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젊은이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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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영웅 김영옥, ‘미육군기념고속도로’ 명칭 생겼다.

고속도로 표지판 뒤에는 한우성 동포재단이사장이…

미국에 한국인의 이름이나 한국을 상징하는 명칭이 담긴 건물이나 장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도산 우체국’(Dosan Ahn Chang Ho Post Office), ‘김영옥 학교’(Young Oak Kim Academy), ‘새미 리 광장’(Sammy Lee Square), ‘한국전쟁 기념도로’(Korean War Memorial Highway) 등등이 좋은 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 고속도로(프리웨이)에 처음으로 한국인의 이름을 딴 구간이 처음으로 생겨났다. LA와 OC한인들에게 익숙한 5번 프리웨이에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 (Colonel Young Oak Kim Memorial Highway) 표지판 기공식이 지난 3일 열렸다. 공사가 빠르면 오는 9월이나 10월 중에 5번 Fwy에서 표지판을 일반 운전자들이 보게 될 것이다. 이날 표지판 기공식에 삽을 든 인사들 가운데 한국에서 온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그자신 ‘김영옥 대령’을 흠모하여 집필한 책으로 국내외에 한인사회에 ‘김영옥 대령’의 숭고한 정신을 스며들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육군기념도로에 한국인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미국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치하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김영옥 대령은 미주 한인 2세로서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은 생전에 인류애와 나라사랑 등에 헌신한 인물들을 후세에 귀감을 위해 도로나 건물 또는 국유지 등에 그 인물의 이름을 따서 기념한다. 지난 2005년에 ‘미주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Jan.13)이 미국정부에서 선포한 이래 미주 땅에 ‘자랑스런 한인’들이 “미국 속의 자랑스런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김영옥 대령의 영웅전은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의 집념의 소산이다. 과거 본보 등 여러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간추려 다시 소개한다. 불세출의 영웅-김영옥 대령이 오늘날 이처럼 널리 알려지게된 이면에는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이 자리잡고 있다. 한우성은 30년을 한국에서 살았고, 또 다른 30년은 LA에서 살았다. 그가 미국생활 기자시절에 2005년 첫 출간한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지은이 한우성)’을 2011년에 영어로 번역한 ‘Unsung Hero:The Story of Colonel Young Oak Kim(옮긴이 장태한)’이 출판됐다. 미주 한인 이민 역사가 추가된 영문판 ‘김영옥 대령’은 4·29 LA폭동 19주년에 맞춰 출간한 것이다.

기자 한우성의 간절한 호소에 집필 승낙

이 책이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김영옥 대령에 대하여 알지를 못했을 것이다. 또한 ‘김영옥대령 고속도로’나 ‘김영옥 공립중학교’ ‘UC리버사이드 김영옥 동포연구소’도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김영김영옥옥 대령 선양 사업에 특히 민병수 변호사, 이경원 원로기자 등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한우성은 2005년 책을 출간하면서 김영옥을 이렇게 소개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소설에서나 있을 것 같은 용감하고 비상하며 인간미 넘치는 한 한국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실존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 한우성은 1992년 4·29 폭동(LA 흑인폭동)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한인들은 그 폭동에서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몰이해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 한 그는 세계, 특히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이 누구인지 를 이야길 할 수 있는 상징적인 인물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과 미국에 모두 뚜렷한 공헌을 하고, 또 한미관계는 물론 나아가 한일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한다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을 세우고 찾아 나섰다가 김영옥을 만났다. 폭동후 5년, 1997년 2월, LA에 있는 김영옥의 남루한 사무실로 찾아간 한우성은 다짜고짜 그의 삶을 책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김영옥은 한사코 거부했다. 1시간이 흘렀지만 김영옥의 마음은 바뀔 것 같지 않았고 한우성은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했다.

“약자를 위해 헌신한 영웅”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떠납니다. 김 대령님도 마찬가집니다. 지금까지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특히 한국인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는데,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십시오.” ‘마지막’이란 말 앞에 그는 무너졌다. 나이도 나이였고

▲한우성 이사장

▲한우성 이사장

, 건강도 매우 안 좋은 상태였던 것이다. 한우성의 김영옥에 대한 공식적인 취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우성이 나중에 알았지만 여러 전업작가들이 그의 자서전 집필을 제안했고, 이들 제안자들 중에는 일본에서 문학상을 받은 작가를 비롯한 유명작가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한다(그가 일본인들에게서도 존경 받는 ‘영웅’인 것은 로마 해방에 앞장섰던 ‘100대대’가 바로 일본계 2세들로 구성됐고, 이들을 지휘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나 영화 제의만도 50여 차례나 되었다고 한다. 한우성은 김영옥을 500여 차례나 인터뷰 했고, 프랑스 보쥬산맥을 비롯한 유럽일대를 포함한 그가 누빈 전장을 직접 답사하며 현장 취재하면서 그의 삶을 오롯이 복원해나갔다. 한우성은 이 책을 미주한국일보 기자생활 때 쓰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 군대를 두번 간 이채로운 경력을 지녔다. 그 경력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는 전 가족이 이민수속을 밟던 1976년 공군에 입대했다가 예상 외로 이민 수속이 빨라져 두 달간 훈련만 받고 제대했다가 사정이 생겨 이민을 못 가게 되자 국방부로 가서 다시 군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해 다시 입대, 3년을 꼬박 채우고 제대했다. 그래서 그는 연세대 불문과 75학번이지만 졸업은 1986년에 하고, 1987년에야 미국에 이민 왔다. 미국에서 한국어 번역가로 잠시 있던 그는 인종차별 문제로 상사와 심하게 다투고 그만두던 때 때마침 미주한국일보 기자모집 광고를 보고 응시, 기자가 되었다. 미주한국일보 기자 시절을 함께 지낸 그의 선배 기자들은 ‘한우성 기자는 철두철미한 연구 타입의 기자이면서 현장 답사를 생명으로 여긴 기자였다’로 기억하고 있다.

“철두철미한 연구 타입 기자”

기자로 활동하면서 2001년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 문제를 다룬 30여회의 시리즈 기사로, 해외로 나간 한국기자상 1호 수상을 비롯 유일한 비영어권 기사로 AP통신 기자상, 미국 내 한국 언론사 소속 기자로는 최초 미국 소수계 기자상을 받았고, 비영어권 언론으로 퓰리처상 1호 후보가 되기도 했다. 그는 또 2003년에는 소수계 언론 소속 기자 1호로 스탠포드대학 Knight Fellow가 되기도 했다. 스탠포드대학에 갈 때 미국에서 전설적인 한국계 기자 이경원(K.W. Lee) 선생이 추천서를 썼다. 이경원 기자는 미국에서 최초로 일간신문 기자가 된 아시안계 저널리스트였다. 또 이경원 기자는 언론인 명예의 전당인 워싱턴의 언론박물관 ‘뉴지엄’(Newseum)에 20세기를 빛낸 ‘언론인 500인’ 가운데 유일한 한국인이며 아시안으로 등재돼 있다.’

▲샤론쿼크실바 주하원 의원이 「김영옥 대령 고속도로」표지판을 소개하고 있다.

▲샤론쿼크실바 주하원 의원이 「김영옥 대령 고속도로」표지판을 소개하고 있다.

 한우성이 책을 탈고하고 출판할 당시는 미주한국일보를 떠나 비영리로 운영되는 미국 소수계 언론 연합인 <뉴아메리카 미디어> 한국부장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김영옥은 말 그대로 ‘영웅’이다. 하와이로 밀항한 사탕수수밭 노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초기 이민세대 김순권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옥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9월, 충성심이 의심되는 적대국가 일본계 2세들로 편성된 이른바 ‘100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상륙 작전에 참가, 예상을 깨고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로마 해방의 주역이 된다. 김영옥 부대는 이태리 피사도 해방시켰다. 제갈공명을 무색케 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피사를 해방 시킨 후 연합군 최초로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올라간 군인이었다. 당시 그의 전과를 증명하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김영옥이 로마 점령에 큰 공을 세우자 별이 세개나 되는 사령관이 그에게 왜 계급이 중위냐고 물었다. 다섯 번이나 진급 신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 당했다는 김영옥의 대답을 들은 사령관은 버럭 화를 내면서 옆에 있던 부관의 대위 계급장을 떼어 그에게 달아주면서 즉석에서 대위로 진급시켰다. 이후 그는 또 독일 치하에 있던 프랑스 브뤼에르 지방을 해방시키는 등 천재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전장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고, 오늘날 미국의 군사 교본을 다시 쓰게 만드는 장본인이 된다. 그의 진가는 예편했다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자원입대하여 대대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세운 혁혁한 전공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그는 38선 이남에 형성돼 있던 전선이 60Km나 북상하는 데는 그가 이룬 불패신화에 힘입은 바 크고, 이 사실은 한국 국방부도 인정하는 공식 전사다. 김영옥은 우리 정부로부터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데 이어 지난 2005년 9월 태극 무공 훈장을 받게 되었지만 당시 암 투병으로 인해 수여식은 가지지 못했다. 나중 2005년 하와이 영결식장에서 수여되었다. 김영옥은 이미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을 비롯 프랑스에서 십자무공훈장(2등)에 이어 지난 2005년 2월에 최고무공훈장인 레종도뇌르를 받은 바 있어, 우리나라까지 포함하면 3개국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인물이 됐다. 은성 무공훈장을 준 미국도 언젠가 최고무공훈장을 서훈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이를 위해 미국 의회와 한인사회가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전쟁 영웅아닌 인간적 영웅 ‘김영옥’

많은 사람들은 김영옥을 ‘전쟁영웅’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 한우성은 김영옥의 삶을 ‘전쟁 영웅’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미 수백 명의 전쟁고아를 돌본 휴머니스트였던 김영옥은 1972년

▲김영옥이 돌본 한국 고아들

▲김영옥이 돌본 한국 고아들

장군이 되지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가 장군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한편에서는 한국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너무 심했고, 그로 인한 심한 후유증이라고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아시아계, 다시 말해 유색인이란 점이 중요한 장애물 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군복을 벗기 오래 전부터 일단 군을 떠나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돌아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김영옥은 여성·아동·청소년·노인·장애인·빈민·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이들의 권익을 지키고 신장시키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한우성은 김영옥의 삶이 자칫 무공훈장에만 초점이 맞춰져 단순히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훈장을 달고 있는 어느 전쟁 영웅만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김영옥의 소박한 희망을 전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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