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종성 대기자의 “외길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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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특종’ 기자로 살아간 삶

평생을 기자라는 “외길 인생”을 살아왔던 고 이종성 전미주한국일보 편집국장의 하관식이 3월 3일 오후 1시 글렌데일 포레스트론에서 유족과 한국일보 사우 그리고 친지들이 모인 가운데 엄수됐다. 고인은 지난 14일 LA소재 그랜드팍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유가족으로는 부인 홍선주 씨와 2남(두영, 기영) 1녀(크리스틴)가 있다. 이날 미망인 홍 여사와 유가족들과 조객들의 마지막 인사를 받은 고인의 유해는 한 줌의 재로 남겨저 흙으로 돌아갔다. 유골 옆에는 평소 고인이 애용했던 모자가 놓여 있었다. 고인의 경기고 후배로 LA방송인 출신으로 한국에서 14대와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월터 박(박원홍) 전의원은 마침 미주 방문길에 고인의 부음을 접하고 이날 하관식에 참석했다.

▲  고 이종성 대기자의 모습(왼쪽편은 초임기자 시절의 모습)

▲ 고 이종성 대기자의 모습(왼쪽편은 초임기자 시절의 모습)

이날 고인과 국내서 함께 언론 활동을 했던 김운영 전문위원(뉴시스통신)은 “고인은 법원 기자실 에 민완 기자로 날렸는데 당시 판사들이나 검사들은 이종성 기자 앞에서 그야말로 벌벌 기었다”면서 “그때 기자의 위력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 했다. 국내에서 MBC보도국 기자였던 정진철 Glin-TV 대표는 “이종성 선배는 국내 활동시 법조계 민완기자로 명성을 날렸다”면서 “전설적인 특종 기자로 우리들의 롤 모델이었다”고 회고했다. 많은 기자들은 그의 해박한 법률 상식에 서울법대 출신 기자로 생각했는데, 실상 그는 서울상대를 졸업했다. 고인은 1973년 미주에 이민한 이래 틈틈히 한국일보에 기고한 ‘잔디밭’이라는 고정 칼럼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칼럼집이 단행본으로 발행되기도 했다. 이 ‘잔듸밭’을 생전에 읽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우리 동포 이민생활의 애환을 엿볼 수 있는 책’이라는 독후감도 보내온 일화가 전해진다. 고인은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으로 특히 ‘장미꽃’을 즐겨 그렸다.

그의 기자로서의 활동은 국내는 물론 미국과 일본에서도 잘 알려졌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통신사의 기사를 중요한 취재원으로 삼고 있을 때다. 그는 격동기의 한국 현대사 현장의 체험을 기록을 남긴 전설적인 기자였다.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혁명의 역사적 현장을 누볐고, 특히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최초 사건인 64년 도쿄올림픽에서 북한 육상선수 신금단과 남쪽의 아버지 신문준씨의 극적상봉 장면을 전 언론사에 브리핑으로 화제를 모았다. 고인은 1966년에 약 4개월간 유럽을 취재하면서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광부와 간호사들과의 눈물의 만남 장면을 국내에 처음 보도해 전국의 독자들을 울리게 만들었다. 1973년 미국에 이민한 그는 당시 한인 언론의 불모지였던 미주한인사회에 새로운 언론의 지평을 여는데 길잡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1980년부터 88년까지 일본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83년 KAL 기 격추사건을 북해도와 와까나이 현장을 취재하여 명성을 날렸다. 일본 특파원 시절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와 일본의 노벨문학상 가와나비 야스나리를 만난 인터뷰는 한층 품위를 높였다.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신문대학원을 나와 1956년 동화통신 공채 1기로 언론계에 입문해 1956-65년 동화통신 공채 1기 기자 / 1965-69년 신아일보 사회부장 / 1969- 73년 대한일보 주일 특파원 / 한국일보 미주본사 초대 편집국장, 초대주필을 지냈다. 1980~1988년 한국일보 동경지사장을 지냈으며 다시 미국에 돌아와 1990년 라디오 한국사장, KTAN 사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에 42년간 활동했던 현역기자 생활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지난 2000년부터 미주한국일보 사우들의 모임인 ‘녹우회’의 회장으로 모임을 이끌어왔다. 고인은 1930년 아버지 이희양 선생과 어머니 이노희 여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조 광해군 시절인 1614년 우리나라의 최초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지봉유설’을 편찬했으며, 최초 천주교 신자의 한사람인 이수광 선생의 16대 손이다.
선조의 피를 닮아 만능의 재주와 필봉을 휘두른 ‘외길인생’ 은 우리들에게 많은 전설을 남기고 3월의 푸른 하늘 아래 영면했다. 고인이 이끌었던 한국일보 사우 ‘녹우회’는 오는 6월 중 ‘이종성 추모의 시간’을 계획하고 있다.
(성진 기자)


“한 사람의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라지기도 합니다”

고 이종성 선배님은 저의 경기중고교와 언론계 선배님으로 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신 분입니다. 1971년 1월 일본공동통신에 연수생으로 3개월간 가 있을 때 이종성 선배를 동경에서 처음으로 뵈었습니다. 당시 이 선배님은 대한일보 동경특파원겸 한국특파원단 간사였습니다. 마침 삿포로 동계올림픽이 열리기 1년전 프레올림픽 때인데 북한의 스케이트선수 신금단의 부친상봉 여부로 온 나라가 떠들석하던 시절, 함께 삿포로에 가서 2주일간 취재를 한 것이 그 분과의 첫 인연입니다. 저는 1964년 12월에 한국일보본사 17기 견습기자로 들어가서 외신부에 배치되었다가 67년 6월 미국무성 동서문화센터 장학생으로 하와이대학원에 유학와서 69년에 졸업하고 한국일보에 복귀 했다가 그해 9월에 동양통신(현 연합뉴스)정치부 기자로 스카우트되어 73년 1월엔 약관 30세로 워싱턴특파원으로 부임했습니다. L.A.를 거쳐 워싱턴으로 가던 1974년 1월에 이 선배를 미주한국일보로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더니 “워싱턴특파원 잘 하라”고 격려를 해주셨지요. 그 다음해 12월에 서울에 사표를 내러 가면서 다시 들려 인사를 했습니다.

1974년 12월 이선배가 우리 부부를 김남 미주동아 사장댁에서 함께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그 자리에서 나를 김남 사장에게 소개하면서 “당신 신문사에서 쓰시오” 하더군요. 다음 날 부터 미주 한국일보의 라이벌신문인 미주동아의 부편집장으로 출근을 했습니다. 참으로 도량이 넓은 분입니다. 미주동아일보에서 영주권을 따고 보험, 부동산중개, 부동산학교를 하다가 91, 92년에 지진과 폭동사태로 완전히 파산상태일 때, 이 선배가 다시 저를 불러 미주한국일보 장재구 회장에게 라디오한국(현 라디오 서울)의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의 앵커로 추천을 했습니다. L.A.의 KBS TV에도 객원으로 나가면서, 잘 안되는 부동산학교도 운영하면서 앵커를 하도록 이 선배에게서 크게 배려를 받았습니다. 인생은 전화위복이 될 때가 많은 게 묘미입니다. 1993년 서울의 SBS에서 갑자기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 문성근씨가 그만 뒀으니 내가 나와서 맡아달라고 해서 1994년 1월 오디션에 합격하고 1994년1월7일 첫 방송 “신년 사주팔자”라는 주제의 방송에 나가 67%라는 전무후무한 시청률로,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까 유명해졌더라”는 신데렐라 케이스가 되었습니다.

그후 KBS 생방송심야토론 사회자가 되었다가 1998년 2월에 들어선 김대중정권에 잘 못 보여 실직, 98년 7월 서초갑구 보궐선거에서 야당 한나라당후보로 압승, 국회에 입성했으며, 2000년 4월 쉽게 재선이 되어 한나라당 서울시지부위원장까지 되었으나 당내 권력투쟁에 밀려서 3선공천을 못 받는 일이 생겨서 2004년 일본후쿠오카에 유학, 2010년 만 68세에 국립대학인 사가대학에서 Ph.D.를 받았습니다. 잠시 LA왔다가 선배님의 부음을 듣고 죄송스런 마음만 남았습니다. 이선배가 87세까지 사셨다고, “그만하면 오래사셨지.” 하는 동포지인들이 있지만 섭섭한 말씀입니다. 좀 더 오래 사셨으면 소생이 여기와서 다시 생활 할 때에 자주 뵙고 말동무를 해드렸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훌륭한 학교 선배, 기자 선배이셨지요. 거듭거듭 명복을 빌며, 그곳에서 다시 만나뵈면, 신세를 갚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박원홍(전 라디오서울 앵커, 15,16 국회의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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