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일본 천황’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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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황’은 어떤 존재인가

“레이와 시대”가 출발한 일본을 보면서

일본이 새국왕 나루히토가 붙인 연호 소위 ‘레이와(令和)’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시끄럽다. 언론이 전하는 바로는 일본국민들이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새 국왕이 평화헌법을 바꾸려는 ‘아베’내각의 정책에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을 특히 짚은 곳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74년이나 지난 탓인지, 군벌의 침략에 따른 전쟁범죄는 현 일본에서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지고, 역사를 조작해서 꾸며낸 황국사관(皇國史觀)이 다시 꿈틀거리며 명치(明治)혁명의 본질이 다시 미화되는 기미도 감지하게 된다. 헌법상 상징적 국가 원수이고 정치와는 일체 무관한 입헌 군주 국가라고 하지만.
일본의 천황(天皇)이라는 존재는 8세기 경부터 문헌에 등장한다. 그 가계가 어느면에서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2019년 4월 말일 퇴위한 ‘아끼히도’ 천황은 2년 전에 그의 선조 중 간무(일본의 공식 ‘천황 리스트’에서는 50대 천황으로서 8세기 경)천황의 어머니가 백제의 왕녀였다고 발언한 것이 일본에서 보도됐었다. 천황의 가계가 우리민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한국의 재야 사학계 만이 아니라 일본의 여러 역사 연구단체도 백제나 고구려와 일본과의 관계, 특히 현 “나라(奈良)”에 자리 잡았던 남조(南朝)와 교또(京都)에 자리 잡았던 북조(北朝)의 관계가 상당히 깊이 연구되고 있다.

서기 604년에 백제에서 승려를 초빙하여 천문지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스이꼬(推古-33대, 여성)천황 때 역서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이는 소위 ‘나라(柰良)’의 야마도(大和)조정 때이다. 그러나 현 일본의 자료에도 천황(天皇) 칭호가 처음 붙은 것은 40대 덴무(天武)천황 때라는 설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조작하다 보니 모두 두드려 맞추어도 정확히 맞추어지기는 힘들다. 일본 귀족의 가계, 또 명치 이후 현재까지의 일본 지배세력의 혈통도 추구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드러날 것이다. 일본의 통치세력의 뿌리가 특히 백제와 긴밀하다는 증거들이 속출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천황은 명맥을 유지 하는듯 마는듯하면서도, 막부의 장(長)인 쇼궁(將軍)을 형식적으로 임명하는 권한은 있었는데 도꾸가와(德川)막부 시대에 들어서서

▲ 일본의 새국왕 나루히토 부부

▲ 일본의 새국왕 나루히토 부부

는, ‘쇼궁’의 간섭이 심했고 눈치를 보면서 경도지방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초라한 영주 신세로 전락돼 있었다. 일본에서 발행한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에도 “실권도 없었고 연호나 바꾸는 권한을 소유하고, 역대 실권 세력의 보호를 받으며 다도(茶道)나 시가(詩歌)를 음미하며 옛 부터 데리고 있는 부하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궁핍하게 지내고 있었다. 도꾸가와 막부 집권 중에는 경도에서 1만석 내외의 수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처지였다”고 명치유신 직전의 천황을 설명하고 있다. 덕천막부 말기 2~3대 쇼궁(將軍)들은 문명개화의 거센 바람에 몰려 판단이 힘든 사태를 당하자 당시의 천황 ‘효명(孝明’)과 비교적 자주 내왕하며 보고도 했었다. 천황가와 의논하는 일도 생기자 천황의 존재가 수세기 만에 관심사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천황”의 유래도 불분명

도꾸가와 막부는, 초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방침에 따라, 반역하는 세력의 발생을 미연에 막기 위한 계책으로 문치에 중점을 두도록 하는 정책을 써왔다. 신분제도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순으로 묶어놓고, ‘사무라이’들은 전투요원이라기보다 관리역할을 맡는 격이 되어 특별대접은 받았으나 ‘다이묘’의 군사력으로까지는 힘이 되지 못했다(Harvard 대학교의 일본학 연구실 자료). 그래서 힘이 약한 작은 ‘항(藩)’들은 막부에 순종했지만 강한 ‘항’들은 막부의 지시를 무시했다. 명치유신(明治維新)이라고 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자 막부 측의 병력은 당연히 방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막부가 혁명군에게 ‘에도(江戶)’에 무혈입성을 시켜, 명치혁명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됐다. 막부의 마지막 쇼궁은 요시노부(德川慶喜, 재위 1867. 1. 10 ~1868. 1. 3)로서 만 1년도 채우지 못했고, 본거지 ‘에도’에서는 단 하루도 ‘쇼궁’으로서 근무한 일이 없으며 1913년에 76세로 죽어 ‘쇼궁’으로서는 최장수를 누렸다. 정권교체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와중에 당시의 천황인 효명(孝明)이 35세의 젊은 나이로 1867년 1월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연두가 사인이라고 했으나 그 급사사건은 지금까지도 타살설, 독살설이 꼬리를 물고 있다. ‘효명’의 첫 아들은 병약해서 어려서 죽고, 역시 병약했다는 둘째 아들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한달 후인 그 해 2월에 새 천황(天皇)으로서 경도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그를 명치(明治)라고 했다. 명치는 다음해인 1869년 ‘도꾸가와 요시노부’와 혁명군 사이의 합의를 거쳐 천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에도(江戶-현 동경(東京)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결국 명치정부의 새 수도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동경을 수도로 한다는 법적 근거는 아직도 일본에 없다. ‘명치’는 평생 4번밖에 사진을 찍은 일이 없다하여 그의 정확한 얼굴, 인상 등이 세상에는 별로 얼려져 있지 않으며 초상화가 몇 장 발표된 것이 특이하다고 한다. 45년 간이나 천황 자리에 있었는데 의문스러운 점이 있는 인물이라 하겠다. 현 야마구찌현인 죠슈(長州) 세력 중심의 혁명주체가 지배한 일본은 황국사관(皇國史觀)이라는 조작된 역사관을 만들었다. 황국사관으로 무장하여 천황을 인간이 아닌 신(神)으로 만든 탓에 일본은 명치시대부터 2차 대전 패망 때까지 천황이라는 말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게 하고, 본국이건 식민지 이건 위반하면 불경죄로 엄하게 처벌했다. 또 일본국민들이 ‘천황’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때는 즉시 차려 자세로 고쳐 “황송스럽게도 천황폐하께서…” 라고 말문을 열며 신격화시키는 쇼를 반드시 하도록 철저하게 교육했었다. 패전 후에 그 금기가 풀리자 ‘명치’가 어머니 인 효명왕의 황후나 생모를 평생 한 번도 만난적이 없었다는 말도 널리 세상에 퍼지고, 근래의 일본에서는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공공연하게 많이 제기되고 있다. ‘명치 바꿔치기 설’이 나돌아 지금 일각에서는 시끄럽다. 그렇게 하면서 영국 등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을 흉내내어 침략국가로 변해간 것이 일본 근대사의 시작이다.(명치가 천황이 되는 과정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한 이등박문(伊藤博文) 의 공작이 있었다는 설이 많이 공개되고 있다.) – 이준영 (원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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