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99주년 특집 사애리시 선교사와 유관순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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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있었기에
3·1운동의 딸 유관순이 있었다’

우리민족의 독립운동 횃불-3․1운동-에서 유관순은 독립운동의 대명사이다. 3․1운동 99주년을 맞아 유관순을 독립운동의 횃불로 길러낸 미국인 선교사의 유해를 한국으로의 이장을 추진하는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130년 전에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디며 뿌린 선교사들의 주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어 이제 한국은 전세계 171개국에 2만 7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견한 선교대국이 되었다. 조선 땅에 생명의 피를 바치기까지 주님의 사랑을 전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업적을 기리고 복음 전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던 선교유적들을 온전하게 보전하여 선교정신과 함께 우리의 젊은이들과 후대에 전하는 일에 매진하는 한국선교유적연구회가 있다. 이 연구회의 서만철(전국립공주 대학교 총장)회장은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한가지 소망이 있다. 유관순을 길러낸 미국인 선교사 엘리스 샤프(Alice H. Sharp, 한국 이름 사애리시)의 유해를 유관순이 자란 공주 땅으로 모셔 가는 일이다.<성진 취재부 기자>

3․1운동의 대명사 유관순과 미국 선교사와의 인연에 대해서 알고 있는 한국인들은 드물다. 본보 기자도 최근에서야 유관순이 어떻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신교육을 받고, 3.1독립운동에 뛰어 들게 된 역사를 알게됐다.
지난해 8월 LA를 방문한 한국선교유적연구회의 서만철 회장은 당시 본보 기자와 만난자리에서 “LA에 있는 사애리시 선교사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가는 일에 LA동포들의 성원을 바란다”고 말했다. 서만철 회장은 유관순이 사애리시 선교사를 만남으로서 신학문을 배우고 이화학당에 입학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독립운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유관순
본보 기자도 미국 감리교의 조선선교 역사를 취재하면서 유관순과 선교사들의 인연을 알게 됐다.
한국의 충청도 공주는 백제의 유산이 깃든 고장이기도 하지만 현대 한국사의 복음의 땅이기도 하다. 그 공주의 영명동산에는 110여 년 전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30대에 순교한 로버트 아더 샤프(Robert Arthur Sharp, 1872-1906) 선교사(사애리시 선교사의 남편)를 비롯 하여, 4명의 다른 선교사들의 자녀가 묻힌 아담한 선교사 묘지가 있다.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교역자로 일하다가 1903년 31살의 나이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언더우드, 헐버트, 에비슨, 게일 등과 함께 초대 이사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하던 샤프목사는 1904년에 공주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고 이듬해에 아내 사애리시(Alice H. Sharp)선교사와 함께 공주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 양옥집을 짓고 이주 하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공주에 선교부 본부를 두고 인근지역까지 농촌 선교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순회 선교를 하던 중에 불행하게도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 5일 3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 하였다. 샤프 선교사로서는 한국에 온지 3년, 공주에 정착한지는 채 1년이 안된 시기이었다.
남편과 함께 선교를 하며 영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선학당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신혼의 사애리시 부인에게는 청천벽력이었고 모든 소망이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다. 사애리시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영명 100년사”에서 전하는 사애리시 부인의 이별장면이다.

<사애리시 부인이 명선학당의 운영을 스웨어러(Swearer) 여사에게 맡기고 공주를 떠나던 날 교회와 학당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별의 슬픔 위에 남편을 잃고 자신의 소망을 버리고 떠나는 사애리시 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 보내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뭉클하는 심정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미국에 와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기도 끝에 마침내 사애리시는 1908년 8월에 충청도 공주 땅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 남편 곁으로 갔다. 그녀는 1909년에 강경 만동여학교와 논산에 영화 여학교를 세웠다. 그녀는 특히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 각곳을 순행 하면서 각 교회에서 똑똑한 여학생이 있으면 주목하여 관찰했다.

다시 남편 곁으로…

사애리시 선교사는 지령리 교회의 유관순과 유예도에게 주목했으며, 일찍이 혼자된 그녀는 가정이 어려운 유관순을 친딸처럼 생각했다. 그녀는 유관순의 사촌 유예도를 먼저 이화학당에 추천했고, 유관순을 공주로 데려 갔다. 이때 (1914년) 유관순은 12세로 추정되며, 1년 정도 영명학교에서 사애리시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후 사애리시 선교사의 적극 추천으로 유관순은 1915년경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교비 생으로 편입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보통과(초등학교 과정)에서 공부하여 1918년 4월 보통과를 졸업 했다. 그후 이화학당 고등보통학교 1학년으로 진급하여 3․1운동 당시에는 2학년으로 진급할 시점이었다.

이화학당의 교육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이었다. 이화학당에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매주 금요일 오후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었다. 또한 이날에는 이문회라는 특별활동 시간이 있어 토론을 통하여 지도력 개발과 애국사상 을 키우는 활동을 해 왔다. 특히 교비생으로 공부한 학생들은 졸

▲  앨리스 샤프 선교사-사애리시

▲ 앨리스 샤프 선교사-사애리시

업 후 일정 기간 이화학당 부속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해야 했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당인 감리회 정동 제1교회당과 담을 맞대고 있다. 정동교회를 세운 스크랜턴 목사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학생들은 매주일이면 정동교회에 참석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다녔던 첫 3년 동안 정동교회는 손정도 목사가 목회를 인도했다. 손 목사는 교회의 급속한 팽창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목회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한국인 목사 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여 양성된 목사였다. 한국인 목회자들로 인해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하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유명한 민족주의적인 기독교 목사였다. 그는 1918년 5월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떠나기 전까지 열정적인 목회로 정동교회를 총 2,772명이 참석하는 국내 최대 교회로 발전시켰다. 특히 정동교회는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요 참석자들이었고, 청년들의 교회였다. 그후 이필주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이필주 목사는 3․1운동의 민족대표의 일원이었고, 그의 목사 사택은 3․1독립운동 준비의 중요한 공간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종교인들 33명이 민족대표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포하는「선언서」가 발표되었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외치는 대중시위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족대표들은「선언서 」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종교조직과 학생조직을 통하여 미리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평화적인 의사표명을 최후의 일인이 최후의 일각 까지 표명하도록 촉구했다. 유관순의 독립운동의 불꽃은 타올랐다.

이화학당의 유관순

사애리시 선교사는 이 땅의 여성들을 개화하기 위한 여성교육에 헌신하여 유관순과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길러 내었으며,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서울의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영명여학교에서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여성교육에 대한 공로로 1938년에 그의 공적비가 영명학교 내에 건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별이 된 유관순은 1914 ~ 1916년 사이에 2년간 영명여학교에서 수학 하였던 사실이 국가보훈처에 의해 인정 됨으로서 사애리시 선교사의 교육에 의해 유관순의 민족 정신이 길러진 것이 밝혀졌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충청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어머니이자 한민족 독립운동의 별이 된 유관순의 첫 스승이었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서만철)는 지난해 8월 24일 LA 한인타운소재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유관순 열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애리시(앨리스 샤프, Alice Sharp) 선교사 기념 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김웅민 목사(위원장), 박형만 장로(공동위원장), 이한희 장로 (공동위원장) 등의 공동위원장 체제로 운영되며 사무총장 정영희 감리교 목사, 사무차장 최대영 권사 및 14명의 추진위원들로 구성됐다. LA지역에서 기념사업 추진위가 발족하게 된 것은 사애리시 선교사가 은퇴 후 30여년을 LA인근 패사디나에서 살았으며 지난 1972년 101세로 영면해 패사디나 마운틴뷰 모설리움(Mountain View Mausoleum)에 안치돼 있기 때문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 이다.

공주대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한국선교유적연구회장은 “독립운동의 표상인 유관순을 길러냈고 충청지역 근대여성교육의 어머니인 사애리시 선교사의 유골 일부라도 공주 영명동산에 있는 남편 묘소 곁으로 이장하고 우리나라 후손들에

▲  앨리스 샤프 선교사 납골당. LA인근 패사디나에 있다.

▲ 앨리스 샤프 선교사 납골당. LA인근 패사디나에 있다.

게 신앙교육의 현장으로 보존하기 위해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를 만들었다”라며 “LA 동포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1940년 일제에 의한 강제추방 후의 사애리시 선교사에 대한 행적은 최근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서만철 회장이 선교유적 순례차 공주 영명동산을 방문한 순례객으로부터 사애리시 선교사의 아끼던 마지막 생존 제자인 박한나 권사를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현재 100세로서 LA에 살고있는 박한나 권사가 간직한 일대기를 추적하여 사애리시 선교사의 임종일자(1972. 9. 8.)와 마지막 거주하였던 곳과 납골묘까지 파악하게 되었다.

박한나 권사의 ‘한나’ 라는 이름도 사애리시 선교사로부터 받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아침이면 남편 샤프 목사의 무덤을 향해 ‘오늘은 부여갑니다’, 그 다음날은 ‘논산과 강경에 갔다 옵니다’ 하고 매일 얘기하듯이 보고하면서 일생을 그렇게 보냈으며, 항상 그녀의 올갠 위에는 아들같이 젊은 남편의 사진을 놓고 생활했다고 회상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웠으며, 올갠 반주를 해가며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찬송가를 늘 함께 부르곤 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박한나 권사에게 올갠 연주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박한나 권사는 이 때 배운 실력으로 이후에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였으며, 100세인 지금도 몇 곡은 피아노 반주를 하며 찬송을 하면 함께 사는 사위가 놀라곤 한다.
찬송가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오며’ 와 304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등 100여 곡 이상을 작곡하여 한국 찬송가의 개

▲  공주 샤프 선교사 묘역. 왼쪽 비석자리가 사애리시 남편 무덤.

▲ 공주 샤프 선교사 묘역. 왼쪽 비석자리가 사애리시 남편 무덤.

척자로 불리는 구두회 교수도 이 때 주일학교를 다니며 사애리시 선교사 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행방불명된 독립군 아버지를 둔 오애리시를 입양하여 키우며 박한나 권사와 함께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이들은 방학마다 공주에 내려와 사애리시 선교사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인근지역에 사경회와 합창, 크리스마스 공연 등을 함께 다니며 전도하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871년 4월 11일 캐나다에서 출생하였으며, 1900~1940년 기간동안 38년의 인생 황금기를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1972년 9월 8일에 101세로 영면한 후 파사데나의 납골묘원에 영구 안치되었다(Mountain View Mausoleum, Columbarium of Peace, Niche:00026 Row:PL2300, Morengo Ave., Pasadena, Los Angeles,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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