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충격보도] ‘87세 탈북 국군포로 K 씨 탈북했다 …’ 또다시 강제로 북한에 끌려간 내막 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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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 기다려라’는
공관 말 믿다가 어이없이 참변

아마도 우리 세대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국군포로 한 명이 북한 정권에 포로가 된 지 67년 만에 지난 1월 둘째 주에 극적으로 탈북해 중국에 체류 중 한국 정부의 미지근한 조치로 대한민국 땅을 밟기 전에 지난 2월 4일 북한 보위부 특수반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 북송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현재 87세로 국방부에는 1950년도에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국군포로 K 씨는 천신만고 끝에 탈북했으나, 현지 한국 공관에서 ‘한 달 후에 영사관에 들어오라’는 말만 믿고 있다가 정보를 탐지한 북한 측이 전격 행동을 벌여 강제 북송되는 참극을 당했다. 이 같은 소식은 중국 심양에서 탈북자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 교회 전도사 A 씨가 LA 소재 미주국군포로송환 위원회(이하 ‘국군포로위원회’, 회장 정용봉)에 알려왔다. 이 A 전도사는 국군포로위원회의 지원으로 지난 수년 동안 중국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구출활동을 벌여 왔다. 이번 사건은 12년 전인 2005년 1월 당시 중국까지 탈북해 나왔던 국군포로 한만택 씨 (당시 73세, 별첨 기사 참조)가 한국 영사관에 들어가기 전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된 사건의 재판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이 크다.
성 진 (취재부 기자)

국군포로A전도사가 전해온 충격적 이야기는 지난 1월 29일 중국 현지에 있는 한인 브로커 B 씨가 국군포로 K 씨를 탈북시켜 온 중국 브로커에게 약속된 나머지 돈을 건네기 위해 연길에서 삼합으로 가는 길에 신원미상의 괴한에 의해 피습을 받아 머리를 흉기로 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나중 눈을 떠 보니 중국 병원이었으며, 돈은 이미 없었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깨어난 브로커 B 씨는 지난 1월 29일 구조 요청을 위해 중국 친지에게 연락을 취했고, 지난 2월 2일 퇴원 후 안가로 가보니 ‘국군포로 K 씨가 행방불명이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후 B 씨는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국군포로 K 씨를 찾을 수는 없었고, 지난 4일 또 다른 조력자 로부터 ‘북한 보위부원들이 와서 데려갔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국군포로 K 씨는 원래 건강해 탈북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우선 현지 한인과 중국인 브로커들이 돈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바람에 그동안 심양 총영사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국군포로 가 탈북 귀환하게 되면 그동안 수십 년 동안 받지 못한 봉급 등을 환산해 보통 3억-5억 원 (미화 약 30-50만 달러)를 받게 된다.

그래서 많은 브로커들은 탈북자보다도 국군포로 탈북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현지 공관의 안이한 대처로 강제북송

특히 국군포로가 탈북할 경우, 막대한 브로커 비용을 위해 편법으로 한국 정부가 국내에 있는 가족에게 일부를 보조해주는데, 이 돈을 가족들이 브로커에게 주는 방법이다. 그리고 나중 국군포로가 정식으로 입국하면 보상금과 정착금에서 선불한 금액을 청산하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국군포로 K 씨의 강제북송 과정에서의 더 큰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정부와 공관에서 무슨 이유인지 국군포로 K 씨를 우선 안전한 곳에 보호하지 않고, 심지어 면담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하면서 ‘한 달 후에나 영사관에 들어오라’고 했다는 점이다.

국군포로 K 씨의 한국 내 가족들과 현지 한인 관계자들이 ‘탈북한 국군포로 K 씨를 왜 바로 안전한 장소에 보호하지 않고 더구나 한 달 후에 공관으로 들어오라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의에 정부 관계자들은 ‘현재 한중관계가 정치·경제적으로 상황이 나빠 다른 방법을 강구 중이다.’고만 답했다는 것. 이 같은 안일한 자세가 일을 그르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국군포로 탈북 사실을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중국 정부나 북한 정권을 압박할 수 있는데도, 현지 공관이나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언론에 알리지 말라. 언론에 공개되면 한국으로 입국할 수 없게 된다’고 사정조로 말하지만 거의 강압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예를 보면 중국 정부는 국군포로의 탈북 경우에는 일반 탈북자보다 특별한 예외를 두어 통상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치해 주어 왔다.

문제는 한국 정부는 예전(2005년 국군포로 한만택 강제북송 사건)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고, 분노스러운 것은 국군포로 K 씨가 지난 1월 7일 탈북한 이후 우리 한국의 공관이나 국방부 측에서 단 한 번도, 그 누구도 국군포로 K 씨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전에 ‘국군포로가 탈북했다’라는 사실을 관계 기관에 통보했음에도 말이다.

‘언론에 알리지 말라’ 반협박까지

한편 이번 국군포로 K 씨의 강제북송은 지난달에 북한 국가안전보위상(국가정보원장 격)에서 전격 해임된 김원홍(72)과 그 일파들에게 피바람이 불면서 충성경쟁이 붙어 야기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1월 장성택 처형을 주도하는 등 김정은의 오른팔로 알려진 김원홍이 해임되고 직속 부하들 다수가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다른 보위부 간부들이 충성경쟁의 일환으로 국군포로 K 씨의 탈북을 탐지해 일을 벌인 것으로 중국 현지에서 탈북 브로커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탈북을 주선하는 중국인 브로커들은 북한 현지에서 보위부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도움을 받는 것이 상례화 되어 있다.

실제로 이번에 국군포로 K 씨를 탈북시키는데도 현지의 당 소속원들의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당 소속원들은 눈 감아주는 대가나 또는 직접 안내하는 경우도 있어 비용도 중국 위안화가 아닌 미국 달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국군포로 북한 탈출의 브로커비는 통상 6만 달러 정도이다.

이번 국군포로 K 씨의 강제북송은 한국 정부가 국군포로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려고 쉬쉬하며 제대로 대응을 못하다가 이번과 같은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가 국군포로 문제를 풀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에 대하여 미주국군포로송환위원회의 정용봉 회장은 “국가가 국군포로를 구출해 오진 못 할 망정, 제 발로 걸어나온 국군포로 조차 보호를 하지 못하는 한국 정부가 제정신인지, 정말 어이 가 없다”라고 분노감과 자괴감을 나타냈다.

또 그는 “나라를 구하라고 국가의 부름에 전쟁터에 나갔다가 포로가 된 우리 국군을 국가나 국민들이 모른 채 하는 현실을 개탄한다”면서 “앞으로 한국의 역대 정권의 국군포로 송환의 직무 유기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모든 미귀환 국군포로는 전사자로 처리되었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중 귀환자는 1994년 고 조창호 중위를 시작으로 계속하여 탈북하여 왔는데, 2014년 12월 기준으로 귀환 국군포로는 80명이며, 포로 가족은 400여 명에 이른다.

귀환 국군포로의 출신지는 함경북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국군포로 대부분이 함경북도 지역의 탄광에 배치되어 노역에 종사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2011년 이후에는 귀환한 국군포로가 없다. 그 이유는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이 국경 지역 에서의 탈북 경계를 강화하였고, 국군포로들이 연로해지면서 자력으로는 국경을 넘기 힘들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해에 탈북 국군포로 4명이 사망해 현재 35명이 생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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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이후 계속되는  탈북 포로 강제북송 내막

이번 국군포로 K 씨 강제 납북사건도…

2005년 국군포로 ‘한만택’
강제 북송 사건의 再版

국군포로_한만택

▲ 2005년 3월 28일 함경도 무산 자택에서 연금 중일 때의 한만택 씨와 2005년 12월 22일 한만택 씨 가족이 외교부에 보낸 첫 번째 진정서.

2005년 1월 에 발생한 ‘국군포로 한만택 강제북송 사건’은 당시 노무현 좌파정부가 자초한 사건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빠져나온 국군포로가 강제로 북송된 이 사상 초유의 사건에는 당시 한국 정부 수반은 물론 외교부나 국방부 그리고 통일부의 무책임한 행위가 주범이었다.

2004년 12월 27일 밤 10시, 함경북도 무산과 중국 지린성 난핑 사이의 두만강 기슭. 노인 한 명과 젊은 남자 두 명이 캄캄한 어둠을 뚫고 얼음 위를 걸었다. 노인의 이름은 한만택(당시 73). 6•25전쟁 당시 붙잡혀 반세기 동안 북한에서 살아야 했던 국군포로다.

국군포로 탈북 현지 공관이 오히려 걸림돌

국경을 넘은 안내자들은 약속했던 돈을 받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씨는 안내원들에 의해 중국 옌지(연길)의 아지트에 당도했다. 그러나 한씨와 일행은 다음날 연길의 호텔로 들어서자 갑자기 들이닥친 중국 공안들이 순식간에 이들을 체포해 경찰차에 태웠다. 두만강을 넘은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193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한만택 씨는 3남 4녀를 둔 농사꾼 집안의 일 잘하는 총각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한만택 씨와 형이 입대해 전선으로 갔다.

나중 금화지구 전투에서 형 만순 씨는 사망했고 만택 씨는 행방불명이 됐다. 정부는 이들을 모두 사망자로 처리해 서울 국립현충원에 위패를 만들고 만택 씨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추서 했다. 남은 가족은 매년 6월 이면 제사를 지냈다. 그렇게 50여 년이 흘렀다.

한씨의 진주의 옛집으로 중국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것은 2004년 11월이었다. 한씨의 지인을 통해 보내온 편지는 국군포로 한만택 씨였다. 한씨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국군포로 송환에 경험이 있는 남북 이산가족협의회의 심구섭 대표가 안내자 섭외 등 작업에 나섰다.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계획의 윤곽이 잡힌 12월 22일, 한씨 가족과 심 대표는 외교부와 국방부 앞으로 첫 번째 진정서를 보낸다. ‘국군포로 한만택 씨가 무산에 살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조만간 귀환을 추진 중이니 사전에 조치를 취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씨 가족이 외교부에 보낸 첫 번째 진정서는 담당부서인 동북아2과에 전달되지 못했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진정서는 문서수발 담당자의 실수로 업무와 전혀 무관한 외교부 감사실에 보내졌다. 한만택 사건과 관련해 외교부가 저지른 첫 번째 실수다.

이 실수 때문에 외교부 담당 부서는 국방부가 한씨의 체포 사실을 통보한 12월 30일까지 ‘국군 포로 한만택’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심구섭 대표는 “이 때문에 중국 외교부를 통한 사전 협조나 주중 영사관의 준비 등 외교부 차원에서의 관련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는 국군포로가 탈북하기 전에 한국 외교부가 개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탈북 계획을 확인하면 현지에서 미리 준비하거나 협조를 요청하는 게 관례이기 때문이다. 한씨의 탈북을 진행한 이들은 주중 영사관의 담당자가 내용을 사전에 몰랐다는 것도 사건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가족들이 체포 사실을 확인한 12월 29일 아침부터 외교부가 중국 측에 협조 공한을 보낸 12월 30일 저녁까지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길지 않아 보이는 이 이틀의 시간은 사실 한만택 씨의 북송 여부를 가르는 데 매우 중요한 시점이었다. 외교부의 문서처리 실수가 없었다면 한씨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하여간 한씨의 체포 소식은 외교부와 국방부에 보내졌다. 국방부 대북정책과는 관련 내용을 외교부에 의뢰하고, 외교부는 주중 영사관을 통해 중국 측에 협조 공한을 발송한다. 당시 중국 측은 국군 포로 신분을 확인하면 결국 한국으로 보내주는게 관례였다.

한만택 씨의 탈북 사실이 한국의 ‘문화일보’와 ‘연합뉴스’를 통해 처음 공개된 것이 2005년 1월 10일이었다. 당시 김하중 주중대사는 국회의원들에게 “중국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으며, 별문제 없이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외교부의 협조 공한에 대해 중국 측의 반응이 온 것은 체포 후 보름이 지난 1월 12일이었다.

계속된 한국 정부의 실책은 중국 눈치 탓

중국 외교부 차관보가 김하중 대사에게 구두로 “한씨는 이미 12월 30일 이전에 북송됐다”고 통보했음을 공식 발표했다(후에 확인된 정보는 이 같은 중국 측 통보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 1월 26일까지 일련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외교부의 두 번째 실책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측이 통보하기 전까지 외교부는 북송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월 12일 중국 측 실무자가 “법에 따라 처리했다”고 말하던 그 시점에, 김하중 대사는 국회의원들에게 “별 문제없을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국군포로 한만택 씨는 회령에 있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한 달여 조사를 받는다. 이곳에서 한씨는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조사가 마무리된 2월 중순 무산 자택으로 돌려보내진 한씨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다.

이 시기에 한만택 씨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한 지인은 한정구 씨 부부와 한 통화에서 “한씨가 1월 6일까지 총 9일 정도 중국에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외교부의 세 번째 실책을 확인할 수 있다.

1월 26일 중국의 통보가 사실인지를 철저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월 6일 북한에 보내졌다면 이는 중국 정부가 한국 측의 12월 30일 협조 공한을 받고도 그대로 북송을 감행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국군포로 문제의 경우 조용히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기본방침에 따른 것으로 이른바 ‘조용한 외교론’이다. 최악의 경우 ‘국군포로 신분이 확인되면 한국으로 보낸다’는 한중 간의 ‘묵계’가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외교부는 한만택 씨 가족들에게도 공개활동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해왔다. 그러나 가족들은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상태다.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뤄지는 것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무성의한 한국 정부의 안이한 태도에 분노감

4월 중순 국군포로 한만택 씨는 북창에 있는 관리소(수용소)에 수감됨에 따라 재탈북 기회가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한씨 가족들은 통일부를 통한 구명 요청에 힘을 쏟았다. 당시 9월 13일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한씨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실제로 9월 장관급 회담을 준비하는 실무협의 과정에서 한씨 문제가 거론되긴 했지만, 북측이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통일부 정동영 장관과의 면담을 요구 하지만, 통일부는 “담당 국장부터 먼저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답으로 무성의하게 만들었다.

정부에 더는 기대할 게 없다고 판단한 가족들은, 7개월 남짓 보관한 한만택 씨의 사진과 전화통화 녹음, 편지를 공개하기로 마음먹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나라 정부가 무슨 정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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