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 진상 특집] 4.29폭동 25년 만에 드러나는 진상과 사실들 (3), 그들은 조직적으로 한인들을 제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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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폭동 진상과 배경 그리고 이경원 대기자의 외침

‘그들은 오히려 폭동을 방조하고 부추겼다’

왜? 우리가 당해야만 했는가? 4.29 폭동 이후 한인이면 한 번쯤 생각하는 주제이다. 4.29폭동 당시 부시 대통령이 LA를 방문했다. 당시 한인들은 다운타운 부시 대통령 숙소인 보나벤추어 호텔에 달려가 데모를 벌였다. 시위대의 한 여성은 “우리 잘못도 아닌데, 왜 우리가 당해야만 했는가?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라고 외쳤다. 또 다른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는 다른 나라 전쟁에도 즉각 출동하면서 왜 우리 코리아타운 보호에는 늑장을 부렸는가?”라고 항변했다. 4.29 폭동 후 잿더미가 된 코리아타운은 미국 정치인들이나 한국이 정치인들이 부리나케 찾아온 지역이 되어버렸다. 마치 관광지로 된 것 같은 지역이었다. 이런 수모를 한인사회가 왜 당해야만 했는지 그 진상을 알아야 하고, 용서는 하되 그 교훈은 절대로 잊지는 말아야 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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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원 대기자

4.29폭동 후 이경원 원로 대기자는 틈만 나면 미국의 대학들을 순방하면서 한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4.29 역사를 가르쳤다. “너희들의 부모들은 언어 문제로 할 말을 못하고 있다”면서 “너희들이 부모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고, 그것이 한인 커뮤니티를 위하는 길이다”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이경원 대기자가 제시한 4.29 폭동의 진상을 요구하는 질문서이다.

1) 4.29 폭동 당시 LA 카운티 세리프 셔만 블록(Sherman Block) 국장과 LA지역 FBI 국장은 한인들에게 가해자 대규모 인권 위반자들을 기소하겠다고 공언하고서는 이를 이행치 않았다. Why?
2) 당시 LA PD 경찰은 폭동 발생 2일 동안 수많은 한인 상인들과 한인 거주자들의 보호 요청을 거부했다. 그 대신 경찰들은 코리아타운의 뒤편의 웨스트 LA와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Why?
3) 당시 LA PD는 ‘로드니 킹 사건’과 ‘라타샤 할린즈 사건’ 발생 후 정보망을 통해 흑인 갱들과 라티노 갱들이 한인 상가에 대한 보복행위를 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4) LA PD는 ‘로드니 킹 사건’ 재판에서 4명의 경관이 무죄 평결 될 경우 이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5) LA PD는 폭동 당시 폭도들이 한인 상가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것을 방치하는 대신에, 한인들이 무장해 자신들의 상가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을 체포했다. 이 같은 명령은 누가 내렸는가?
6) ‘라타샤 할린즈 사건’과 관련해 마지막 특정 부분만을 편집해 방영이 됐는데, 이 같은 편집은 LA PD 인가, 검찰인가 또는 언론 기관인가? 진상을 밝혀라.
7) 폭동 중에도 ‘로드니 킹 구타 장면’과 ‘라타샤 할린즈 사건’이 계속 주류 언론에서 왜곡 편집 보도를 했는데 누가 책임인가?
8) 한인 폭동 피해자들에 대한 보험 혜택 문제에서 주 보험국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주지 못했다. Why?
9) 폭동 구호차 출동한 FEMA 측이 제대로 한인 피해자들을 적절히 도와주지 않아 주택이나 사업체를 잊어버렸다. Why?
10) 폭동 후 피해 복구에 나선 한인 피해자들을 LA 시의회가 업체 면허 갱신을 거부하는 조치를 취했다. Why?

한인 사회가 당한 피해 보상과 명예 회복 그리고 보상을 위해서는 법적 투쟁이 선행돼야 한다.
한인사회의 원로 법조인인 민병수 변호사는 “인권투쟁은 외롭고 힘든 일”이라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송은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되겠지만 우리를 위한 게 아니라 한인타운의 미래 즉 우리의 차세대들을 위한 싸움”이라며 “우리의 발언권과 민권을 찾는 싸움에 끝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을 강조했다.

민병수 변호사는 “아시아 인종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인들도 지난 동안 약 200개의 민권 소송을 제기했다”면서 “그중에서 불과 몇 개 만 승소했다”면서 인권투쟁의 어려움을 밝혔다. 따라서 그는 “인권운동은 죽어라 해야 한다”면서 “흑인들의 역사에서 300여 년 동안 민권 투쟁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흑 갈등을 문화적 차이 배경으로 몰고 가

5미국 사회에서 더 유명한 언론인 이경원 대기자는 “우리 미주한인사회에 수천 명의 엘리트인 변호사, 의사, 교수, CPA, 과학자 들이 있는데, 왜 이들이 4.29때 동포사회가 당한 수난에 대해 왜 대변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다”면서 “한마디로 ‘노블리제 오블리주’가 실종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민병수 변호사와 이경원 대기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계가 수용소에 수감되는 수난을 겪었다” 면서 “일본 커뮤니티는 그 후 무려 40여 년을 투쟁해 명예 회복과 보상을 받았다”라고 전하면서 “우리도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평소 미주한인 이민사를 연구해 온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 씨는 4.29를 바라보는 한인 사회에 대해 “과거는 우리의 유산, 현재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 미래는 도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4.29폭동의 진상 규명과 한인 커뮤니티의 명예 회복은 우리 한인들의 숙원사업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LA 타임스 기자로 활동했던 존 리 씨는 “폭동이 발생하기 전부터 LA 타임스를 포함한 미 주류 언론사들은 한인 상점들의 고객과 업주 간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다루어왔다”면서 “그러나 만약 고객과 업주가 흑인과 한인으로 구성되지 않았을 경우 그 사건은 기사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라고 폭로했다. 말하자면 한흑 갈등 소재를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UCLA 사회학자인 데릴 헌터는 “언론들은 한인사회와 흑인 사회 간에 진정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도하는 데는 무관심했다”면서 “그런 점에서 한흑 갈등만을 기사화 한 점에서 미디어는 한흑 갈등을 충돌시킨 공범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나 깊이도 없이 그저 미디어를 통해 사건을 접하게 된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미디어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레리 엘더는 “한인사회가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흑인 사회와 여러 차례의 회의를 가진 노력 자체가 한인들이 인종차별을 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 다”라고 말했다.

당시 한인 갈등에 대한 주류 언론들의 집착은 마치 한인 상인들의 문화적 무지가 이 지역 문제의 원인인 듯 초점을 맞추었다.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교수는 “LA 타임스는 한인업주들을 무례하고 흑인 사회를 착취하는 자들로 묘사한 반면, 뉴욕 타임스는 한인업주들을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묘사했다”면서 “그리고 흑인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알 샤프톤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하며 그가 흑인 사회를 결집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LA 타임스는 대니 베이크웰을 흑인 사회의 새로운 지도자로 묘사했다”라고 밝혔다

박계영 UCLA 교수도 “뉴욕 타임스와 달리 LA 타임스는 문제의 저변 구조를 다루지 못했다”면서 “LA 타임스는 한흑 갈등을 항상 인종 문제로 보도하면서 이를 문화 차이의 탓으로 돌렸다”라고 했다.
그는 더 나아가 “당시 언론은 이 두 개의 무지한 인종들 간의 분쟁을 보도하면서 마치 이를 즐기는 듯했다”면서 “백인들만이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 한인들처럼 새로운 이민자들도 인종차별을 한다는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흑인들의 백인에 대한 악감정을 한인들에게 돌려버렸다는 점이다.

민권 운동가인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60년대부터 과격파들의 영향력이 LA 타임스를 운영하고 있었다.”면서 “그들은 한인들이 매일 18시간씩 일하고 모든 가족들이 동원되어 상점 일을 돌보지만 한인들은 선택받은 그룹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LA 타임스의 언론 관계자들이 한인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4.29 폭동 한 달 전 1992년 3월 3일 비디오로 녹화된 사건 장면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LA 사회를 분열시켰다. 그중 전 세계가 보았던 비디오 장면이 ‘로드니 킹 사건’이었다.

두순자 사건과 로드니 킹 사건은 전혀 다른 차원

흑인들을 분노케 한 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뿐만 아니라 2주간 간격으로 발생한 한인업주 가게에서 발생한 흑인 소녀 피살사건이었다. 1992년 3월 16일 흑인 10대 소녀 라타샤 할린즈 양이 한인 리쿼 스토어 업주 두순자 씨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다. 재판 결과는 과실치사 혐의로 5년 집행 유예였다. 흑인 사회는 이 판결이 너무나 가볍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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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타사 할린즈 사건 이후 나붙은 한인 비방 벽보

작가인 루케넌은 “배심원들은 두순자 씨에게 고의적 과실치사로 평결했다. 두 씨의 범행이 고의적이라는 것이었다.”면서 “그러나 판사가 공정한 평결을 무시하고 부당한 선고를 하면서 흑인 사회에 불씨를 던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데릴 헌트는 “흑인 사회를 뒤흔든 사실은 이런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그 자체보다 그 사건 역시 비디오에 포착되었다는 점이다”면서 “두순자 씨가 너무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는 것에 흑인들이 분노했다”고 말했다.

민권운동가인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다른 면에서 이 사건을 보았다. 그는 “두순자 사건 전 약 3년 동안 한인 상점 주인이나 관련자들 37명이 강도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나 언론들은 단 한 건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면서 “그런데 흑인 인종 차별 주의자들은 이 두순자 총격 사건을 이용하여 한인 사회와의 전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흑인을 죽이고도 (한인이) 감옥에 가는 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더군다나 흑인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던 흑인 목사들의 행동도 문제였다. 지난 29일 LA 한인회와 공동으로 4.29 행사를 벌인 LA 흑인 사회 최대 교회의 하나인 AME 교회의 메레이 목사는 할린즈 피살 사건 당시 “두순자씨는 라타샤 할린즈라는 소녀를 본 것인가 아니면, 야만인 집단의 한 일원을 본 것인가”라고 소리쳤다.
레리 어브리는 “흑인들은 할린즈 양이 매정하게 총에 맞아 죽었으나, 두순자씨는 단지 회초리 한대 맞은 것으로 사법처리가 됐다는 점에 분노가 일어났다”면서 “그들의 분노를 사법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한인들을 향해서 나왔다는 점이다”라고 분석했다.

도시문제 이론가인 마이크 데이비스는 “어린 소년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변명할 수 없으나 그 사건으로 한인사회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다”라고 지적했다.
당시 LA 경찰국의 입장도 문제라고 지적을 받고 있다. ‘로드니 킹 사건’ 테이프 유출 직후 심한 압박을 받았던 LA 경찰국은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자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의혹을 유발했던 것이다.

조작된 언론 보도와 선동적 경찰 기자회견

이 사건은 로드니 킹 사건 발생 후 13일 후에 발생했고, 킹을 구타한 4명의 LA 경찰이 기소된 지 24시간 만에 일어났다. 경찰이 왜 서둘러 기자회견을 한 것이 의혹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확실한 의도는 알 수 없으나 결과는 그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의 관심이 이 사건으로 집중시킨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기자회견 후 TV 보도에서도 15세 할린즈의 죽음은 51세의 두순자씨가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이라며 경찰은 감시 카메라를 분석한 결과 할린즈 양이 오렌지 주스를 훔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애초 할린즈 양이 오렌지 주스를 훔치려 했기에 두 사람 간에 다툼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는데, 경찰이 그것이 아니라고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흑인들은 한인 두순자가 어린 소녀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점에 대해 LA 타임스 기자였던 존 리 기자는 “LA 경찰국의 기자회견 시기와 왜 경찰이 서둘러서 이 사건을 기사화했는가에 관한 의문을 던지게 하기에 충분했다”면서 “만약 한인 상인이 아닌 흑인 상인에 의해 흑인 소녀가 살해됐다면 아무도 흑인 상인에 관한 뉴스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이 이 사건을 두고 교묘히 한흑 갈등을 조장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경원 원로 기자는 “왜 미국 언론들은 두순자 씨를 말할 때 ‘한국인 두순자 씨’라고 토를 달았는가”라면서 “그녀는 미국 시민이었다. 미국 언론들은 헨리 키신저를 이야기할 때 ‘독일인 키신저’라고 하지 않는다. 이처럼 미국 언론들은 ‘두순자 씨 사건’을 ‘한인 두순자가 쏘았다’라면서 인종 갈등 문제로 보도했던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두순자 사건’을 두고 언론들이 보도한 것도 한흑 갈등을 조장하거나 선동하는 쪽으로 언론들이 몰고 갔다.
존 리 기자는 “처음 공개된 ‘두순자 사건’ 테이프에는 두순자씨가 할리즈 양에게 얻어 맡고 땅에 쓰러진 장면 상황이 전부 공개됐다”면서 “그러나 그 후에는 사건을 다룰 때마다 총만 쏘고 맞는 편집된 내용만 나왔다. 즉 할린즈 양이 뒤통수에 총을 맞는 장면만 보여주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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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9 폭동의 시발점이 된 로드니 킹 구타 사건 장면

데이비드 호로위츠도 “미국 언론들은 총격 장면만 보여주었다. 할린즈 양이 처음 두순자씨의 얼굴을 때리는 장면은 삭제됐다”면서 “미 주류 언론들이 고의적으로 이런 장면을 삭제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데이비드 호로위츠는 “왜 언론이 그처럼 무책임했던가는 미국 역사와 관련이 있다”면서 “미국은 과거에 흑인에게 큰 죄를 지었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흑인들이 미국의 노예였기에 미국의 오명으로 남겨졌다”면서 “언론을 운영하는 자들도 흑인에게 보상하려는 듯이 그들의 범죄를 과잉보호하고 그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했다”라고 밝혔다.

흑인 지도자들도 폭동을 선동하는 무책임한 행위를 저질렀다. AME 교회 목사들을 포함해 그들은 여러 차례 라디오나 TV에 나타나 LA를 불태우자고 선동했다. 나중에 LA 시의원이 되고 현재 LA 카운티 슈퍼바이저인 마크 리들리 토마스도 폭동 당시 “우리는 그저 누워서 당하지만은 않겠다”라고 말했었다. 그는 시의원 당시 사우스 LA 지역에서 피해를 당한 한인 상인들의 복구 노력에 견제를 가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당시 TV에서도 한인들이 표적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흑인 상점들은 피해를 면했지만 한인 상점들은 모조리 파괴됐다. 인구학자인 리오 에스트라다는 “폭동 당시 모든 상점들은 약탈당하고 타지 않았다”면서 “확실한 것은 한인들 소유의 상점들은 대부분 약탈당하고 방화됐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한인 상가 털려도 경찰은 수수방관 참담한 교훈 상기해야

4.29폭동 25주년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4.29’의 진상 규명이 이뤄진 다음에 화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경원 원로 기자는 “한인 커뮤니티가 ‘잊힌 사건’이 된 4.29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 작업이 선결이다”면서 “우리들은 일본 커뮤니티가 40년에 걸쳐 2차 대전 당시 수용소 사건을 규명해 끝내 명예 회복과 보상을 받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4.29폭동 25주년을 조명하는데 전체 한인사회가 단합의 계기로 많은 단체들이 하나의 프로그램을 만들지 못하고 각자 단체들의 활동과시 등 자신들의 주장을 보이는 것도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4.29폭동에서 분명한 것은 한인들이 미국 내에 오랫동안 지속된 흑백 갈등의 전쟁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코리아타운이 그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인들이나 흑인들도 한인에 대해 이해가 없었다. 그저 한인은 일본이나 중국 사이의 어느 쪽에 연결된 민족으로 치부해버리고 있었다.

조금 안다는 측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정도였다. 그것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 들이나 그들의 가족들 정도였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4.29폭동 전의 한인에 대한 보통 미국인들의 생각이었다.

1970년대 한인 이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고국에서 비록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미국은 “천국”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이민 온 한인들은 인종차별은 있을지 몰라도 인권은 평등하다고 믿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아직도 미국이 평등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모르고 LA 공항에 이민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당시의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 내에서 비백인 소수 인종들이 어떤 착취나 억압을 당해왔는지의 수난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나 인식이 없었다. 그런 반면 근면하고 열심히 살면 “아메리칸드림”을 이룰 수 있다는 ‘기회의 땅’에 온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에도 권력층이나 부자들이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민주주의 천국”이라는 망상에 잡혀 열심히 일하면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잘 보호해준다는 믿음도 있었다.

이런 한인들을 미국의 제도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공권력, 언론. 기업 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흑인들의 분노의 폭발에 대해 대치물이 있어야 했다. 한인 상점 여주인이 15세 흑인 소녀를 과실치사로 숨지게 한 사건은 절호의 호재였다.
특히 언론들은 이 사건을 통해 흑인과 한인 들 간의 갈등을 최대한 이용했다. 유태인 상인들이 빠져나간 흑인촌에서 한인들이 이를 인계받은 것은 마치 백인들 것을 대신하는 듯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을 무차별하게 구타한 백인 경찰들에게 무죄 평결은 개솔린 탱크에 성냥불 을 던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흑인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 한인 상점이 있었다. 흑인과 라티노 폭도들은 사우스 센트럴에서 북상하면서 마구잡이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들이 경찰에 전화를 했을 때 응답이 없었다. 한인 상점이 털렸을 때 경찰은 보고만 있었다. 이판사판이라 일부 한인들이 무기를 들고 스스로 재산을 지키려고 나섰다. 이런 모습을 미국 언론들은 “허가받지 않은 총으로 나선 또 다른 난동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미국의 소방관들은 산불을 진화할 때 가끔 맞불을 놓는다. 4.29폭동 때도 LA 경찰은 폭도들이 웨스트 LA나 비버리 힐스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코리아타운을 완충지대로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흑인들 백인에 대한 분노감 표출을 한인에게

UC 버클리 대학의 한국계 엘레인 김 교수는 4.29폭동 후 발표한 글에서 “미국 주류 언론들이 한국인에 대한 악의를 증폭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 교수는 첫째, 주류 언론들은 흑인과 한인사회 간의 보도 내용도 이들 간의 화합 노력보다는 갈등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둘째, 폭동 당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옥상에서 총을 들고 있는 한인들을 묘사할 때, ‘자칫하면 군중을 향하여 총격을 가할지도 모를 불가해한 이방인’이라는 인종주의적 상투형으로 한인을 묘사했다.

대부분 미국 TV에서 뉴스 프로그램과 토크쇼에서는 흑인과 한 인간의 긴장 문제를 다루면서 흑인과 백인만 나와서 얘기하도록 했으며, 출연자들은 이러한 긴장을 폭동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김 교수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어떤 유럽 출신 백인이 출연해서 ‘무례하고 착취적인 한인 상인들이 평화로운 인종 관계를 망쳐 놨다’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그러기에 한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인종 차별주의로부터, 그리고 미국 생활 구조 안에 이미 잘 짜인 경제적 부조리와 빈곤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데 이용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내가 알기로 폭동 전까지 어떤 미 주류 언론도 한흑 합동 예배나 합동 뮤지컬 공연과 시 낭독회, 한인들이 흑인 지역 사회와 청소년들에 기부한 사실, 한인들에게 시민권 안내 자원봉사하는 흑인 선생들과 흑인 봉사자들, 미국의 흑인 역사 자료에 대한 한국어 번역 등 두 인종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4.29폭동을 통해 우리는 한인끼리만 살 수 없다며 미국 사회를 보는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우스 LA에서 흑인들의 달러를 받아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그 달러는 범죄나 마약으로 번 돈’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흑인들이 어떻게 우리를 보아 왔는지 4.29폭동을 통해서 실감했다. 그래서 우리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 것도 소중하지만 남의 것도 인정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 정체성의 실현이다.

코리아타운에서는 영어를 한 글자를 몰라도 일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농담이 있다. 한인 산부인과에 가서 아기를 놓고 우리 음식, 우리 옷 가게 등 “서울특별시 나성구”라고도 불리는 타운에서 영어 한마디 안 쓰고 살다가 죽어도 한인 장의사가 한인 묘지에 묻어 준다. 하지만 4.29폭동은 우리를 “우물 안 개구리”에서 또 다른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1980년대 이경원 기자는 한인사회 취재를 하면서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 그것은 한인들이 어려울수록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뻗어 나가는 끈기 있는 민족이라는 사실이었다. 활기차고 대담하고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이 한인들의 모습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수많은 이민 1세들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의사, 교수, 엔지니어, 과학자, 변호사, 회계사, 기업인, 공무원으로 잘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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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9폭동 25주년 기념 행사에서 로라 전 LA 한인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눈부신 개인적 성공사례에 고무된 것만큼이나 이 기자를 악령처럼 괴롭힌 우울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분열되고 힘없는 코리아타운, 특히 미 주류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코리아타운의 대부분 엘리트 출신들이 어려운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봉사와 참여 정신이 없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4.29폭동은 이들 엘리트들에게도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4.29폭동은 한인들에게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커뮤니티가 함께 해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불어 넣어 주었다. 지난날에는 나의 가족, 학벌, 나의 교회만을 주장했다. 그것이 우리들의 커뮤니티로 확대되어 나갔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이 커뮤니티에도 도움이 되어야 보람이 있다는 가치관을 심어주게 되었다.

정체성 회복하지 못하면 또 4.29폭동 전철

이경원 기자는 “4.29가 우리에게 증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한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수많은 빛나는 개인적 명예와 업적을 합친다 해도 경쟁관계와 이해집단으로 점철된 이 나라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 어쩌면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는 커뮤니티 의식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체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의 탄생 앞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세기 전 이 땅에는 도산 안창호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불행히도 지금은 우리 커뮤니티는 이 같은 ‘롤모델’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미주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부르는 호칭이 무엇일까. 흥사단 단우이며 미주한인재단의 총회장을 역임한 윤병욱 회장은 “우리 한인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미주한인’(Korean American)으로 불러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에서 해외한인을 동포, 교포, 교민, 재외국민 등의 여러 가지 용어를 혼용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본다”라며 간단한 예로 지금도 해외 한인을 대표하는 기관의 이름이 ‘재외 동포재단’으로 불리고 해외 한인을 관장하는 법을 ‘재외동포법’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경원 원로 대기자는 “4.29를 잊으면 또 당한다. 엘리트 한인들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4.29 폭동 진상 규명을 이루어 내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꿈이 없어진다”라고 호소한다. 그 꿈이 바로 정체성을 키워가는 목표이다. 앞으로 한인 정체성을 위해서라도 우리 자신의 문패부터 정해야 할 것이다.

100여 년 전 이 땅의 한인 선조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던 그 정체성을 우리가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폭동에서도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4.29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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