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서…뉴욕에서…SF에서…텍사스에서’ 추모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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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 세우기 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김복동할머니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식이 LA를 포함 샌프란시스코, 뉴저지주 그리고 택사스 달라스에서 각각 엄수됐다. LA 시의회는 6일 추모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3일 일요일 오후 4시 글렌데일에서 소녀상 공원에서 고 김복동 할머니 추모행사가 개최됐다. 미국 내에 최초로 평화의 소녀상이 설립된 글렌데일 시립 중앙도서관 앞 공원에서 열린 이날 추모 행사에는 한국인은 물론 중국계 일본계 아르메니아계 주민 등 70여 명이 참석했다. 주말 내내 캘리포니아 일대를 휩쓴 겨울폭풍으로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참석자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김 할머니를 기리는 헌화 행렬을 이어갔다.

빗속 헌화행열 엄숙히 거행

가주한미포럼 김현정 대표는 “한국에서 온 가족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가족 포르탄티노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 보좌관 로라 프리드먼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 보좌관 묘경스님 김요한 신부 최재영 목사 3·1여성 동지회 이연주 회장 엘에이 나비 등이 함께했다”고 전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김진덕 정경식 재단과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위안부정의연대(CWJC)도 3일 오후 4시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메리 광장에서 김복동 할머니 추모제를 열었다. 세인트메리 광장은 미국 대도시에 처음으로 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진 장소다. 김진덕 정경식 재단의 김한일 대표와 릴리안 싱 줄리 탕 판사 등이 추모사를 읽었고 다민족 연대 공동체로 구성된 위안부정의연대 주디스 머킨스 대표도 고인의 생전 활동을 기렸다.
참석자들은 김복동 할머니가 생전에 말하던 “우리가 함께하면 못 이룰 게 없다”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 “일본정부는 사과하라”며 목청을 높였다.

주최 측은 정의와 평화를 외친 인권운동가인 김 할머니의 명복을 빌며 생전 평생 헌신했던 위안부 피해 알리기 운동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뉴저지주 포트리 유스카운슬(YCFL) 학생들은 3일 컨스티튜션 공원에 있는 김복동할머니2위안부 기림비 앞에 모여 고 김복동 할머니를 추념하는 묵념 및 헌화 행사를 가졌다. 또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한인 정치인들이 2일 뉴저지한인회에 마련된 위안부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 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기렸다. 팰리세이즈팍의 크리스 정 시장, 이종철·앤디 민 시의원 등을 비롯 데니스 심 (릿지필드), 글로리아 오(잉글우드클립스), 재니 정(클로스터), 벤자민 최(레오니아), 지미 채 (듀몬트) 등이 묵념을 올렸다. 택사스주 달라스에서도 고 김복동 할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달라스협의회(회장 유석찬)는 지난 1월 30일(수) 달라스 한인회 사무실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여성인권운동가로 살다 삶을 마감한 고 김복동 할머니의 넋을 기리는 자리를 마련했다. 달라스 한인회(박명희)와 함께 마련한 분향소에 민주평통 달라스협의회 자문위원, 주요 한인 단체 관계자, 달라스 한국여성회 회원, 그 외 일부 동포들이 찾아와 고인을 추모했다. 주휴스턴 총영사관 주달라스 출장소 권민 영사도 추모식에 참석했다. 마침 회의차 달라스 한인회 사무실에서 모임을 가졌던 달라스 한인회 전직회장단도 분향했다. 유석찬 회장은 추도사를 통해 고 김복동 할머니의 영면을 아쉬워했다. 유 회장은 “14세 소녀의 나이로 전쟁터로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모진 고통과 아픔을 겪으신 할머니께서는 8년이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며 “할머니께서는 일본의 진정한 사죄와 제대로 된 배상을 요구해 온 인권운동가이자 평화활동가셨다”고 말했다.

일본의 진정한 사죄 요구

유 회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뿐 아니라 무력분쟁 중에 만연하게 자행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평화 나비’가 되어 평화운동을 이끌어 오셨다”며 “할머니의 우리의 영웅이셨고, 우리의 희망이셨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그러면서 “할머니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할머니의 인권정신을 지켜나가겠습니다”라며 “할머니, 애 많이 쓰셨습니다. 남은 것은 우리가 다 맡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1년여의 암 투병 끝에 지난달 28일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했으며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영결식이 엄수됐다. 1926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생한 김 할머니는 15살이던 1940년 일본군에게 추모속아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후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 끌려다니다가 8년 만인 1947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 할머니는 1992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하며 여성 인권 운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위안부 피해 증언을 시작으로 1993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전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알렸다. 김 할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일본대사관 앞에 서서 우리에게 명예와 인권을 회복시키라고 싸우기를 계속하고 있지만, 지금 세계 각지에서 우리처럼 전시 성폭력 피해를 보고 있는 여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고 김복동 할머니는 미국내 소녀상 제막식 등에도 참석해 미주사회와의 인연도 깊다. 지난 2015년 워싱턴지역을 방문해 “일본은 우리에게 군인 옷 만드는 공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끌고갔다”며 “일본이 저렇게 말을 안 들으니까 미국 워싱턴까지 와서 외치게 됐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1993년 오스트리아 빈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해 위안부 피해를 증언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서 증언을 이어가 위안부 피해자의 상징으로 평가돼 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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