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2] 2000년 DJ 노벨상 로비논란…불법로비로 수상했나, 받을 자격 충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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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역사학자 노벨상 연구가 ‘오이빈드 스텐네센’ 이메일 인터뷰

노벨평화상이 한없이 부끄럽다

김대중김대중 전대통령의 ‘2000년 노벨평화상이 불법 로비 작품’이라는 논란이 현지 노르웨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인 노벨위원회 측은 일부 관계자들이 언급을 하고 있지만, 위원회 자체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현지 유력지들은 “노벨위원회는 사과할 용기도 없는 기관이다” 라며 비판을 가할 정도이다. 또 일부 유력지는 사설을 통해 노벨상 위원회가 앞으로 불법적인 로비 활동을 근절시키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노벨평화상 수상자들과 관련해 과거 수차례 논란이 있었는데, 1973년 헨리 키신저 수상 이후 ‘2000년 김대중 수상’은 역대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될 소지가 많아지고 있다. 선데이저널은 최근 “2000년 노벨평화상이 불법로비의 작품”이라는 논란이 노벨평화상 관장 국가 인 노르웨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역사학자이고 노벨상 연구가로 알려져 현지에서 노르웨이어로 미국판(김기삼-단 커크 공저)을 번역한 오이빈드 스텐네센(Oivind Stenersen) 씨와 지난 17일에 이메일로 인터뷰 를 가졌다. 다음은 이메일로 나눈 인터뷰 요지이다. 성진 (취재부기자)

-현지에서 지난해 12월에 문제의 책이 노르웨이어로 출판되었는데 그 반응을 알고 싶다.
답변: 노벨평화상이 수여되는 나라인 노르웨이 정부 측은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노벨위원회의 올라브 노르스타드 사무총장과 노벨위원회 당시 군나르 스톨셋 부위원장은 지난 해 12월 6일 국영방송 NRK 방송대담에 나와 그들의 입장을 해명했다.
노르스타드 사무총장은 책에 거론된 내용에 대하여 “공상적”(Fantastic)이라고 평했으며, 스톨셋 전부위원장은 “매우 우수한 스파이 스릴러”(excellent spy thriller)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특히 스톨셋 부위원장은 ‘만약 노벨위원회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부패와 로비 작전을 오늘날 알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절대로 노벨평화상은 수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2000년 노벨평화상은 국제적 특별한 관심사였음을 상기시켰음을 강조했다.
‘햇볕정책’은 세계 여러나라들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안보관계자들 그리고 언론 등으로부터 남북한 관계개선에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란 기대감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오이빈드 스텐네센

▲오이빈드 스텐네센

-노르웨이 언론계의 반응은,
답변: 노르웨이에서는 지난해 12월에 2개의 유력지들이 이 문제를 취급했다. Dagbladet라는 유력지는 사설을 통해 노벨상 위원회가 앞으로 불법적인 로비 활동을 근절시키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다른 유력지Bergens Tidende 는 Rafto Foundation의 이사장과 회견을 했는데, 2000년에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2000 Rafto Prize수상에 국정원의 로비가 게재되었다는 점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같은 주장에 대해 앞으로 검증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노벨상의 또다른 축인 스웨덴의 반응은, 특히 언론계에서 어떠한가?
답변: 나는 책이 출판됐을 때 스웨덴 라디오와 TV방송국 그리고 유력지 Dagens Nyheter의 기자들에게 알렸으나 그들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 놀랐다. 우선 그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한국의 국정원 등이 스웨덴에 있는 노벨재단 등에 로비를 벌였던 센세이셔널한 점에 대하여 전혀 취급하지 많았다.
솔직히 스웨덴 측이 이 문제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는 점에 이해하기도 힘들고 유감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들은 스웨덴이 가장 자랑스럽고 성스럽게까지 여기는 노벨상 위원회에 대하여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메일

-귀하는 노벨평화상 연구가이며, 역사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번 사건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취소나 반환 같은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답변: 현재 노벨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노벨상을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한 예를 들겠다. 지난 1973년에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던 헨리 키신저 미국의 전국무장관은 자신이 월맹 측과 파리협상에서 합의로 수상자가 되었으나, 2년후 협상이 파기되자, 1975년에 그가 받았던 노벨평화상과 상금을 반환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노벨위원회는 이를 거부했다.

한편 노르웨이에서 김기삼 변호사와 언론이 단 커크가 공저한 책을 노르웨이어로 출판한 <The Quest for the Nobel Peace Prize>의 Spartacus 출판사의 나나 발데세임(Nanna Baldersheim ) 편집장은 지난 17일 본보에 보내온 답신에서 노벨평화상위원회의 군나르 스톨셋 전부위원장이 국영 TV방송인 NRK에서 “만약 노벨위원회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된 부패와 로비 작전을 오늘날 알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절대로 노벨평화상은 수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점을 상기시켰다.
그는 NRK방송이 영국의 BBC와 같은 잘 알려진 방송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는 노르웨이의 전국 유력지 Dagbladet 와 Aftenposten 지 등에서 노르웨이판 책을 소개했다고 전했다. Dagbladet 지는 노벨상을 돈으로 샀다는 지적에 대하여 노벨위원회 측이 정당한 평가와 대책 그리고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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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도 그렇고 … 키신저도 그렇고 … 레둑토도 그렇고…

‘그들은  평화를 향한 선의나 이상이 없었다’

빛바랜 노벨평화상 의의 반성없는 노벨위원회의 침묵
전쟁의 생리도 모르는 사람에게 노벨상수여는 코메디

노르웨이 국영방송 NRK는 북유럽에서는 영국의 BBC방송에 버금가는 방송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 방송은 지난해 12월 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상 비밀공작’에 대한 노르웨이 판 책이 발간되자, 이에 관련 기사를 보도하면서 결론에 ‘김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으로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평화상을 탔으나, 실상 북한에 뇌물을 주고 정상회담을 하여 오늘날 한반도에 평화는 커녕 북한의 핵위협으로 정상회담 이전보다 더 위기의 상태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 국정원이 작성한 분데빅 노르웨이 전총리 초청행사일정 - 1국, 5국, 6국 요원을 동원, 남북이산가족상봉을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보게 하는 등 DJ노벨상 수상을 위해 치밀한 작전을 수행했다.

▲ 국정원이 작성한 분데빅 노르웨이 전총리 초청행사일정 – 1국, 5국, 6국 요원을 동원, 남북이산가족상봉을 가장 가까운 장소에서 보게 하는 등 DJ노벨상 수상을 위해 치밀한 작전을 수행했다.

이같은 논조는 1973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핸리 키신저 전국무장관의 수상 전후의 행적과 당시의 국제정세가 어떠했는가와 잘 비교가 된다. 지난 2000년 11월 ‘조갑제 닷컴에 실린 글이다.
1973년 노벨 평화상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월맹의 정치국원 레둑토에게 돌아갔다. 두 사람은 파리 평화협상 때 양국을 대표하여 월남전의 휴전문제를 놓고 3년간 협상한 관계였다. 당시 노르웨이의 노벨평화상 위원회는 수상 결정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지난 1월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서명되자 전세계적으로 평화에 대한 희망과 환희가 물결쳤다. 이 공로는 평화로운 해결방안에 도달하기 위하여 지난 3년간 각자의 재능과 선의를 다했던 두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 평화를 향한 작업에선 불신을 벗어 던지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상호신뢰를 만들어갈 수 있는 협상자들이 요구되었다.
휴전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알프레드 노벨의 이상에 맞추어 일했는 바, 국제분쟁은 전쟁이 아닌 협상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월남전 당사자들이 전쟁으로 상처받은 인도지나 반도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평화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월남의 휴전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 도덕적인 책임을 공유할 것을 희망한다>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키신저와 레둑토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1년반 뒤 월남의 평화 협정은 월맹의 일방적인 남침으로 깨지고 월남은 공산화 통일이 되었다. 키신저는 선의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나 월맹과 레둑토는 평화를 향한 선의나 이상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공산주의자들의 전략도 모르고, 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생리도 모르는 노벨 평화상 위원회가 두 사람에 대해 알프레드 노벨의 이상을 구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은 차라리 코메디였다.
두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으러 가지도 않았다. 레둑토는 미국이 휴전협정을 위반하는 한 노벨 평화상을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키신저는 수상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반전 시위대의 출현을 겁내 수상식엔 불참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위원회의 수상자 결정 이유문을 읽고 있노라면 이들이 전쟁의 속성, 국가의 생리,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전략에 대해서 너무나 무식한 데 놀라게 된다. 순진하다고 할지, 위선이라고 할지.

키신저와 레둑토가 합의한 월남휴전협상안을 미리 읽어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유양수 주월대사에게 “이런 문안에 합의하면 월남은 1년안으로 공산화된다”면서 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을 만나 충고해 주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유양수 대사에게 티우 대통령은 자신도 박 대통령과 동감 이라면서 미국의 압력에 굴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했다. 당시 키신저와 레둑토는 월남정부를 빼돌리고 월남민의 운명을 결정할 비밀협상을 진행해왔는데 그 협상안이란 것이 가관이었다.

▲ 한국주요인사의 노르웨이인사 접촉현황 - 김운용 IOC위원은 국제올림픽위원회를 활용, DJ노벨상 수상을 돕겠다고 제안했다고 기록돼 있다.

▲ 한국주요인사의 노르웨이인사 접촉현황 – 김운용 IOC위원은 국제올림픽위원회를 활용, DJ노벨상 수상을 돕겠다고 제안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상한 노벨평화상’

그때 17도선 이남의 월남 땅에는 약14만의 월남정규군이 침투해 있었다.
이들이 월남출신의 베트콩을 지휘하고 있었다. 월남정부를 따돌리고 미국과 월맹이 합의한 휴전안에 따르면 이 월맹군의 현 위치 주둔을 허용하면서 주월미군의 전면철수를 규정했다. 더구나 월남에 세워질 연립정부는 월남과 월맹, 베트콩 3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고 되어 있었다. 이런 연립정부는 공산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정부가 될 것임을 티우는 간파했다. 티우에게 이 휴전안을 수용하도록 강요한 것은 키신저였다. 그는 재선된 닉슨 대통령이 취임식을 갖기 전에 월남평화협정을 발효시키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결국 티우는 키신저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티우 대통령이 요구한 보장책으론 닉슨 대통령이 “휴전협정을 깰 때는 미국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때웠다. 그 뒤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고 미국 의회가 월남에 대한 일체의 원조를 동결시키는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월남은 홀로 버려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1975년 봄 월맹은 정규군을 앞세운 대공세로 월남을 적화통일하는 데 성공 했던 것이다. 이때는 포드 대통령 아래에서 안보보좌관이던 키신저. 그는 월남에 있던 미국인들과 월남인 협조자들을 사이공 함락 전에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상대로 “월맹 측에게 잘 이야기하여 탄손누트 공항을 포격하지 말도록 부탁해 달라”는 간청까지 했다. 강대국 미국의 체면을 좀 세워 달라는 당부였다.

자신이 합의해준 평화협정을 미국 측이 지키지 못한 바람에 월남이 무너져 내리고 있던 그날 키신저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1999년에 나온 그의 회고록 ‘Years of Renewal’에서 인용)
“4월21일 구엔 반 티우 월남대통령은 미국이 (월맹으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준수시키지 못했고 월남에 대한 원조약속을 지키지 못했음을 비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는 티우가 협상을 통한 결과도출에 방해물이었다면서 이제는 파리협정에 의한 해결이 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티우는 미국을 증오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나를 미워했다. 내가 월남에 있어서 미군 개입을 종결시킨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용기와 명예심으로써 조국을 위해 일한 그를 존경했다.
반전 운동가들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그는 결코 평화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와 그의 조국은 이런 운명을 맞기엔 억울했다. 내가 만약 가련한 처지가 된 우방국에게 우리 의회가 원조를 중단 하는 결의를 할 것이라고 예견했더라면 나는 1972년 마지막 단계의 협상에서 (그에게) 무리한 압력을 넣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생각을 했다”
키신저의 때늦은 후회는 사치라고 하겠다. 그의 판단착오 때문에 월남이 공산화되고 수천만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수십만 명의 “보트피플”이 동지나해와 남지나해에서 상어의 밥이 될 운명이었다. 키신저의 후회는 자신의 양심을 증명하는 것이 될지언정 망국의 국민들을 달랠 수는 없었다. 키신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월남의 공산화를 막지 못한 것은 미국내의 소위 평화운동 때문이었다고 했다.
반전평화운동은 언론과 의회에 큰 영향을 끼쳐 월남에 대한 지원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73년 6월 미국 의회는 인도지나에 대한 군사지원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양면의 얼굴 키신저’

이 기간, 즉 휴전협정 서명 후 1년반 동안 월맹은 13만 명의 정규군과 탱크 대포를 17도선 이남으로 침투시켰다. 이 명백한 휴전협정 위반에 대해서 닉슨은 티우에 대한 약속(휴전협정을 어기면 월맹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의 편지)을 지킬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월남에 대한 경제지원도 73회계연도의 21억 달러에서 다음해에는 10억 달러, 75년엔 7억 달러로 줄었다. 키신저도 월맹이 휴전협정을 준수할 마음이 없고 공산화로 가는 과도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국내정치 상황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수단을 동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떤 외교정책도 국내정치의 사보타지에 직면하면 실천될 수가 없는 것이다.

▲DJ 노벨상 수상을 위한 마스터플랜-진행상황을 궁금해 한다는 HJ는 당시 청와대 부속실장인 김한정 남양주출신 현 더불어민주당의원을 의미한다.

▲DJ 노벨상 수상을 위한 마스터플랜-진행상황을 궁금해 한다는 HJ는 당시 청와대 부속실장인 김한정 남양주출신 현 더불어민주당의원을 의미한다.

월남에서 미국이 진 것은 군사력이 약해서도, 경제력이 약해서도 아니다. 전쟁의지가 약했기 때문이다. 17도선 이북 월맹에 대한 육군의 투입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폭격으로 월맹의 전쟁 의지를 꺾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적 군사력의 원천을 온존시키고 월맹의 수족인 월남내의 월맹 정규군-베트콩하고만 싸우는 데 미군 군사력을 투입했으니 미국은 결전을 포기하고 지엽적인 전투에 매달린 셈이다. 이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즉 미국의 전쟁의지를 약화시킨 것이 반전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언론과 의회의 브레이크였다.

감상이 끼어들 수 없는 무장대치 상황을 놓고 평화란 이름으로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게임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평화와 민족을 앞세운 말장난에 속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는 자주성, 인간과 국가의 존엄성을 함께 지켜가기 위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가치,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경제력과 군사력, 이런 힘을 건설하는 것이 평화협정이나 노벨평화상보다도 더 중요하다.
노벨평화상을 1백개나 받아도 그 결과로써 국민들의 행복과 안전이 위태로워 진다면 그 상은 키신저의 노벨상처럼 영원히 역사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역사의 비웃음거리”

과거 노벨재단은 김대중 로비설에 대하여 군나르 베르게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답변 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인에게 노벨상을 주지 말라고 한국인들에게 로비 시도를 받았다고 했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게 로비를 하려고 하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고 밝힌다면서, “한국인은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렇다. 한국으로부터 로비가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대중 정부로부터의 로비가 아니었다.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벨상을 주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대중의 노벨상 수상을 반대하는 편지 수천통이 전달되었다”면서 “모두 경상도에서 날아든 편지였다”고 했다.
“내가 노벨 위원회에 들어온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나라에서 반대를 표시하는 편지가 날아온 것은. 그것이 특정지역에서 날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그 지역의 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노벨상 중에서도 가장 노벨의 염원을 담고있는 평화상이 로비로 받아 낼 수 있는 상이라면 과연 세계 제일의 평화상으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편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노벨상은 로비로 얻어낼 수 있는 상이 아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상이 얼마나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더더욱 그 가치가 찬란히 빛나는 것이다.왜 다수의 한국인들이 김대중의 위대함과 그의 민주주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에 감명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노벨상심사위원회 비상임간사인 노르웨이 스팔니치뇨 박사(노르웨이 국립대학 종신교수)는 공평하고, 공정한 심사결과에 따른 노벨상수상을 자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불공정하고 부당한 수상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에 또다시 노벨상을 수여하는 것은 노벨상 취지에 어긋나는 행위라 판단하여 대한민국에 ‘다시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대중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지금까지의 역대 수상 중 가장 빛나는 수상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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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에 드리웠던 검은 그림자들

“노벨평화상이 코메디가 되어 버렸다”

노벨평화상은 현재 지구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 영예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거대한 만큼 국제적으로 얽힌 이해관계의 그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도 항상 따른다. 국제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노벨평화상 수상 사례를 알아본다.

1. 헨리 키신저 – 노벨 평화상(1973)

키신저노벨평화상 비판에 가장 좋은 선례가 바로 1973년 수상한 독일 출신의 미국 정치인 헨리 키신저다. “외교의 귀재”라는 별명을 지닌 키신저는 월맹 정치인 레둑토와 함께 ‘1968년 베트남 화평교섭을 위한 파리회담’에서 성공적 교섭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73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러나 공동 수상자인 월맹의 레둑토는 “미국이 휴전협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평화상 수상을 거부했다. 키신저는 수상을 수락은 했으나, 반전운동가들의 시위에 겁을 먹어 수상식에 나가지 않았다.
더구나 키신저는 나중에 베트남 평화가 달성되는 커녕 1975년에 공산화가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평화상과 상급을 반납하겠다고 했으나, 이번에 수상 주최자인 노벨위원회가 받아 들이지 않았다.
주는 쪽이나 받은 쪽 모두 코메디였다.

애초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미국의 젊은 세대는 키신저가 국무장관을 지내며 비인도적 해외 정치공작과 전쟁행위를 주도했던 인물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어 키신저의 평화상 수상은 곧 전 세계의 반발과 조롱, 그리고 수많은 논란을 낳았다.
키신저는 베트남전 당시 선전포고 없이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경에 대해 대규모 폭격 작전을 강행해 확전을 촉발한 인물이다. 베트남군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국제법 과 교전수칙을 어겨가며 미국 내에서도 극비리에 이루어진 이 폭격은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켰으며 이후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 수립 및 킬링필드 학살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키신저는 또한 남미 국가들의 국민압제 정책인 ‘콘도르 작전’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브라질 등 정부가 각자 정보기관을 동원해 자행 했던 대대적 국민압제 정책인 ‘콘도르 작전’은 노조, 좌익인사, 성직자, 학생, 지식인 등을 대상으로 했으며 비밀리에 진행돼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소 6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키신저의 수상에 반대한 두 명의 노르웨이 노벨 위원은 사의를 표명했다. 심지어 정치풍자 코미디언 톰 레러 조차도 “헨리 키신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자체로 더 이상 정치풍자는 한물간 것이 돼버렸다”고 촌평할 정도였다.

2.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 노벨 평화상(2009)

2009년도 노벨평화상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수상했다. 보통 노벨평화상은 평화를 이룩한 업적에 주는 상인데 오바마 대통령은 평화상 후보에 오른 시점이 고작 임기 12일째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수상 이유가 “다양한 외교적 성과와 국제 화합을 위한 공로”였다.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존재 한다는 국제적 의혹이 제기됐다. 당황한 노벨 위원회는 오바마가 국제 협력 분야에서 ‘추후 기울일 노력’을 사전에 응원하는 차원에서 수여를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앞날을 보고 잘 할 줄 믿고 상을 주었다고 했는데, 그후위 오바바의 행적을 보면 답이 나온다.

3. 코델 헐 – 노벨 평화상(1945)

1945년, 미국 정치인 코델 헐은 UN 설립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수상 6년 전 발생한 ‘S.S. 세인트루이스 사태’에서 보여준 헐의 행적이 그의 평화상 수상 자격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S.S. 세인트루이스 사태’는 헐이 루즈벨트 정권에서 국무장관을 지내던 당시 1939년 나치로부터 도망친 유대인 난민 950명이 미국에 망명을 시도했던 사건이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난민들을 수용하려 했으나 국무장관 헐은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으며 남부 민주당원들과 합세해 차기 대선에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같은 해 7월 4일 루즈벨트는 난민 수송선 입항을 거부 했으며, 유럽으로 회항한 이들 난민의 4분의 1 이상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됐다. 평화상은 인도주의 정신에 주는 상이기도 한데, 난민을 거부해 나치의 학살극으로 보낸 자가 평화상 수상자가 된 것이다.

4. 야세르 아라파트 – 노벨 평화상(1994)

1994년 노벨평화상은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기구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함께 오슬로협정을 체결한 공로로 수상했다. 노벨 위원회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오슬로협정이 “중동에서의 화합을 향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제공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아라파트가 “장기간 폭력을 조장해 온 몰염치한 테러리스트”에 불과 하다는 세계적 여론이 비등했다. 노벨상 심사위원 코레 크리스티안센은 아라파트의 수상에 반대하며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폭력으로 얻은 권력으로 정치협상을 잘하면 평화상도 탈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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