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C학술대회 특집1 – ‘진정 이 시대의 우리 지도자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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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00년전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이념이나 사상을 떠난 지도자를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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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포 중에 열 사람, 스무 사람이라도 진정한 의로운 자의 정신으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면
장래 천 사람, 만 사람이 같은 정신으로 같이 나아가질 것을 믿습니다.” (도산 안창호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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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최초의 미국 일간지 기자였던 이경원(K.W. Lee)대기자는 아메리카 땅에서 활동한 독립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외로운 여정’(A Lonesome Journey)에 담았다. 그는 “미주한인 이민의 역사는 1세기가 훨씬 넘지만, 미주 한인 선조들의 이야기는 국내는 물론 미주한인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책 서문에 말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정체도 미주한인 사회에서 태동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미주한인사회에서 불길을 지폈다. 단적인 예로 서울대학교에 정치학과가 최초로 신설된 것도 미주 한인 교수(최봉윤 교수)가 만들었다. 지금 국내외로 3‧1운동 100주년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데,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는 미주한인들이 재정을 지원하지 않았으면, 결코 유지되지 못했다. 이제 미주한인사회는 독립운동가들과 이민 선조들의 이야기를 널리, 널리 전해야 한다. 그것이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 USC호텔에서 19일 개최된 「토크 콘서트 」에서 김완중 총영사가 감사인사를 하고있다.

▲ USC호텔에서 19일 개최된 「토크 콘서트 」에서 김완중 총영사가 감사인사를 하고있다.

“우리 동포 중에 열 사람, 스무 사람이라도 진정한 의로운 자의 정신으로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면 장래 천 사람, 만 사람이 같은 정신으로 같이 나아가질 것을 믿습니다.” 미국에서 청년 수양 단체 ‘흥사단’을 창단한 도산 안창호가 동포들에게 고한 말이다. 지난 19일 USC 대학에서 열린 ‘독립운동 100주년 학술대회’ 3부 순서인 미주독립운동가 후손의 입장에서 보는 독립운동과 선조들에 대한 회고, 애국 지사와의 일화 등 대담을 나누는 토크 콘서트(Talk Concert)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인 이민사회와 조국 동포들에게는 청량제와 같은 모임이었다. 이날 모임은 LA총영사관(총영사 김완중)과 USC 한국전통도서관(관장 조이 김)이 공동주최한 ‘독립운동 100주년: 1919년의 봄, 독립운동과 디지털 아카이브’(Commemorating The Centennial: Spring 1919,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Digitized Archives) 학술행사의 마지막 3부 프로그램이었다. 또 이는 올해 LA동포사회가 준비한 3‧1운동 및 임시 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행사들의 대단원을 마감하는 행사였다.

미주 독립운동가 후손 토크 콘서트

이날 USC 호텔 빅토리 룸에서 개최된 ‘토크 콘서트’에는 안창호 선생의 막내 아들인 랄프 안씨, 서재필 박사의 종증손자 서동성 변호사, 정한경(Henry Chung DeYoung) 박사의 양아들 리대영(Lee DeYoung), 김규식 선생의 친손녀 김수옥 박사, 송헌주 선생 외손자 김동국 회장 등 독립애국지사의 후손들이 참석해 독립 운동가들의 나라 사랑을 감동적으로 전했다. ‘토크 콘서트’는 독립운동가 후손의 입장에서 보는 독립운동과 선조들에 대한 회고를 논하는 자리였는데 우리가 몰랐던 독립 운동가들의 ‘외로운 여정’을 담아내는 자리여서 숙연함과 앞으로 후세에 무엇을 남겨야 하는 ‘의미’를 준 시간이었다. 특히 독립운동가이며 사업가인 정한경 박사에 대하여 양아들 리대영(Lee DeYoung, 대영테니스 아카데미 원장) 코치가 전하는 이야기는 가슴에 스며드는 애잔함과 독립운동가의 ‘외로운 여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정한경은 14세 나이에 홀로 미국에 유학와서 네브라스카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학사, 석사 그리고 아메리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 다음으로 2호 박사 소유자다. 정한경은 100년 전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하여 무지했던 때, 유창한 영어와 해박한 지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교류하며 한국을 알리는 어려운 작업을 했다. 그는 4자녀를 두었는데 다섯번째 아이를 한국에서 입양했다.

사람들그 아이가 바로 리대영 원장이다. 리대영 원장은 1956년 입양되어 정한경이 사망한 1886년까지 함께 살면서 부자지간의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정한경은 안창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이승만을 많이 도왔다. 리대영 원장은 “보통 독립운동가라면 가족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독립운동에 매달려 가족들이 힘들었으나, 아버지는 독립운동과 사업도 성공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정한경은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은 모두 천문학, 화학, 언어학, 의학, 컴퓨터 공학 등 분야에서 성공하도록 키웠다. “아버지는 미국 올 때 한국을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시킨다는 확실한 인생 목표를 두고왔다”면서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고 부터 아버지의 인생목표가 한반도 분단을 막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 날 아버지는 나에게 자신은 한국의 분단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인생이었다고 말씀 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는 한국에 대한 책을 다섯권이나 썼으며, 대한민국 최초 주일대사를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최고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면서 “아버지는 가정을 책임지고 가족들을 안락하게 생활하도록 노력하면서 독립운동에도 열심이셨다”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홀로 가진 것 없이 영어도 못하면서 미국에 처음왔던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고 말했다.

“내 인생은 실패 한 것”

다음은 정한경과 아들 리대영이 생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 미국에 처음와서 세운 계획은,
정한경 – 미국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이해하려 했고, 영어는 필수로 잘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사회적 품위를 지키며 지도력과 성공을 통해 미국을 이해하는데 노력했지. 무엇보다 벤자민 플랭클린이 남긴 글들을 내가 익혀야 할 공식으로 정했다. 당시 미국인 들은 동양인들에 대하여 쌀 한공기를 먹으려고 철도 건설작업장에서 막노동하는 일꾼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미국인들이 매력을 느끼는 일을 찾았는데,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이 사진술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배웠고 전문 사진가로 자격을 받고 스튜디오까지 설립했다. 미국인들이 나에게 와서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잘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 아버지는 왜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나요?(리대영은 6세까지 한국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나 대학에 입학했을 때 모두 잊어버렸다)
정한경 – 처음에는 네가 영어를 빨리 배우기를 원했지. 영어를 악센트 없이 유창하게 하길 바랬어. 네가 한국어를 하면서 미국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지. 네가 나중에라도 나에게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면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었을 것이다.

– 아버지는 78년이나 유지한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뒤늦게 미국시민권을 취득한 이유는,
정한경 – 한국인으로서 더 이상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야.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이며, 내가 한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그러나 내가 추구한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했지. 그러니 이제 미국이 나의 조국이 된것이지…

–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했을터 인데 어떻게 견디었는지요?
정한경 – 인종차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있을거야. 나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00년대초 나는 백인사회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나는 신체도 작아서 육체적으로 위협을 줄 수도 없었다. 내가 그들보다 강하기 위해 언어를 잘하고 이해관계를 잘 이끌어 가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 영어를 잘 하셨는데 어떻게 빨리 배웠나요?
정한경 – 영어는 반드시 내가 정복해야하는 과제라고 생각했지. 미국에서 만난 한사람 한사람이 나에게 한 단어 이상 가르쳐 준다고 확신하면서 살아갔지. 나는 고정관념과 사회적 인식은 인종에서 비롯되는것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적 리더십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지.

– 아버지는 여러면에서 선구자였는데 외롭지 않았나요?
정한경 –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어려웠어. 결코 적응 할 수 없었지. 아시안으로 미국에 와서 미국식으로 동화하면서 산다는 것에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거든. 비록 내가 국제외교 정치와 연관돼 있고, 책도 여러권 쓴 저자이고, 한국문화와 중국문화까지 통달했어도 누가 알아주나. 그리고 나는 가족도 책임져야해. 아주 깊고 속이 텅 빈 그리고 뼛속까지 아픈 외로움이었지만 내 인생이야. 불평하지도 말고 남에게 보이지도 말라. 아마 초기 한인들 모두 이러한 것을 느꼈을거야.

선구자의 고독과 외로움

우사 김규식 선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파견되어 대한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고 선생은 YMCA와 배재학당 등에서 민족 계몽운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좌우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통일된 남북정부 수립을 바라던 독립운동가였다. 김 선생은 1918년 몽양 여운형과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애국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는 이듬해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민족대표로 가기 전에 동지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조선 반도는 쌀알만큼 밖에 나타나 있지 않고, 조선이란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겠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당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이렇게 하여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만주와 일본, 국내 각지에서 조선 독립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3‧1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2‧8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김규식 선생의 친손녀인 김수옥 박사는 “할아버지는 해방된 조국에서 단독 정부 수립이 아닌 통일된 한국 정부를 바라셨다. 파리강화회의에 간 이유도 그것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걸 알지만 강대국들 사이에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알리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해방된 조국에서 평양에 남북협상을 하러 간 것도 할아버지 힘만으로는 역부족인걸 알지만 통일된 한반도를 바라셨기 때문에 갔을 것”이라며 “그때의 남북협상이 해방기 남과 북이 서로 직접 대화를 나눴던 유일한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어느 이념이나 사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외세의 압력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끼리 단합하여 통일된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이유 하나 뿐이었다”고 강조했다. ‘해방 당시 좌우 합작을 중시하였지만, 현실을 냉정히 통찰했던 우사의 정신이 지금의 한반도 정세 상황에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라는 과제에 대하여 김수옥 박사는 “남한과 북한은 지금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잖아요.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대화를 통해서 한민족이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북통일이 되면 더 잘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조금 더 잘 사니까 내가 10개 먹을 것을 북한 사람에게 3개 정도 양보한다고 해도, 통일이 된다면 후손들이 그 이상의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물론 경각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00년 전처럼 진정한 지도자가 없다고 한다. 과연 어떤류의 인물이 아쉽고 요긴한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되는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우리 사회에 정말 인물이 없는가? 일생을 큰 통속에서 살았다는 그리스의 길거리 철인 ‘디오게네스’는 대낮인데도 등불을 밝혀 들고 아테네의 거리를 헤맸다고 한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우리 커뮤니티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찾으려면 우선 100년 전의 아메리카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선조들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들의 사명을 다한다면 사람다운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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