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7주년 특집 발굴 기사] “한 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Once a Marine, always a 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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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잊지 못하는 미 해병 향군 용사

85세 바바라 벨트란 스틸 여사

한국전쟁을‘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지난 60여 년 동안 ‘Korean War’를 절대로 잊지 않고, 주위에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디언 여성이 있다.
아파치(Apachi) 인디언의 후손 바바라 벨트란 스틸(85, Barbara Beltran Steele)여사다. 그녀는 한국 전쟁이 한창일 1950년 12월 8일에 18세 여고 졸업생으로 미 해병대(US Marines Corp)에 입대한 여군이었다. 해병대 근무 중 해병 상사와 결혼했으며, 제대 후 ‘한국전 참전 재향군인회’(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회원으로서 지금까지 60여 년 동안 줄기차게 활동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한국전쟁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미 해병대는 바바라 여사를 <This Marine Was One of ‘A Few Good Women’ (“아주 훌륭한 해병 여전사”)라고 부른다. 그녀가 어디를 가나 빼놓지 않고 말하는 대목은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 그래서 미해병대가 자랑으로 여기는 여군이 바로 바바라 벨트란 스틸 여사다.
<성진 취재부 기자>

01현재 애리조나 주 프레스코트(Prescott)에서 딸 데보라와 함께 살고 있는 바바라 여사는 원래 출생지가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였다. 그녀는 인디언 혈통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미 해병대’를 좋아했다.
산타 바바라 고교 시절에 미 해병대를 지원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라는 이유로 거부됐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 연령이 변경되면서 소원하던 미 해병대 입대가 이뤄졌다.
당시 산타 바바라는 전쟁 시기라 많은 군부대들이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고, 다운타운의 고급호텔 3곳도 군부대가 징발할 정도였다.

그녀가 해병대에 입대한 1950년대 미국 사회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였다. 한번은 군부대 작전상 조지아 주로 4명 동료 해병들과 선발대로 파견됐다. 그들은 애틀랜타에 있는 숙소 호텔의 이태리 식당에 들렀다. 그런데 식당측은 다른 해병 군인들로부터는 주문을 받았으나, 바바라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주문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부대원 20여 명이 도착해서 바바라가 주문 거절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대원을 인솔한 한 지휘관은 식당 측에 대하여 “바바라 대원에게 음식 주문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에게도 받을 수 없다” 면서 부대원 전원이 그 숙소를 떠났다.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한 바바라는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once a Marine, always a Marine’)라고 말했다.
부모도 그녀의 해병대 입대를 말리지 못했다. 그녀가 1950년 12월 입대가 되어 캠프 펠들턴 해병 기지에서 훈련을 받으러 산타 바바라를 떠나기 위해 그레이하운드 버스 정거장에서 부모와 이별을 해야 했다.
이때 버스에 오르는 딸에게 아버지는 “너는 해병대에 입대하겠다고 부모를 졸라 결국 너의 뜻대로 가는 구나”면서 “한 가지 잊지 말아라. 너의 인생을 네가 선택했으니, 앞으로 어떤 불평도 내가 듣지 않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그녀는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겼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어디서나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이다.

그녀의 가정 역시 한국전쟁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이다. 남자 형제 3명이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큰 오빠 에드워드 벨트란(Edward Beltran, USMC Veteran)은 해병대로, 다른 두 명의 형제는 미 해군으로 각각 한국전에 참전했다. 한 가정에서 동시에 4명 형제자매들이 참전했다는 것도 미 국방부 전사에 이례적인 기록 중의 하나다.

특히 그녀의 큰 오빠인 에드워드 벨트란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 했던 격전지의 하나였던 소위 “장진호 전투”(미군들은 ‘쵸신퓨’(Chosin Few)라고 부른다)에서 영웅적인 전공을 세워 동성무공 훈장을 받은 용사다.

본 기자는 지난 2010년 당시 산타 바바라에서 김원보 한미문화협회장이 주최한 ‘한국전참전용사 사은의 밤’행사에 참석했던 벨트란 노병과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500여 명을 상대로 싸운 투혼은 미 국방 전사에도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한편 그는 전쟁 영웅이기도 하지만 제대 후 한국전쟁에서 싸운 전우들의 희생과 충정을 담은 그림을 그려 한국전을 널리 알려온 예술가이기도 하다. 특히 그가 ‘장진호 전투’에서의 전우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은 LA에 건립될 ‘한국 전참전비’의 기본 그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별첨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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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트란 노병이 그린 전우들의 모습, ‘장진호 전투’를 그린 것이다.

지난 2010년 당시 80세를 훌쩍 넘긴 그는 ‘한국전 참전용사 사은의 밤’ 행사에 부인 리브(Liv-Anna) 여사가 끄는 휠체어에 몸을 싣고 옛 전우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기자를 만난 노병 벨트란 씨는 ‘북한에 한국전쟁 국군 포로들이 남아있다’라고 본 기자가 말에 깜짝 놀라면서 “60년이 지나는데 아직도 국군포로들이 돌아오지 못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며 “그들은 조건 없이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한국전쟁의 회상기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2개월도 안되어 1950년 8월5일 전쟁에 투입된 22세의 청년 벨트란 상병은 미 해병 1사단 제5해병 5연대 1 대대 중화기 소대원이었다. 그 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인천을 거처 서울 탈환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해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을 눈앞에 있었는데, 중공군의 참전으로 그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인종차별도 이겨내

그 해 12월 6일, 벨트란은 장진호 저수지 남쪽 “하갈우리”에 있었다. 그날 밤 영하 20도에 눈과 바람이 앞을 가릴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벨트란이 소속된 제5연대가 바로 “하갈우리”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중화기 중대의 공격화기조의 바주카포 포수였다.

6일 아침 2대대의 D중대는 지난주 동안 점거하고 있던 동부고지로부터 중공군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날 밤 눈보라가 몰아치는 가운데 중공군이 반격을 가해왔다. 바로 이 전투가 ‘장진호 전투’에서 치른 전투 중 가장 격심하고 처참했던 전투였다.

벨트란이 소속한 해병팀은 유담리에서부터 남쪽으로 가는 도로를 가로 지르는 철로 부근에 위치했다. 동부고지와 또 다른 작은 언덕이 미 해병대 정면에 놓여 있었다. 중공군은 두 언덕의 좁은 골짜기와 철로를 따라서 공격해왔다. 6일 초저녁에 벨트란의 바주카포 장전병이 탄약을 가지러 갔을 때 그는 중공군의 기관총 공격을 처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가 바주카포를 쏘았더니 중공군 기관총좌에 적중은 하였으나 기관총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가 혼자서 재장전을 하고 있는데 측면 시야에서 중공군 한 명이 들어 닥쳤다. 중공군이 이미 충격 수류탄을 그에게 던졌다. 벨트란은 기절하면서도 상대편을 향해 총격을 가한 후 쓰러졌다. 멍해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그는 다른 장전병의 부축을 받았다. 그는 자신에게 수류탄을 던진 중공군을 자신이 사살했다는 것을 어슴프레 기억했다.

이날 충격 수류탄으로 벨트란은 이미 지난 11월 28일 전투 때 왼쪽 얼굴에 파편으로 부상당한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렀으나 그는 꿋꿋하게 서서 움직였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동료 해병은 여전히 “위생병! 위생병!”을 부르고 있었다.

이날 중공군의 공격은 더 심해졌다. 한편 이날 일찍부터 눈에 익었던 미 육군 탱크가 벨트란의 시선을 끌었다. 이 탱크는 자그마한 야산에 있었는데, 그 사격방향은 북동이며 좁은 골짜기는 물론 철로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공격도 방어하고 있었다.

탱크가 포사격을 그치고 포신이 후방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아마도 일부 파손한 것 같았다. 한 군인이 (후에 알았지만 이 탱크의 지휘관인 중사가 50구경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전방의 30구경 기관총은 후면을 향해 후방의 전투를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총소리도 잠잠해졌다.

그 탱크 지휘관이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류탄의 충격으로 아직 휘청거렸지만 그에게 달려가 권총 탄띠와 멜빵으로 옮겨서 다른 부상병들이 누워있는 마른 웅덩이에 끌고 가 눕혀 놓았다. 그 탱크 지휘관은 배에 총을 맞았다고 했으나 출혈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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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바라 스틸 여사의 서신

벨트란은 그 지휘관의 혁대를 풀고 상처를 만져 보았다. 손으로 그의 배를 옆으로 더듬어보니 세 개의 총알구멍이 있었다. 그 부상병은 벨트란의 눈을 올려다보았는데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벨트란은 그의 손에 장갑을 끼워주며 가능한 편하게 해주었다. 그는 죽어 가면서 “적들을 저지하라, 적들을 저지하라”고 소리쳤다.
이에 벨트란 상병은 탱크로 달려가 포탑에 올라가서 기관총을 작동했다. 당시 그는 50구경 기관총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가 총을 쏘기 시작해 그날 밤 온 밤을 새워 쏘아 댔다. 분명, 한 탱크병 이 살아 있어서 탄약 상자를 그에게 보급해 주었기에 그가 계속해서 사격을 했을 터인데 그는 누구 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계속 총을 쏘기만 했다.

기관총을 쏘면서 그가 기억할 수 있던 것은 조명탄 아래 끝도 없이 다가오는 중공군의 모습이었다. 때로는 그가 타고 있던 탱크 앞 30야드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중공군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하고 있었다. 박격포, 기관총, 소화기의 사격은 극심했다.

그가 나중에 기억한 것은 탱크에서 뛰어내려 선채로 현장을 살폈다는 것이었다. 해가 뜨고 중공군의 공격은 일단 끝났다. 전투는 온 밤과 12일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중공군의 시체들이었다. 나중 전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중공군의 시체가 그 탱크의 앞과 옆쪽에 있었는데 대충 500구였다는 것이다.

벨트란은 탱크에서 온밤을 새우며 사격을 끝내고나서 아침에 부상당한 그 탱크 지휘관에게로 달려갔다.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그 시신들 옆에 앉아서 벨트란은 “우리는 적을 물리쳤다!”고 울면서 보고했다. 죽은 군인이 들어 주기를 바라듯이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벨트란은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아군과 중공군 사상자들을 보면서 ‘이 같은 아군 적군 간에 대량 살상이 과연 무엇 때문에 일어나야 하는가’에 심각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한 가운데 부대를 따라 천천히 후퇴길에 나섰다. 후퇴하면서도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천신만고 끝에 흥남 부두에 다다랐고 남쪽으로 향하는 선박에 올랐다. (이는 영화 ‘국제시장’에 묘사되어 있다.)

후퇴 중에 그가 받은 상처가 심화되어 동상까지 걸려, 일본 요코스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고 다시 하와이 해군병원으로 마지막으로 캘리포니아 발레호 해군병원에서 치료받다가 1952년에 의무 제대로 고향 샌타 바바라로 돌아왔다.

‘전쟁이 무엇인가?’

그는 장진호 전투에서의 혁혁한 공적으로 동성훈장, 상이기장, 선행기장 등을 수여 받았다. 그러나 현재 그의 전우들은 벨트란 상병이 장진호에서 중공군과 싸운 혈투는 미국 최고훈장 격이라며 미 국회에 재상신을 했다.
그는 제대 후 고향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면서 전쟁에서의 경험을 살려 한국전쟁과 다른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한 그림을 제작하여 왔다. 그는 특히 전쟁 중 포로가 된 사람들과 실종자들을 위한 작품에 주력해왔다.

지난 1990년 초 LA 남쪽 샌페드로 ‘우정의 종각’ 공원 부지에 계획된 미재향군인회와 한인사회 공동으로 600만 달러 ‘한국전 참전 기념비’ 모형의 12명 군인들의 모습을 직접 제작하였다. 이 12명 군인들의 모습은 그린 주인공이 벨트란 용사이다. 그러나 당시 이 참전비 계획은 워싱턴DC에 건립된 ‘한국전기념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등으로 지연되어 왔다.

최근 본보는 애리조나 주 프레스코트에서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바로 인디언 출신 미 해병 여전사 바바라 벨트란스틸 여사가 보내왔다. “매년 6월이면 더 한국전쟁이 생각난다”면서 “한국이 경제대국이 되었고,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되었다는 뉴스를 접할 때 마다 흐뭇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10년 산타 바바라에서 행한 ‘한국전참전용사 사은회’에 참석한 자신의 큰 오빠의 전공 기사를 보도한 선데이저널에 감사를 표하면서 “나는 언제나 한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한국전쟁을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기회만 허락되면 한국전쟁을 후세들과 주위에 전하고 있다”며, “한국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전쟁 관련 자료들을 보내 달라”고 바랬다.

이국 땅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 젊음과 청춘을 바친 미국의 젊은이들이 60년을 지나면서도 잊지 않고 평화와 번영을 바라고 있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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