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는 공산주의자’ 투서사건 장태한 교수는 왜 뒤늦게 뒷북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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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5년전에 보도된 내용을‘최초발견특종이라니…’

연합뉴스 ‘최초 발견’ 제목달고 오보

한국언론들 일제히 받아쓰다 망신살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역사를 바라볼 때 어떠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까에 대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최근 미주와 국내 언론에서‘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투서 사건으로 추방된 적이 있다’라는 LA발 연합뉴스가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이 ‘안창호 투서사건’뉴스를 두고 도산의 유가족의 한 사람과 도산을 연구하는 한인학자 간에 크게 논쟁이 붙어 커뮤니티에 놀라움을 주고 있다. 지난 9일자 연합뉴스 <도산 안창호는 공산주의자, 미이민국에 모함 투서 최초 발견>이란 제목의 기사에서‘도산 안창호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투서가 미국 이민국에 접수된 사실이 최초로 확인됐다. 이같은 투서를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가 처음 발견했다’고 보도하면서‘이는 재미 한인 독립운동사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평가도 나온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연합뉴스의“장태한 교수가 최초 투서 발견”이란 보도는 오보였다. <투서>내용 자체는 맞지만 장 교수가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은 오보였다. 이처럼 연합이 오보를 하는 바람에 이곳의 미주 한국일보와 미주 중앙일보, 라디오코리아를 포함 대부분 한인 언론이 확인도 않고 그대로 보도해 오보를 터뜨린 셈이다. 국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대부분의 신문 TV 방송이 이같은 오보를 그대로 보도했다. 본보는‘안창호 투서사건’이 이미 15년전에 발견됐음을 지난 2002년 부터 인지 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국내의‘주간조선’<77년만에 밝혀진 FBI 의 안창호 수사> 라는 제목의‘발굴 특종’으로 밝혔기 때문이다. 당시 보도기자는 LA 자유기고가 김지현씨였다. 15년전에 이미 밝혀진‘안창호 투서 사건’보도가 어떻게 해서 최근에 다시‘이번이 최초 발견’이라고 둔갑 했는지 선데이저널이 추적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이번 보도에서 투서의 주인공이 온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는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민족의 지도자인 그가 투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오보사건 문제는 <안창호 투서사건>이 이번 연합뉴스의 최초 보도가 아니고, 또한 장태한 교수가 최초로 발견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별첨에 소개된 주간조선 2002년 보도내용과 지난9일에 보도된 연합뉴스 보도내용을 비교 하면 명백해진다. 두 기사 모두 미국국립기록보관소에 있는 똑같은 사료를 토대로 기사를 작성한 것 임을 알아볼 수 있다.

이 두 기사는 15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내용은 같은 것이다.
주간조선 1719호(2002년 9월 5일)에 실린「[발굴 특종] 77년 만에 밝혀지는 ‘모함 투서’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마지막 독립운동을 하던 1925년 당시 소련 공산당과 연계가 있다고 모함한 한 투서로, 미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 속에서 심문과 가택 수색까지 당한 사실이 77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는 것이다. 안창호가 ‘공산주의’ 관련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90년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사실이 처음으로 등장한 자료는 신한민보 1925년 6월 25일자의「안창호씨도 쏘비에트 주의자라고…」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볼셰비키주의를 선전하므로 미국 법률 에 범하였다는 이유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었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을 '볼셰비스트'로 모함하는 내용으로 작성된 영문 투서. 서한의 말미에 '콩 왕'과 '찰스 홍 이'라는 연명 서명이 붙어있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을 ‘볼셰비스트’로 모함하는 내용으로 작성된 영문 투서. 서한의 말미에 ‘콩 왕’과 ‘찰스 홍 이’라는 연명 서명이 붙어있다.

미이민국 조사 내용은 공공연한 비밀

그러나 이 신한민보 기사는 확증이나 증거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1926년대) 동포사회에 나도는 소문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번의 연합뉴스가 9일자에서 <안창호 투서사건> 보도가 나오면서 이 기사에서의 ‘최초 발견’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서울에서 이 기사를 본 도산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고 안수산 여사 아들) 씨의 지인이 이를 커디씨에게 알려주었다.
이를 살펴본 필립 커디씨는 즉각 연합뉴스 LA특파원에게 ‘그 기사는 잘못된 것’이라며 ‘연합 뉴스에게 장태한 교수가 거짓 정보를 준 것이다’라며 정정을 요구했다. 그리고 필립 커디씨는 “장태한 교수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비난했다. 또한 커디씨는 이같은 사실을 일부 국내외 언론사에 주간조선 기사 사본을 보내면서 <연합뉴스 기사의 장태한 교수의 최초 발견이란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알렸다.

그는 “주간조선 기사가 최초 발견 기사를 게재했다”면서 “당시 중국계 작가인 엘레인 메 우(Elaine Mae Woo)가 미기록보관소에서 자료를 입수한 것”이라고 밝혔다. 엘레인 메 우는 헐리웃 영화계에 최초로 진출한 중국계 여우 애나 메이 웡( Anna May Wong)의 전기 작가로도 유명한데, 다큐멘타리 자업을 위해 사료 연구를 하던 중 우연히 안창호 관련 자료도 입수했다.

주간조선에서 이 기사를 보도한 LA의 김진현 자유기고가는 2000년 당시부터 안수산 여사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안수산 여사가 엘레인 매 우로부터 입수한 ‘안창호 자료’를 인계받아 기사를 작성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오보의 발생은 언론들이 기본적인 사항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기사를 보도하기 전에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확인’ 사항은 언론의 기본이다.

15년전에 보도된 내용을 최초라고 하는 까닭

▲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

만약 연합뉴스나 이를 그대로 보도한 여타 언론들이 한번쯤 ‘확인’작업을 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구글(Google)이나 네이버(Naver)에 들어가 서치 작업을 했다면 주간조선에서 2002년에 보도한 문제의 ‘안창호 투서사건’을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연합뉴스는 장태한 교수가 이민역사 전문 교수라고 생각해 그의 말을 100% 신뢰하였기 때문으로 그대로 보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다른 국내외 언론들은 연합뉴스가 보도했기에 그대로 따라 했을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요즈음의 기자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지난 16일 라디오코리아의 토크쇼 프로그램인 ‘시사 포커스’(진행 최영호)에 다음과 같은 소개 문이 보도됐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을 볼셰비스트, 즉 공산주의자로 모함해 미국에서 추방시키려고 한 투서가 미국 이민국에 접수된 사실이 80년만에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UC리버사이드 인종학과 교수이자,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인 장태한 교수가 최초로 공개한 캘리포니아 샌브루노 정보기록 보존소의 ‘안창호 파일’에는 도산 선생이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적대세력의 모함과 미 이민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재미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조직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흔적이 깃들어 있습니다.>>

라디오코리아 ‘시사 포커스’의 최영호 진행자는 지난 16일 장태한 교수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던 중 “이번 장 교수의 안창호 투서사건에 대하여 도산의 외손자 필립 커디씨가 언론사에 보낸 글에서 ‘장 교수가 최초 발견자가 아니다’라고 송곳 질문을 하자 장 교수는 “맞습니다. 최초가 아닙니다”라고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이어 ‘내가 최초 발견자는 아니지만, 투서사항에 대하여 구체적 정황이나 다음 단계에 대한 연구는 처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황당한 주장을 펼쳤다. 이같은 사항을 들은 일부 청취자들은 “장 교수는 이 사항에서 적어도 교수로서 학자로서 겸손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한가지 사건이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역사를 어떻게 기록하느냐에 따라 평가도 달라질 수가 있다. 역사는 양심과 진실에 따라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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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2002년 9월 5일자 보도 요약]

발굴 특종] 77년 만에 밝혀지는 ‘모함 투서’의 진상

안창호 선생, 미국서 ‘공산주의자’ 의심 받아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마지막 독립운동을 하던 1925년 당시 소련 공산당과 연계가 있다고 모함한 한 투서로 미 정부 당국의 감시 대상 속에서 심문과 가택 수색까지 당한 사실이 77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이번에 발견된 미 정부 이민국 문서는 1925년 당시 이상촌 건설을 위한 기금 모금과 흥사단의 조직 강화 그리고 가족 방문을 위해 미국 내를 여행하는 안창호를 수배해 심문조사를 벌인 각 지역 이민 국간의 교류 서류와 도산에 대한 미 정부 자료 문서들이다. 지금까지 도산에 관한 많은 서적과 문헌 등에서는 ‘도산이 한때 투서 때문에 미국에서 친 공산 주의자로 오해를 받았다’, ‘안창호는 미국 내에서 법을 어겨 추방당했다’ 등으로 기록됐으나 진상은 어디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에 입수된 미 정부 문서 사본들은 미 서부지역을 총괄하는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을 포함해 로스앤젤레스 이민국과 시카고 이민국이 작성한 안창호 관련 서류이며, 또한 안창호의 중국 여권과 상하이 미 총영사관이 발급한 안창호의 비자서류 등이다. 이들 서류에 의하면 안창호는 하와이를 거쳐 1924년 12월 16일에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바로 전날인 12월 15일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시에서 발송된 익명의 투서가 샌프란시스코 소재 미 서부지역 이민국 본부에 접수됐다. 이같은 사실로 볼 때 투서자는 안창호의 미국 여행 일정 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투서는 ‘공 왕(Kong Wong)’ 또는 ‘찰스 홍 리(Charles Hong Lee)’라는 한인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고, 샌타바버라 시내 알링턴호텔에서 발신한 투서 내용은 ‘안창호가 소련 공산당과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은 안창호의 미국 내 연고지인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에 안창호의 동향을 수사하라는 지시를 12월 24일자로 명령했다. 또한 투서자에 대한 내사도 아울러 지시했다. 샌타바버라 이민수사관이 1925년 3월 28일자로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에 보고한 문서에는 투서자로 알려진 ‘공 왕’이나 ‘찰스 홍 리’라는 이름이 알링턴호텔 투숙객으로 있었는지에 대해 1924년 11월부터 1월까지 조사했으나 아무런 근거도 발견치 못했으며, 호텔 직원들을 조사 했으나 동일한 이름은 발견치 못했다며 문제의 호텔에는 아시아계 직원이 없다는 점도 설명했다.

시카고 이민국은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으로부터 통보를 받고 즉각 안창호 동향 수배에 나섰으나 이미 시카고를 거쳐 타 지방으로 여행 중임을 인지했다. 이후 안창호가 동부 여행을 마치고 다시 시카고로 왔을 때 시카고 이민국은 드디어 안창호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1925년 6월 6일자 시카고 이민국은 안창호 조사서를 작성해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에 송부했다.

1925년 6월 3일 안창호는 시카고 이민국 청사에서 J B 블랙 이민수사관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이날 블랙 수사관이 질문한 26개 항목의 대부분은 주로 도산의 미국 내 활동사항에 관한 것 이었으며, 정작 투서에 관계된 질문은 단 2개뿐이었다. 그 질문은 “귀하는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권에 관심이 있습니까?”였다. 이에 안창호는 “저는 직접적 으로나 간접적으로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또 하나는 “귀하의 연설 내용 중 미국 정부 내의 급진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안창호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날 인터뷰의 중요 부분을 발췌해본다. (생략)

이민국은 안창호에 대한 동향수사에서 극히 보안을 중요시했다. 투서자 조사활동에서 한인사회가 인지하지 못하도록 보안에 철저한 지시를 내렸다. 로스앤젤레스 이민국은 미국 내 도산의 가족에 대해서는 내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1925년 5월 11일자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본부에 보낸 공문에서 밝혀 수사 확대를 피하고 있었다. 이 공문은 “현재 시점에서 귀 본부측의 별도 지시가 없는 한 안창호 가족, 특히 부인에 대한 인터뷰는 적절치 않다고 사료되는 바입니다”라고 밝혔다. 시카고 이민국에서 안창호에 대한 인터뷰를 계기로 1924년 12월 24일부터 이듬해 6월까지 계속된 이민국의 ‘요시찰’행위는 일단락됐다. 이민수사관의 인터뷰 내용을 분석하면 이미 미 정부 당국은 도산이 미주 한인사회와 중국 내 동포사회에서의 위상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24년 11월 13일자로 안창호가 소지한 중국 여권에 비자를 발급한 상하이 주재 미 총영사관 서류에는 에드윈 커닝햄 총영사가 직권으로 8개월 미국 체류비자를 승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안창호 관련 문서는 동양현대사를 연구하는 한 연구관에 의해 2개월 전 캘리포니아 주 라구나 니엘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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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7년 8월 9일자 보도 요약]

도산 안창호 미국서 추방되기까지…모함한 투서자의 실체는 미 정부기록보존소서 ‘안창호 파일’ 찾아내…엔젤섬 이민국 서류도 다수

▲ 미국 시카고 이민국의 1925년 6월 9일 자 안창호 선생 심문기록. 안창호 선생의 자필 서명이 남아있다.

▲ 미국 시카고 이민국의 1925년 6월 9일 자 안창호 선생 심문기록. 안창호 선생의 자필 서명이 남아있다.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을 볼셰비스트(공산주의자)로 모함해 미국에서 추방시키려고 한 투서가 미국 이민국에 접수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도산 선생의 세 번째 방미 행적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9일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학교(US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소장 겸임)가 최초로 공개한 미 캘리포니아 샌브루노 정보기록보존소의 ‘안창호 파일’에는 도산 선생이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적대세력의 모함과 미 이민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재미 한인사회의 독립 운동을 성공적으로 조직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한 흔적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도산 선생은 192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해 1926년 2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S.S.소노마호를 타고 출발한 것으로 돼 있다. 안창호 선생이 도착하기 하루 전인 1924년 12월 15일 ‘콩 왕’과 ‘찰스 홍 이’라는 이름으로 미 이민국에 투서가 접수됐다. ‘안창호는 볼셰비스트이니 미국 입국을 불허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민국 담당자에게 투서가 전달되기 이전에 입국한 안창호 선생은 이듬해인 1925년 6월 3일 시카고 이민국에서 미국 입국 경위에 대해 직접 심문을 받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안창호 파일이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장 교수는 “이 투서는 총 4장의 장문인데 영어 문법이 정확하지 않아 뜻을 번역하기가 약간 힘들었다”고 말했다. 투서에는 “안창호가 상하이를 출발해 하와이를 거쳐 곧 미국에 도착할 예정인데 그는 볼셰비스트, 즉 사회주의자이니 그를 유심히 잘 지켜봐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장 교수는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소재 알링턴호텔 전용편지지의 맨 뒷장에 나오는 연명 서명 ‘콩 왕(Kong Wong)’과 ‘찰스 홍 이(Charles Hong Lee)’에 관한 자료를 수 개월 동안 추적했다고 한다.
장 교수는 “대한인국민회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대한인동지회, 즉 이승만 추종세력이 투서를 보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 1924년 서재필 선생이 “워싱턴에 있는 한인 지도자가 도산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했다”고 증언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안창호 추방’의 단초가 되는 미 이민국 투서 내용은 당시 대한인국민회, 흥사단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세력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 발견자인 장 교수의 해석이다.
안창호 파일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1925년 6월 3일 J.B 브래키 이민국 검사관이 시카고 이민국에서 안창호 선생을 상대로 벌인 직접 심문이다.(심문 내용 생략)

장 교수는 도산 선생이 원래 8개월 체류 비자로 입국했다가 6개월 연장 신청을 했으며 1926년 2월까지 체류 연장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이민국은 “안창호는 미국 전역을 여행했는데 콩 왕과 찰스 홍 이가 제출한 투서(1925년 12월 15일 접수) 내용을 부인했다. 현재로서는 그 투서 내용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다”고 적시했다.
안창호 선생은 6개월 더 체류할 수 있었지만 투서로 사회주의자인지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고는 추방 대상자로 분류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3월 초의 강제 출국은 그 연장선이다.

이민국은 1926년 2월 6일 문서에서 “안창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는 배에 타는 것을 확인하라”고 적었다. 이어 1926년 2월 23일 문서에는 “안창호가 S.S. 소노마를 타고 떠난 것을 확인했는데 사진과 대조해서 확인했다”고 적혀있다. 도산 선생은 그러나 배가 고장나서 돌아왔다가 그해 3월 2일 다시 소노마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항에서 출항했다. 당시 기록에는 안창호 선생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하와이에 6시간만 머무르고 바로 호주로 추방된 것으로 돼 있다.
관련 자료에는 안창호 선생이 호주로 갈 의사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안창호 선생의 호주 추방은 그 전해 이민국 검사관의 조사, 그리고 세 번째 미국 방문 첫 해 이민국에 접수된 투서가 그간의 행적을 입증할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 선생은 이후 1925년 3월 25일 호주에 도착했고 5월 20일에는 상하이로 향했다. 이후 안창호 선생은 1932년 가족이 있는 미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그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거사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한국으로 송환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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