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타운 개척자 ‘이희덕’의 쓸쓸하고 허망한 죽음과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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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의롭고 숭고한 정신이…

‘오늘날의 코리아타운을 만들었다’

이희덕미국땅에 ‘차이나타운’이나 ‘리틀 도꾜’보다 더 훌륭한 ‘코리안 빌리지’(Korean Village)를 꿈꾸었던 “코리아타운 개척자” 이희덕 회장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가 코리아타운에서 마지막 지녔던 직책은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 이었다. 미주류언론들은 <이희덕이 있었기에 ‘코리아 타운’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LA타임스는 2001년에 “무에서 코리안타운을 일궈낸 올드타이머”라고 그를 소개했다. 지난 14일 오후 4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된 한국장의사 에는 과거 독일 광산 지하 막장1000미터에서 석탄을 함께 캤던 몇 안되는 동료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날 고향 공주의 죽마고우인 박형만 서독동우회 이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이 회장은 코리아타운 개척의 주인공”이라고 했으며, 집례를 맡은 장덕재 목사는 코리아타운 개척자 인이 회장이 평소 좋아했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 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모든 것은 순간이고/ 또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느니.>라는 푸시킨의 시 구절을 낭독하면서 “올드타이머 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추모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코리아타운의 심장부인 올림픽가는 한국에서 관광오는 동포들이 한번쯤은 둘러보는 거리다. 올림픽 거리에 한국 기와 지붕을 본 따서 세운 ‘Koreatown’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안내판을 보면서 “아… 여기가 코리아타운이구나….”며 추억거리 사진을 찍는 모습도 간간히 볼 수가 있다. 오늘의 ‘LA코리아타운’이 생겨나기 시작한 1970년대에 타운 개척자 중에는 이희덕이란 억척스런 충청도인이 있었다. 유독 미국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두고 그를 지켜 보았다. 그는 다른 ‘올드 타이머’들과는 독특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남 공주 출신인 그는 감리교 선교사이며 유관순을 키운 사애리시가 세운 영명고를 다녔고, 충남대 화학과 학사로 졸업 후 24세에 당시 “서독 광부”로 가서 독일 광산에

▲10번 프리웨이와 놀만디에 세워진 KT표지판(오른쪽이 이희덕)

▲10번 프리웨이와 놀만디에 세워진 KT표지판(오른쪽이 이희덕)

서 3년여를 보냈다. 광부로서 계약을 끝낸 그는 공부를 하고 싶어 1967년 스위스 주리히대학 호텔 경영학과를 1년 다니다 중퇴하였다. 그후 1968년에 다른 광부들처럼 미국에 와서 “파독 간호원’ 출신인 이길자씨와 1969년에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다. 미국에 온 “서독광부”와 “서독간호사”들은 오늘의 코리아타운 개척자의 한 그룹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희덕 회장은 처음 용접공으로 억척스럽게 일을 하면서 1960년대 말 어떤날 다운타운 근처 ‘차이나타운’(Chinatown)을 구경하게 됐다. 중국식의 거대한 대문과 중국 식당 호텔 선물점 등등 각가지 상점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코리아타운이 없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LA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영주권도 취득하고 간호사로 일한 부인과 함께 틈틈히 저금한 통장에 있던 7,000달러에 은행융자를 받아 1970년 지금의 올림픽 가와 하바드 남쪽 코너 길에 있던 2층짜리 빌딩 1층에 자리잡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마켓을 구입, ‘올림픽 마켓’(Olympic Market, 3122 W. Olympic Bl. LA)이라고 명명하면서 그로서리 마켓을 열었다. 당시 이 마켓은 올림픽 거리에서는 최초의 아시안 마켓이고, 한인이 주인인 식품점으로서는 두번 째 식품점이었다. LA시의 역사 자료를 수록한 Survey LA사이트나 미국 언론 그리고 이민역사를 연구하는 사회 학자들은 이희덕 회장이 시작한 ‘올림픽 마켓’이 바로 “LA코리아타운의 시작” 이라고 설명한다. 당시 이 회장은 건물 외벽에 크게 “올림픽 마켓 Olympic Market”이라고 한글과 영문으로 상호를 부착했으며, 파는 품목인 쌀, 라면, 냉면, 참기름 간장 등등을 큰 글씨로 가격까지 알려 벽면을 장식했다. 차를 타고 올림픽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가격을 알 수 있도록 크게 장식했다. 식품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방 만화가게’도 있다고 선전했다. 재미있는 현상은 그의 가게 안쪽엔 지인을 찾는 쪽지들이 나붙은 판이 있었다. 바로 사랑방 안내판이다. 이민 온 사람들이 먼저 온 친구를 찾는 쪽지도 나붙었고, 동창회를 찾는 글도 있었다. 이같은 쪽지를 보고 떨어져 살던 친척들도 만나게 되어 마치 이산가족 상봉이나 다름없는 광경도 나타났다.

“미국땅에 한국을 심자”자긍심

지금 같으면 수퍼마켓에 해당하는 50여년 전 ‘올림픽 마켓’은 처음엔 월 매상이 고작 7천 달러로 고전했지만 곧 불어닥친 ‘제 2의 이민물결’로 한인 이민들의 유입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그의 마켓이 대박을 치면서 영업 시작 3년이 지나면서 월 매상 30만 달러 가까이 뛰어 올랐다. 어느정도 여유 돈이 생기자 그는 평소 꿈꾸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국 땅에 한국 문화를 심는 한인촌(Korean Village)을 건설하자’였다. 한인촌은 바로 오늘의 ‘코리아타운’의 의미이다. 그는 우선 올림픽 마켓이 자리잡은 2층 건물을 매입하면서 이어 1975년엔 한식당 겸 나이트 클럽 ‘영빈관’(VIP Palace, 3014 W. Olympic Bl. LA)을 올림픽 길에 세우기에 이른다. 그가 남긴 말들을 소개한다.
“돈을 벌면서 LA한인타운을 제대로 만들어 보자 생각했죠. 미국내 LA, NY, SF 그리고 몬테벨로 등 주요 도시마다 차이나타운은 많았지만 한인타운이란 없었으니까요. 일단은 제대로 된 건축물을 지어 한인타운 개발의 첫 삽을 뜨고 싶었어요.” 그가 생각한 ‘코리아타운’ 지역은 우선 올림픽 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8가, 남쪽으로는 11가, 그리고 동쪽으로 버몬트 애비뉴, 서쪽은 웨스턴 애비뉴를 있는 직사각형 경계였다.

나중 2010년 LA시 당국이 정한 코리아타운 경계는 동쪽 버몬트 애비뉴, 서쪽 웨스턴 애비뉴, 남쪽으로 올림픽 불러 버드, 북쪽은 3가로 한 것을 보면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그는 올림픽 거리 일대를 ‘코리안 빌리지’(Korean Village)로 건설하고, 올림픽 거리 동서 양쪽에 차이나타운의 심벌인 대형 대문처럼 코리안타운 게이트(Gate)를 크게 세우는 계획도 만들었다. 우선 그가 1975년 세운 ‘VIP Palace’(영빈관)은 당시로서는 커뮤니티 센터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나가 직접 청기와 1만개를 공수해 왔고 단청 장인들까지 초빙해 ‘영빈관’이 한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도록 했다. 당시 ‘영빈관’은 한인들의 연회 장소였고, 각종 비즈니스 집회 장소였다. 결혼식도 열리고, 동창회나 졸업 축하 모임도 열리고, 생일, 환갑잔치도 열렸다. 그 뿐 아니고 정치인을 위한 후원 모임 장소로도 열렸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봅 도울 의원도 영빈관을 찾았고, 연방보건교육복지 장관인 로버트 핀치도 영빈관 파티 손님이었다. 당시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대통령도 영빈관 모임에 참석했다. 이같은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담은 ‘영빈관’으로 인해 그는 LA타임스를 비롯 주류사회 신문 방송 등 유명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코리아타운 건설을 주도하는 개척자로 크게 알려졌다. ‘영빈관’은 나중 ‘American Classics Restaurant Award’에도 올랐다. 특히 1976년 미국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특집 ‘성공한 이민자’로 이희덕 회장의 코리아타운 개척자로 LA타임스를 비롯해 미최고의 시사주간지 TIME, Newsweek 등에서 대서특필 했다. 또한 CBS, NBC, ABC 등 3대 방송과 LA로컬 KTLA, CH-13등도 성공 이민자 특집 인터뷰에 이희덕 회장을 조명했다.

“성공한 이민자”의 쓸쓸한 죽음

이후 그는 70년대 후반 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코리아타운번영회 회장 등 한인상공회의소, 체육회 등 임원으로 봉사했으며, 특히 당시 톰 브래들리 LA시장을 포함해 LA시의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샌타모니카 프리웨이 선상 노먼디 출구 인근에 ‘코리아타운’ (Koreatown)이라는 사인판 설치를 비롯 ‘LA한인 축제’를 돕고, 8가 파출소 건립을 주도하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영빈관’의 성공적 출발에 그는 올림픽과 노먼디 인근 5블록을 사들여 ‘코리언 빌리지’를 위한 코리아타운 재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당시 톰 브래들리 LA장들과 정치인들을 위해 로비 자금으로 5만 달러 후원회도 마련하는 등 코리아타운 재개발 지구로 만드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런 노력 등으로 LA시 정치인들이 한인사회 파워를 재삼 실감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코리언 빌리지’ 1차 프로젝트는 VIP플라자(3030W. Olympic Bl. LA)건립이었는데 1979년 완공과 동시에 40여 곳의 입주업체가 들어설 만큼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여세를 몰아 2차 프로젝트로 진행한 것이 바로 5층 건물에 230개 호텔룸이 들어가는 VIP호텔 건립이었다. 영빈관 인근 아파트 6채를 사들여 설계비와 아파트 철거 부지 정비 등 50만 달러를 들여 착공했지만 계획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인데 9%였던 은행이자가 23%까지 뛰어오면서 재정적 큰 부담이 몰아쳐왔다. 여기에 VIP플라자 입주자들이 렌트비를 내지 않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나면서 장기화되면서 그 자신이 매달 3만 달러가 넘는 은행이자를 물어야 했고 결과적으로 600만 달러가 넘는 손실 끝에 결국 그는 1982년 모든 부동산을 모두 처분하고 파산신청(챕터-11)을 하기에 이른다.

▲고인 장례식장에 세워진 안내판에 고인의 업적이 담겨있다.

▲고인 장례식장에 세워진 안내판에 고인의 업적이 담겨있다.

그에겐 일부 한인들에 대한 섭섭함과 아쉬움이 서려있다. 한때 올림픽 거리에 한국을 상징하는 코리안 게이트를 건설하기 위해 타운 비즈니스 맨들을 초청해 열심히 설명하고 ‘함께 건설하자’고 호소도 했다. 하지만 좋은 말들만 하고는 실제 협력은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코리안 게이트는 무산됐다. 나중 그는 미국언론과 인터뷰에서 ‘한인들은 개인적으로는 똑똑하지만, 공동목적으로 일하는데는 무리가 있다’며 섭섭함을 나타냈다. 그 후 사업을 정리하고 1986년 중국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 뒤 10여년을 중국에서 백두산 개발 두만강 유람선 띄우기 프로젝트 등 사업을 진행했으며, 아프리카까지 진출해 건강식품 차 사업 에도 종사하다가 LA로 돌아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2008년엔 웨스턴 길에다 이승만 전대통령의 사가 이름을 딴 ‘이화장’이란 한식당을 차리고 아래층은 식당, 윗 층은 이승만박사 기념사업 등으로 운영했으나 얼마 못가 폐점하기에 이르렀다. 그기간에 윌셔 이벨 극장에서 이승만박사를 기념하는 대대적인 행사도 열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후 2010년부터 평소 남은 여생으로 시작한 사업이 농원이었다. 평소 꽃과 나무를 좋아했던 그는 미국인 고객들에게 정성으로 다듬은 식물들을 제공해 신용도 얻었다. 그렇게 10년째 농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다가 지병으로 지난 7일에 80세 일기로 조용히 삶을 마감했다.
그는 지인을 만나면 ‘이제는 자식 같은 꽃과 나무를 돌보고 또 이를 좋아하는 고객들과 함께 수다 떠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일부러 코리아타운을 찾거나 옛날 함께 타운에서 가깝게 지냈던 올드타이머들도 만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코리아타운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2016년에 한 언론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난 과거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큰 돈을 날렸지만 그게 동포들의 터전인 코리아 타운이어서 후회 없어요. 그것을 밑거름으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으니까요. 올드타이머는 죽지 않아요. 다만 사라질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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