 압류당한 채 한 시간 조금 지나 쿠바 영공에 들어서니 먼저 전화가 불통이었다.

쿠바엔 고춧가루를 살 수 없다고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져온 것인데 … 아까웠다.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 출구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더위로 땀은 계속 흘러내린다. 공항 앞 환전소에서 메리다에서 이미 환전해온 유로화를 다시 외국인이 사용하는 쿠바 돈 태환화폐로 바꿨다.

돈을 바꾼 건 메리다에서 달러로 바꾸면 그냥 20%를 제하니 손해라고 누군가가 귀띔을 해준 덕분이다. 그 결과 유로나 달러나 모두 쿠바 돈에 비하면 크게 가치가 떨어진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카스트로의 관광정책이 달러를 강압적(?)으로 괄시하는 듯하고, 달러를 많이 쓰고 가라는 경고로 받아들였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중화폐를 쓰는 쿠바는 외국인용 태환화폐인 ‘CUC’과 내국인이 쓰는 ‘CUP’가 공존하는데 ‘1 CUC = 24 CUP’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영접 나온 페드로 남매의 낡은 차로 공항 밖 한적한 길을 달리다 보니 쿠바의 색깔이 눈에 닿을 때마다 생기가 돋는다. 인종의 혼합장인 물라토(mulatto) 사회 쿠바에서 기층 혈액인 스페인과 흑인의 피는 이제는 쿠바 국민 62%의 피 속을 관통한다.

그렇게 기층 혈액이 흐르는 두 사람의 외양은 아무리 봐도 한인 후손 같진 않지만 우리보단 한결 잘 생겼고 훤칠했다. 그런 두 남매의 모습에서 보이지 않는 쿠바 후손만의 자존심을 읽었다.

차창으로 보이는 아바나의 흙 색깔은 붉은빛을 띠는 황토다. 비료를 쓰지 않은 탓인지 아스팔트 사이사이로 군데군데 드러나는 땅은 모두 황토다. 갑자기 문명사회에서 퇴각한 신선한 자연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이질감마저 생긴다.

카스트로의 혁명동지이자 쿠바의 절대 아이콘인 체 게바라의 얼굴은 구시가지 올드 아바나인 비에하(vieja)를 지나는 담벼락과 상점의 쇼윈도 여기저기 붙어있다.

센트랄 지역의 아르마스 광장 바닥에 물건을 펼쳐놓은 노점상과 거리 책방에도 게바라의 사진, 엽서, 검은 베레모와 그의 전기를 담은 책 등과 그의 얼굴을 찍은 티셔츠는 내국인은 물론 쿠바를 찾은 관광객들에게도 최고 인기 품목으로 팔려나간다.

식당이나 카페에도, 벽보에도, 아니 유리창을 덮은 어느 녹슨 쇠창살 안에서도, 그렇게 쿠바 어디를 가도 그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아바나에서 280km 떨어진 혁명의 성지 산타 클라라는 온통 체 게바라의 도시로서 군데군데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이 도시는 쿠바 혁명 당시 혁명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준 곳이다.

그러나 아바나에서 카스트로의 동상과 흉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지적처럼 쿠바는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인가, 북한의 김씨 세습제만 보아온 시각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쿠바 시민 누군가는 자기는 살아있는 인물은 진정 경배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시가지 혁명의 광장의 철조 실루엣 구조물에도 카스트로는 없고, 혁명동지 체 게바라와 카밀로 시엔푸엔고스만 있다. 한 세기 전 스페인에서 독립을 쟁취하려던 독립의 영웅 호세 마르티 동상은 광장 위쪽 그의 기념관 앞에 있다.

어쨌든 경제개방과 관광산업에 매진하는 쿠바의 단면을 보는 듯했다.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가 관광산업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는 모양새다.

그런데 자연공간이라니 … 고물차 꽁무니마다 내뿜는 시커먼 매연들, 반세기 전 한국에서 본 듯한 후줄근한 버스와 택시들이 덜커덩거리며 달린다. 1940 ~ 50년대의 덩치 큰 미국 산 자동차들이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은 문명과 자연, 식민과 자유의 참 묘한 역설의 하모니를 이룬다.

혁명은 가고 새물결이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동안 생각은 여러 번 더 바뀐다. 우람하게 큰 식민시절 공공건물이든 아파트 건물이든 시야는 온통 페인트를 못한 채 칙칙한 모습이고, 그런 구시가지 올드 아바나인 비에하 구역엔 아파트 들창마다 빨래가 척척 아무렇게나 걸려있다.

카메라만 들이대면 영락없이 리얼리즘 영화가 되어 나올 법한, 그런 정감 넘치는 휴먼 감동 스토리가 끝없이 필자의 시야에서 나풀댄다. 쿠바가 점점 더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다.

구시가지가 스페인 식민시절의 잔재라면 신시가지는 미국이 지배할 때 조성된 곳을 말한다. 오던 길에 신시가지를 잠시 둘러보았다. 혁명의 광장을 비롯해 혁명박물관(옛 국회의사당) 등 관공서나 박물관 등이 중심을 잡고 있다. 우선 무슨 성처럼 우람한 나시오날 호텔 건물을 비롯해 고급 주택가가 즐비하다. 거긴 없는 게 없어 보였다.

여기선 젊은이들이 밤마다 살사니, 맘보니, 룸바니, 우리가 아는 이런 것들과 함께 최신의 춤판까지 벌인다는 것이고, 실상 존 레논에게 바치는 기념공원도 있을 정도로 쿠바의 사회주의 그늘 아래서 방자하게(?) 다리를 꼰 채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너무 놀라웠다. 쿠바는 이렇듯 변화무쌍한 미래라는 철로를 달리는 중이다.

반면 ‘반제국주의 광장’은 보란 듯 미국 대사관 건물 맞은편에 있다. 그곳엔 ‘깃발의 벽’이란 조형물 이 서 있는데 거기에 ‘Patria O Muerte, Venceremos!’라는 빨간 글씨가 선명하게 두 벽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즉 조국 아니면 죽음을 달라. 우리는 정복하리라!라는 뜻이다.

쿠바교민

▲ 카르데나스 지방회장 집에서 후손들과 함께

민박(Casa Particular)을 정하고 나서 즉시 필자는 우선 아나의 안내로 시내에 위치한 호세 마르티 한-쿠 문화클럽(Club Martiano Amistad Cuba Corea)에서 김치 시연회를 갖기로 했다.

한인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데 후손들은 간단하게 ‘무세오’(Museo)라고 부른다. 2014년 8월에 오픈했다. 박물관이란 뜻, 필자도 앞으로 무세오라고 부르기로 한다.

우선 이민 선조들의 사진들이 복도에 붙어있고, 문화와 역사를 총괄해서 관리하는 공간이라는 뜻일 게다. 한국어 반, 요리 반, 등등 한국문화에 대한 숱한 강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2012년 10월 아바나 국립대학에서 개설한 한국어 반은 이곳에서 강의하기로 작정했단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있는 방이 호세 마르티 방이고, 안쪽으로 들어가니 ‘쿠바 청소년 한국어 교실’이 나온다.

그곳에서 만난 후예들의 얼굴엔 필자를 잘 안다는 표정이다. 아마도 한류 드라마 덕분일 게다. 이미 쿠바의 국영 TV 방송 ‘Canal Habana’에서 한국의 드라마 ‘내조의 여왕, 시크릿 가든, 궁, 아가씨를 부탁해’ 등을 방영한 터다.

그걸 본 후손들은 조국의 문화를 너무 쉽게 동경하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한류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까지 점령(?)해 버린 셈이다. 이미 청소년 프로그램을 통해 이곳 의 여러 후손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한류에 열광하는 쿠바인

이튿날 아나를 따라 노천 채소시장(verduliria)에 가보니 활력이 넘쳐난다. 시장 분위기는 이상하게 도 타히티에서의 고갱(후기 인상주의 화가)의 페인팅 작업과 같아 보였다.

원래 이 장사는 남자들 이 맡는 건지 그들은 근육질의 팔뚝을 걷어붙인 채 열대의 시장에서 손님을 맞고 물건을 배치한다. 물어보니 협동조합에서 공동으로 운영한단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폴 고갱의 그림 속에 나오는 인물은 물론 질감마저 닮았다.

그렇다 해도 물건은 넘쳐나는데 역시 배추나 무는 아예 없다. 김치 담글 만한 다른 푸성귀도 선뜻 눈에 띄지 않는다. 약간은 질퍽거리는 바닥에, 그것도 농장에서 금방 뽑아낸, 뻘건 흙이 묻은 유기 농 채소들을 가득 진열해 놓은 시장 풍경은 그야말로 이방인에겐 놀라운 생명력 그 자체였다.

바깥세상과 격리된 동안 쿠바는 유기농 정책을 성공시켜 놓았단 말인가. 세계가 잃어버린 그것을 쿠바는 숨겨놓고 있었던 게다. 어쨌든 필자는 오랫동안 너무 고생한 쿠바 한인들에겐 제대로 된 김치를 선보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자존심이 강한 후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를 걱정하면서. 물론 배추과에 속한 것이긴 해도 복 초이(bok choy)는 그동안 차이나타운에 가서나 요리로 먹는다는 개념이 머리에 박힌지라 복 초이를 보고도 언뜻 배추 대용으로 생각하진 못했었다.

손으로 직접 만져보니 표피도 두껍고 속의 고갱이도 없긴 마찬가지나 그런대로 배추의 질감과 비슷해 열 단은 더 넘게 비닐 백에 담고, 길쭉한 양파(cebollita)와 기타 필요한 여러 잡화를 잔뜩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황토 위에 가게 골격만 세워진 동네 정육점(carniceria)에 가서 쇠고기와 닭고기를 30인 분 사가지고 다음날 후손들과 함께 겉절이와 불고기, 닭 불고기를 만들어 먹기로 작정하니 신바람이 났다. 정육점 모습도 고갱의 페인팅과 닮은꼴이다.

무세오에 돌아와 고춧가루를 살 수 없다고 한탄하니 다음 날 아침 안토니오 김 함(Antonio Kim Jam, 73) 후손 회장이 한국산 고춧가루를 작은 병에 넣은 것을 가져다준다. 좀 더 선홍의 붉은빛이 도는게 한국산으로 쉽게 판명 난다.

한국이나 멕시코에서 한국 손님들이 올 때마다 선물로 주고가는 것인가 보다. 그리고 무세오에서 안토니오와 함께 번갈아 가이드 역할을 맡아보는 안토니오 퐁 안(77)이 멕시코 산 고춧가루와 생강과 김 등을 가져와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리디아 김

▲ 카르데나스 지방회의 리디아 김과 손수 담근 간장병. (헛간에서)

참기름은 누가 가져온 것인지 지금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한데 그게 베트남 산이라 전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마늘은 메리다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훑어보아도 한국산 육쪽마늘은 있을 까닭이 없어 까도 까도 끝없고 까기 힘든 여러 쪽마늘을 10여 통이나 샀다.

남은 건 간장이 문제였다. 아나와 필자는 다시 간장을 사기 위해 센트랄 지역의 외국인 전용 백화점에 갔다. 거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정신이 없었다.

안으로 쑥 들어가니 진열장 아래쪽에 작은 간장 병들이 조르르 있는데 이번에도 베트남 산이었다. 우리 입맛의 간장 맛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순간 한국 간장 맛이 너무 그리웠다.

6월 11일, 모인 인원 20명쯤, 무세오의 ‘쿠바 청소년 한국어교실’에서 에어컨을 가동한 채 쿠바 아바나에서 한인 후손들과의 아점을 김치와 불고기, 닭 불고기 등으로 함께 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베트남 간장으로 고기를 양념해서인지 고기 색깔이 너무 거무스레했으나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김치 시연회로 향수 달래

안토니오(한국 이름 김시열) 회장은 피가 섞이지 않은 뿌로(puro)다. 양부모가 모두 순수한 한국계라는 뜻이다. 쿠바에서 뿌로는 80명 정도. 젊었을 때 러시아에서 미그기 조정 훈련 연수에 참여했다가 다리 부상으로 정비사로 전환했다는 그다.

어쩐지 기계체조 선수처럼 여간 날씬한 몸매가 아니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쿠바의 한인을 대표하곤 하는 입장이다. 필자를 부를 땐 습관처럼 한국말로 선생님, 선생님, 꼭 두 번 부른다. 부인은 쿠바 사람이다. 그는 지금도 60대 이상의 한인 노인들에게 10불, 20불, 필요로 할 때마다 돕는 구제원 역할도 병행한다. 환갑잔치도 여러번 무세오에서 차려 드렸을 정도다.

호세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바로 마이애미 안수명 할아버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순필의 장녀 안정희와 중국계 방영업(方榮業, Antonio Fong)이 1938년 결혼해서 호세를 낳았던 것, 한국인과 중국인의 혼혈인 셈이다. 이미 호세의 여동생 올가 부부는 마이애미에 에 안수명과 함께 만난 적 있다.

호세가 자신의 아파트에 가자고 한다. 그래 무세오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객 전수진(26) 아가씨도 함께 역시 시커먼 매연을 계속 내뿜는 꼴렉띠보 택시(?)라는 걸 타고 10여 분 걸려 그의 아파트에 갔다.

대학 졸업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일주 중인 그녀는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 아파트는 거리를 향한 낡은 건물 2층에 있었다. 벽면에 안순필, 김원정 조부모 사진이 정갈하게 붙어있고, 정돈된 리빙 룸과 부엌의 공기 속에 쿠바의 한인계 지식인 냄새가 배어있다.

부인은 백인으로 아담하고 얌전한 모습이다. 호세보다 3살 위인 80세로 젊었을 땐 한 미모를 톡톡히 했다고 남편이 은근히 자랑한다. 아파트엔 딸과 손녀 메이라이 콘트레라스 퐁(20)이 함께 거주하는데 손녀는 이미 3년 전 한국 방문 중 한국 이민사박물관에 붙은 외고조부 사진 아래서 사진을 찍은 바 있다.

부인이 ‘Cuba’라고 쓴 머그잔이 든 선물 백 하나를 필자에게 안긴다.
“부디 쿠바를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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