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용 大기자의 발굴특종] 백건우-윤정희 북한납치미수40년, 외교문서 단독공개

■ 1977년 7월, 이응노 화백부인 박인경 꾐에 빠져 납북될 뻔

■ ‘박인경 유인으로 유고行’생환직후 대사관출두 자술서 작성

■ 1976년 윤정희에게 스위스부호가족공연비조로 4백만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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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40년이 지나도 아직 풀리지 않는…

친북재불화가 이응노-박인경 부부의
‘백건우 -윤정희’ 납치미수사건 전모

▲ 생전의 이응노 화백과 부인 박인경.

▲ 생전의 이응노 화백과 부인 박인경.

지난 29일은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와 영화배우 윤정희씨 부부 납치사건이 발생한지 40년이 된 날이다. 1977년 7월 29일 북한은 친북인사인 이응노화백의 부인 박인경씨를 통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유고슬로비아로 유인, 납북하려 했고 백씨부부는 미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온 것이다. 본보는 백건우-윤정희 납치사건 40년을 맞아 외교사료관을 통해 외교 사료를 검색한 결과 백씨부부가 프랑스 파리로 탈출한 뒤 주불한국대사관에서 사건경위를 진술한 자술서를 확보, 이를 전격적으로 공개한다. 특히 납치사건 발생 전 해인 1976년 박인경이 윤정희를 포섭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거금인 4백만원을 제공했다고 명시한 서울지검 공문서도 발견됐으며 이런 내용은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또 외교사료 검토결과, 북한과 이 사건을 공모한 박인경씨는 사건직후 남편 이응노씨와 함께 잠적했다 프랑스정부에 정치적 망명을 했으며, 이씨는 한국 외환은행에 예치한 친북미술작품 전시회 수익금을 돌려달라고 한국정부를 집요하게 졸랐던 사실도 드러났다. 반면 한국정부는 이씨가 반공법을 위반함에 따라 적법하게 압수돼 국고에 귀속된 돈이므로 이를 돌려줄 수 없으며, 단 개전의 정이 보일 경우 정책적 차원의 지원여부는 별도로 검토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가 동백림사건 외에 반공법으로 위반된 기소중지된 사실도 이번에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40년 전 발생한 백건우-윤정희의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은 납치사건의 전모를 외교문서를 통해 되돌아본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40년 전인 지난 1977년 9월 21일 주불한국대사관은 ‘백건우-윤정희 부부 유괴미수사건에 따른 대책’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 9월 26일자로 외무부장관에게 발송했으며, 3급 비밀로 분류된 이 문서에는 백건우-윤정희씨의 서명이 담긴 자필진술서가 첨부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 1977년 7월 29일 북한은 친북인사인 이응노화백의 부인 박인경씨를 통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유고슬로비아로 유인, 납북하려 했고 백씨부부는 미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 1977년 7월 29일 북한은 친북인사인 이응노화백의 부인 박인경씨를 통해 백건우-윤정희 부부를 유고슬로비아로 유인, 납북하려 했고 백씨부부는 미국 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이 문서는 본보가 외교부 외교사료관의 마이크로필름을 검색, 확보한 것으로, 북한의 백건우-윤정희 납치사건을 전후해 1977년부터 1984년까지 외교부가 주고받은 문서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1967년 이후 대한민국 영화계를 사로잡으며 최고의 여배우로 꼽혔던 윤정희씨, 그리고 두 살 연하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1974년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으로 유학을 간 윤정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1976년 이응노화백의 주례로 결혼을 올렸다. 바로 이 이응노화백의 주례는 백건우-윤정희부부를 죽음보다 더한 지옥으로 몰아넣을 뻔했던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들 부부는 결혼식 주례를 계기로 이응노 화백의 두 번째 부인인 박인경과 가까운 사이가 됐고, 박인경의 꼬임에 따라 결혼식 다음해인 1977년 7월 29일 북한에 납치될 뻔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백건우 자필진술서에 기술된 사건경위

백건우-윤정희부부가 구사일생으로 북한의 납치를 모면하고 프랑스로 돌아온 뒤 1977년 8월 9일 직접 주불한국 대사관에 찾아가 자필진술서를 작성, 사건 경위를 설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본명인 손미자라는 한글서명과 한자서명이 담긴 4페이지짜리 이 진술서는 백씨가 사건직후 우리정부 측에 제출한 최초의 자필진술서로 추정된다.

백씨는 1977년 8월 31일 한국에 입국, 중앙정보부등에 다시 사건경위를 설명하고 진술서를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8월 9일 주불한국대사관에서 작성한 이 진술서가 최초의 진술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백씨부부는 이 진술서에서 ‘박인경씨가 서서인[스위스인을 이르는 한자어]부호 가족의 요청에 의해 7월 29일부터 30일 이틀간 스위스에게 가족을 위한 연주회를 열어달라고 부탁, 이를 수락해 7월 29일 오후 박인경과 함께 파리를 출발, 쥬리히에 도착, 서서인부호의 비서라는 여자를 만났다’고 밝혔다. 이때 비서는 부호가족이 유고에 휴가 중이므로 유고에서 연주를 해주어야겠다고 일정을 변경했고, 자신들은 이러한 요청을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없이 얼떨결에 쥬리히공항에서 유고항공기를 타고 자그레브로 갔다는 것이다.

▲ 백건우-손미자부부 자필진술서

▲ 백건우-손미자부부 자필진술서

백씨는 유고 자그레브로 떠나기에 앞서 박인경으로부터 서서인부호의 비서가 전하는 편지라며 큰 봉투를 받았고, 그 안에 자그레브행 항공표와 자그레브 도착 뒤 연락처 지도, 돈 7백다나르가 들어있었다고 설명했다. 즉, 스위스 쥬리히에서 연주회를 열어달라던 서서인부호측이 사전에 백씨부부의 자그레브행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셈이다.

백씨는 ‘자그레브에 도착해 입국수속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초청자 측 안내가자 없어서 봉투에서 지정해준 주소로 택시를 타고 갔다’며 ‘주소지 건물은 일반 가정집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북한 공적원으로 추측되는 사람이 나타나 서투른 영어로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우리부부가 배후에 음모가 있는 것으로 판단, 이 주소로 타고 가서 대기시켜둔 택시로 되돌아가 자그레브 소재 미국영사관으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백씨가 만약 타고 왔던 택시를 돌려보냈다면, 북한의 납치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됐더라도 탈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택시를 대기시켜 둔 재치 있는 판단이 결국 이들 부부를 살린 셈이다.

연주회 미끼로 유고슬라비아로 유인

백씨부부는 ‘미국영사관에 도착한 뒤 보호를 요청, 미국영사의 도움으로 영사관인근호텔에서 1박했으나 다음날인 7월 30일 아침 6시 반쯤 북괴공작원 3명이 자신들이 투숙한 방에 찾아와 방문을 열라고 했으나 열어주지 않고 미국영사에게 연락했더니 북괴공작원들이 사라졌다’고 밝혔다.

북한은 백씨부부가 당초 납치하려던 장소에서 탈출한 뒤에도 납치기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영사관에서 마련해준 숙박시설까지 찾아오는 집요함과 대담성을 보인 것이다. 이는 바로 이 지역이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라는 점이 북한을 더욱 과감하게 만들었고 ‘제 아무리 미국이라도 공산국가에서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판단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씨부부는 미국영사의 차로 자그레브공항으로 가서 8시50분발 JU242편으로 파리로 돌아왔으며, 박인경에게 북괴의 납치기도로 보인다며 박인경이 사전에 이를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고 적고 있다.

또 백씨부부는 박인경에게 한국대사관에 자진신고하자고 제의했고 박씨는 이틀 뒤인 8월 1일 신고하는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고하기로 한 8월 1일을 하루 넘긴 2일, 박인경은 백씨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가족끼리의 사건이니 조용히 해결하자며 대사관 출두를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 백건우-손미자부부, 자필진술서 서명부분

▲ 백건우-손미자부부, 자필진술서 서명부분

납치 미수되자 되레 납치범으로 몰아

박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씨부부는 공관신고를 고집하자 이번에는 박인경의 남편 이응노가 나섰다. 이응노는 ‘백씨부부가 미국 및 한국 CIA의 앞잡이로 자신의 부인, 즉 박인경씨를 납치했다고 역설적 주장을 했다’고 백씨부부는 적고 있다. 백건우-윤정희가 박인경의 꼬임에 빠져 북한에 납치될 뻔했지만, 이응노는 적반하장으로 한국과 미국이 공모해 백건우 부부를 시켜 박인경의 납치했다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여기까지가 백씨부부가 직접 설명한 7월 29일 북한의 납치미수사건부터 8월 9일까지의 제반 상황이다.

백씨부부는 이같이 납치될 뻔한 경위를 밝힌 뒤 ‘우리 부부가 우리 공관의 허가 없이 공산국가인 유고에 입국하게 된 점은 연주목적이외에 하등의 다른 저의가 없으며,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킨데 대해 우리정부의 너그러운 선처를 바라며 추후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 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건우-손미자(윤정희)가 각각 한글과 한자로 서명을 한 것이다.

외교 사료에 따르면 백씨부부를 되레 납치범으로 몰려했던 이응노-박인경부부는 공관신고제의를 거부한 뒤 그 이듬해 1월 12일까지 거처를 떠나 잠적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주불한국대사관이 1978년 1월 12일 이씨부부의 귀가소식을 듣고 재소환을 시도했으나 망명여권을 소지했다며 출두를 거부했다는 것이 같은 해 2월 6일자 주불대사관 보고내용이다. 특히 주불한국대사관은 같은 날 외무부 본부에 ‘반국가행위자 발생보고’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반국가행위자 발생보고서에 따르면 반국가행위자는 이응노의 부인 박인경으로, 1926년 8월 17일생이며, 본적은 서울 종로구 관훈동 77번지, 그리고 프랑스 체류기간은 1968년 11월 26일부터, 보고서작성시기까지 9년2개월이라고 기록돼 있다. 박씨의 프랑스 체류자격은 이응노의 妻[처]자격, 여권번호는 181861이며 동반가족은 당시 74세인 이응노와 22세 아들 이융세라고 밝혔다. 또 박씨가1977년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프랑스와 스위스-유고슬라비아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부부를 납치하려한 행동이 반국가행위라며, 백건우는 미국대사관에 미국영주권자임을 밝히고 보호요청을 함으로써 납치를 모면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납치 미수 불발되자
‘우리를 납치하려했다’ 더티플레이

주불한국대사관으로부터 반국가행위자 발생보고를 받은 외무부는 1978년 2월 22일 법무부에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시행에 따른 의견문의’라는 공문을 보냈다. 외무부는 ‘박인경의 행위는 1977년 12월 31일 공포 시행된 반국가행위자 관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그러나 1978년 1월 24일 이응노가 대사관 재 출두 요구에 대해 폭언을 하며 소환에 불응하다가 1월 말경 프랑스정부에 정치망명신청서를 제출했다며 이는 반국가행위자에 해당되지 않느냐’고 문의했다. 외무부는 이응노 부부가 1978년 1월 말경 프랑스의 피난민 및 무국적자 보호위원회에 정치망명신청서를 제출했으며, 이 위원회는 2월 9일 정치망명허가를 프랑스정부에 건의했다고 밝혔다.

반국가행위자 관련법 소급적용 받지 않아

이응노가 주불한국대사관에 망명여권소지 운운했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즉 이들 부부는 사건발생 직후 8월부터 잠적, 정치망명신청준비를 마친 뒤 1월 중순 다시 집으로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법무부는 1978년 2월 27일 외무부에 보낸 회시를 통해 ‘동법시행이전의 것이므로 동법적용대상이 아니라고 사료됨’이라며 반국가행위자로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박인경의 행위시점이 1977년 7월 29일과 30일로, 반국가행위자 관련법이 제정된 1977년 12월 31일 이전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 주불한국대사관의 반국가행위자발생보고서

▲ 주불한국대사관의 반국가행위자발생보고서

그러나 한국정부, 특히 검찰은 이미 지난 1977년 12월 29일 이응노부부에 대해 형사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외무부는 검찰의 이 같은 조치를 전혀 몰랐고 1978년 11월 9일에야 법무부가 서울지방검찰청의 조치내용을 통보했던 것이다.

‘재불화가 이응노의 압수금품처리 결과보고’라는 이 공문에 따르면 ‘재불화가 이응노는 처 박인경과 공모해 1975년 10월부터 1977년 7월까지 수차에 걸쳐 재불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손미자(윤정희)부부에게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하고, 공작자금 염출명복으로 1975년 5월부터 1977년 3월까지 국내에서 3회에 걸쳐 북괴를 찬양하는 내용의 추상화 등 작품 170점을 전시, 판매한 뒤 그 대금을 외환은행 등에 예치했다가 1976년 11월 그중 4백만원을 손미자에게 제공해 포섭을 기도한 혐의이며, 백건우부부를 유고슬라비아까지 유인한 박인경과 함께 반공법위반죄로 입건 뒤 1977년 12월 29일 기소중지 시켰다는 것이다.

손미자는 바로 윤정희를 말하는 것으로 윤정희가 1976년 11월 박인경으로부터 당시로서는 거금인 4백만원을 받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내용이다. 백건우 –윤정희부부가 이응노화백의 주례로 결혼한 것이 1976년 3월 14일임을 감안하면 그로부터 약 8개월 뒤 박인경씨가 거금을 준 셈이다.

서울지검은 이응노가 작품판매대금중 1541만원은 외환은행에 예금했고 1167만원은 이화화방주인인 이응노의 처남댁 김현숙에게 보관시켰으나, 이 돈이 반공법위반범죄의 공작자금임을 인식한 외환은행 영업부장 신동호와 김현숙이 1977년 11월1일 중앙정보부에 임의 제시해 압수했다고 밝혔다. 서울지검은 국가보안법 제12조2항, 범인에 대해 소추를 하지 아니한 때에도 검사는 압수한 서류 또는 물품의 국고귀속을 명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서익원검사가 1977년 12월 29일 기소중지처분과 동시에 압수금품의 국고귀속결정을 내려, 1978년 1월 6일자로 국고에 귀속됐다고 설명했다. 즉 이응노의 돈 2700만원상당이 반공법위반으로 국고에 귀속된 것이다.

▲ 박인경은 납치사건발생 17년만인 1994년 1월,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화백 5주기 전시회 때 한국을 방문한 후 그 뒤부터는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다.

▲ 박인경은 납치사건발생 17년만인 1994년 1월,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화백 5주기 전시회 때 한국을 방문한 후 그 뒤부터는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응노 작품전시회 판매대금 반환 요청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응노는 1981년 5월 19일 주불한국대사관에 자필편지를 보내, 외환은행예금을 찾을 수 없다며, 그 이유를 알려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밝혀졌다. 1977년 주불한국대사관에 폭언을 불사하던 이응노는 이 편지에서 한껏 예를 갖추고 있다.

역시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음을 다시 한번 입증된다. ‘일전에 전화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서울에 있는 외환은행에 1975년 후반 예금을 했고 1977년 6월 이후 이 돈을 찾을 수 없다’며 ‘외환은행에 여러 차례 문의를 해도 이렇다 할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외환은행 파리지점에서 주불대사관에 물어보라고 해서 이글을 드리오니 알아보시고 서면으로 답을 주시기 바라옵니다’ 라는 간절한 편지였다.

이 편지를 받은 주불대사관은 그 다음날 본부에 전문을 보내 ‘본부에서 국고환수를 알려왔으나 그동안 조회중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지연시켜 왔다’며 ‘무국적자이므로 무국적자의 민원서류는 접수할 수 없다고 회신하면 어떨까요’ 물어보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1982년 3월 16일에는 외무부장관이 안기부장과 법무장관, 서울지검장에게 공문을 보내 ‘모국방문보장공약에 따른 입국규제해제대상자이며, 과거죄과를 시인, 개전의 정을 보이면 압수처분 취소가 가능합니까’라고 물었다.
이미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정당한 처분을 했는데, 그것을 취소한다면 국가도 아니다. 법무장관은 1982년 3월 27일 회신을 통해 ‘적법조치에 따른 조치이므로 취소등의 대상이 없으며, 사후환불에 대한 법령상 근거가 없으므로 환불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또 안기부도 4월 7일 외무부에 공문을 보내 ‘국내재산 국고환수조치사실을 통보하는 것은 가능하나 몰수조치에 대한 취소는 현행법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안기부는 ‘죄과를 뉘우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할 경우 정책적 차원의 지원문제는 차후에 재검토돼야 한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법에 위한 조치는 취소할 수 없고 정 뉘우치고 반성한다면 다른 차원에서의 지원을 가능한지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외무부는 이응노 예금 국고귀속조치와 관련한 보고서에서 박인경이 예치금중 4백만원을 손미자에게 제공했다고 밝혔다.

▲ 외무부는 이응노 예금 국고귀속조치와 관련한 보고서에서 박인경이 예치금중 4백만원을 손미자에게 제공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주불한국대사는 1982년 4월 29일 마침내 이응노에게 반공법위반혐의로 예금이 압수됐다고 구두로 통보했고 이응노는 끈질기게 서면답변을 요구했다. 이 문제는 해를 넘겨 1984년까지 계속됐다. 법무부는 1983년 12월 28일 이응노의 서면통보요청에 대해 서면통보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밝혔고, 안기부도 1984년 1월 21일 서면통보는 부적절하며 구두로 재 통보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공문을 외무부에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전시회 수익금 다른 차원에서 보상 된 듯

그 뒤 이응노는 어떻게 됐을까? 국고로 환수된 이응노의 친북작품 전시회 수익금이 이응노에게 다른 차원의 보상형태로 지급됐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응노의 사망 전 행적을 보면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는 대신 북한쪽으로 더 기울었다는 정황이 포착됐다.

이응노는 1987년 북한 초청을 받아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것이 언론의 보도이며, 1989년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박인경은 납치사건발생 17년만인 1994년 1월, 서울에서 열린 이응노화백 5주기 전시회 때 한국을 방문한 후 그 뒤부터는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이라면 김영삼정부 2년차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박인경에게 국내입국을 허용해 준 것으로 보이지만, 박인경이 전향서를 쓰는 등 개전의 정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납치미수사건전모를 설명한 백건우-윤정희의 자술서, 외환은행예금을 돌려달라는 이응노의 자필편지등은 처음 공개되는 것이며, 특히 윤정희가 백건우와 결혼한 해인 1976년 11월에 박인경으로부터 4백만원을 제공받았다는 사실 또한 처음 밝혀진 것이다. 서울지검이 윤정희가 박인경에게 4백만원을 받았다고 공문서에서 밝힌 것을 감안하면 윤정희는 친북인사로 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있다면 이에 대한 진상을 윤정희씨는 국민들에게 밝혀야할 중차대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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